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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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일.

 

 

 

오늘은 바다에 간다. 일어나자마자 샤워를 하고 식빵을 데우고 헐렁헐렁한 티셔츠에 핫팬츠를 꺼내 입는다. 화장도 해볼까 하다가 어쩐지 너무 과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기초화장만 간단하게 한다. 선크림을 바른다. 오랜만에 인희가 사준 주얼 달린 슬리퍼를 신고 선글라스를 낀다. 전화고 지갑이고 다 필요 없다. 화분 하나 옆구리에 끼고 오늘도 조수석 창문을 박살 낸다.

 

가자 가자 바다로 가자. 그전에 마트에 들른다. 내비게이션은 언제나 먹통이다. 지도라도 찾아보면서 가야 한다. 사람 하나 없는 이 넓은 땅덩어리에서 길을 잃으면 찾아낼 방도가 없다. 내일이 되면 집에 와있을지도 모르지만 무슨 일이 생길지 장담할 수 없다. 이미 이 세상은 상식을 벗어났다.

 

보드카를 한 병, 샴페인을 한 병 챙기고 오렌지 몇 개를 집어다 봉지에 들고 서적코너에서 전국 지도를 찾는다. 좋아 가자. 즉석식품코너에서 치킨 한 마리를 포장한다. 회도 한 접시 챙긴다. 좋아 이제 진짜 가자.

 

문득 운전석에 앉는데 그 사람이 생각난다. 무너진 내 세상을 한 번 더 무너뜨린 그 사람. 언제나 날 질질 끌고 다니던 그 사람. 한동한 생각하지 않았는데 바다에 간다니 갑자기 생각이 밀려온다. 밀물처럼.

 

 

 

미연언니 집 마루에서 딸기를 씻어먹다가 엄마 아빠와 바다에 갔던 이야기를 했었다. 불도저 같은 미연언니는 당장 내일 속초에 가자고 외쳤다. 나는 할 일이 있어서 못 간다 했는데 다음날 차를 빌려 도시락까지 싸왔다. 아 진짜 이 언니를 내가 어째야 하나. 웃음이 터져 나왔다. 둘이 신나게 웃다가 아르바이트 하던 서점에 전화해서 도저히 못 갈 사정이 생겨 이틀만 쉬겠다고 하고 속초에 갔다. 속초는 엄마 아빠와 갔던 그 바다였을까. 그 바다는 물이 파랬다. 차가운 물이 발에 감겨 상쾌했다. 속초는 어떨까 궁금한 마음에 가슴이 한껏 부풀었다.

 

 

 

고속도로에 진입한다. 도로 중간 중간 멈춘 차들이 거슬린다. 아마도 새벽에 이 도로를 지나던 차들이리라. 동네에서 이렇게 벗어나 본 적이 처음이라 이런 분위기가 낯설다. 마치 좀비가 떼로 나오는 영화에 나오는 도로 같다. 멈춘 차를 피하느라 속도가 안 난다. 이렇게 가서 언제 속초까지 가려나. 미연언니라면 덤프트럭을 훔쳐다가 다 밀면서 갈 것 같다. 아마도 그 무모한 돌격력이 미연언니의 슈퍼파워 아닐까. 만약 그런 능력이 없었다면 나는 미연언니를 만나지도 알지도 못했겠지. 오늘따라 미연언니 생각이 많이 난다.

 

 

 

그 이름은 본명이 아니었다. 미연언니는 이름을 숨기고 집에서 멀리 나와 산다고 했다. 합법적으로 이름을 바꾸는 절차도 밟았다. 부모님과 호적을 분리했다. 물론 모든 절차에는 부모님이 동의했다. 복제한 도장이 동의하기는 했지만.

 

미연언니는 법대에 다녔다고 했다. 본인 말로는 어려서부터 신동소리를 들었다고 했지만 정말인지는 모르겠다. 잔머리 굴리는 실력은 월드스타 레벨이니까 어쩌면 맞을지도. 미연언니는 운동도 잘 했다. 남자들 사이에 서도 큰 편이었다. 그 덕분에 중학교부터 촉망 받는 배구선수였다고 했다. 뭘 해도 못하는 일이 없었다. 그래서 그만두기도 잘했다.

 

운동에는 별 흥미를 못 느껴 금방 그만뒀다. 공부로 눈을 돌리고 법학도의 길을 걸었다. 하지만 사법고시를 보기 싫어서 미용학원에 다녔다. 부모님에게 미용사가 되겠다고 했더니 부모님은 불같이 화를 냈다고 했다.

 

아명은 석철이었다. 돌처럼 쇠처럼 굳세게 살라고 어려서부터 석철이라고 불렀다고 했다. 딸에게 장군에게나 어울릴 듯한 아명을 지어준 부모님도 돌처럼 쇠처럼 굳센 분들이었다. 그렇게 두 분은 미연언니가 판사가 되리라 돌처럼 쇠처럼 믿었다. 그런데 그 딸이 고시를 보지 않겠다는 선언은 해버렸다. 절대 뛰어넘을 수 없는 골이 파였다.

 

미연언니는 파업했다. 짐을 챙겨 훌쩍 집을 떠나 몇 년간 해외를 떠돌았다.

 

 

 

딸이 미워도 굶어 죽게는 못하겠는지 카드까지 정지시키지는 않더라고.

 

그리고 카드 어디서 썼는지 보면 내가 어디 있는지 대충 알 수 있으니까.

 

하여튼 여기저기 많이 다녔어.

 

말이 안 통해서 고생을 하긴 했는데 사람 사는데 다 거기서 거기지.

 

주워 들은 말 대충 짜맞추고 손짓 발짓으로 살았지.

 

너도 한 번 그런 여행 해봐.

 

생각보다 쉬워.

 

 

 

미연언니는 주로 유럽을 돌아다녔다고 했다. 그리고 여행 내내 남자도 사귀고 여자도 사귀고 때로는 둘 다 사귀기도 했다. 고삐 풀린 방랑의 세월. 그렇게 바람처럼 흐르다 마침내 한국에 돌아왔다. 집에는 가지 않고 또 몇 년을 이 동네 저 동네 떠돌았다. 어디를 가도 금방 애인을 만들었다. 남자도 여자도 미연언니를 좋아했다. 묘하게 사람을 끄는 인상이라 어디를 가도 사람이 붙었다. 세상을 떠돌며 얻은 어딘가 달관한 태도도 사람을 끄는데 한 몫 했다.

 

언젠가부터 부모님 계좌에 연결된 카드는 쓰지 않았다. 몇 번째인지 기억도 못 할 사랑을 끝내고 미연언니는 어느 동네에 정착을 하기로 했다. 부모님과는 여전히 연락을 하지 않았다.

 

 

 

두 살 위에 오빠가 하나 있어.

 

원래 나랑 진짜 안 친했거든.

 

한국 들어왔는데 어떻게 알았는지 연락이 오더라.

 

어차피 부모님도 자기도 나 신경 쓰기 싫어하니까 알아서 살라고 하더라고.

 

가족이라는 그 따위 거 참 좋더라.

 

그래서 그냥 부모님 도장이나 하나씩 만들어서 보내달라고 했어.

 

그걸로 온갖 서류 다 만들어다가 이름도 바꾸고 호적도 바꿨지.

 

이제 그 집에서 나 찾으려면 흥신소 가야 될걸.

 

 

 

배가 고프다. 아직 반도 못 온 것 같은데 벌써 점심을 먹어야 한다. 내비게이션이 없으니 도대체가 어디가 어딘지 모르겠다. 옛날 사람들은 대단해. 이렇게나 불편한 세상을 어떻게 살았을까. 변변한 지도도 없이. 휴게소가 보인다. 차를 세우고 안으로 들어가니 운영 중이었는지 여기저기 음식이 식은 채 늘어져간다. 편의점에서 대충 뭐든 먹을까 하다가 제대로 된 음식이 먹고 싶었다. 재료도 다 손질되어있으니 아주 편하게 해먹을 수 있겠다. 부모님과 바다로 갈 때 먹었던 도시락이 생각난다.

 

 

 

그때는 평화로웠다. 전무 가족의 여름 휴가에는 회사가 끼어들었다. 회사에서 운영하는 콘도, 회사에서 빌려준 차, 회사에서 쥐어준 휴가비까지. 물론 그때는 아무것도 몰랐지만.

 

어딘지 모를 그 바닷가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바다로 뛰어 갔다. 콘도 바로 뒤는 해변이었고 햇빛에 뜨겁게 익은 모래가 스스로 태양이 된 것처럼 빛났다. 처음 본 바다는 무서워 들어가지도 못하고 파도에 발끝만 적시고 서있었다. 엄마는 옷 버린다고 성을 내면서도 웃고 있었다. 세 식구는 예상보다 빨리 도착했고 그 덕분에 점심을 먹을 시기를 놓쳤다. 엄마는 점심을 먹고 숙소로 들어가자고 했다. 그렇게 모래 위에 돗자리를 펴고 엄마가 싼 김밥을 먹었다. 아마도 내 어린 시절에 가장 맛있게 먹은 점심이지 않을까.

 

 

 

김밥이 먹고 싶다. 분식코너를 찾아보니 미리 말아 둔 김밥이 있다. 냄새를 맡아보니 상한 것 같지는 않다. 김밥을 적당히 썰고 국물을 찾는다. 엄마가 해 줬던 그 김밥만큼 맛있을까. 접시에 담아놓고 보니 조금 아쉽다. 상큼한 맛이 필요하다. 단무지로는 채울 수 없는.

 

옆 칸 일식코너에 들어가보니 썰어둔 양배추가 잔뜩 쌓여있다. 그래, 딱 이런 게 필요해. 한 상 차려 들고 나와 테이블에 앉는다. 고소한 냄새가 공간을 채워간다. 아 맥주 한 잔 걸치면 좋겠다. 아쉽게도 휴게소에는 맥주를 팔지 않는다. 가끔 무 알코올 맥주를 팔기도 하는데 그 따위 물건으로 내 속을 더럽힐 수는 없다. 샐러드를 소스에 잘 섞는다. 키위 맛 소스가 상큼하다. 손 끝에 녹색 소스가 묻는다. 손톱에 녹색 파도가 번진다.

 

 

 

미연언니는 네일아트샵을 운영했다. 인희와 나는 항상 같이 가서 손톱에 그림을 그렸다. 미연언니는 인희와 내가 찾아가면 환하게 웃었다. 둥근 얼굴에 눈도 코도 입도 컸다. 키도 크고 부러울 정도로 몸매가 좋았다. 마네킹 같았다.

 

손톱에 귀여운 토끼를 그리고 인희는 헤실 헤실 웃었다. 나도 손톱에 고양이를 그리고는 같이 헤실 헤실 웃었다. 팔짱을 끼고 나왔다.

 

언제까지나 웃을 수는 없었다. 인희와 헤어지고 폐품 처리된 고등어 같은 눈을 하고 살던 시절 근처 바에서 보드카를 홀짝 홀짝 마시고 있는데 누가 와서 알은척을 했다. 미연언니가 인희의 표정을 짓고 옆에 와서 앉았다.

 

 

 

어머 애인은 어디 가고 혼자 마셔요.

 

언니 나 진토닉 하나.

 

레몬은 두 조각 넣어주고.

 

 

 

자연스럽게 옆에 앉으면서 주문까지 척척했다. 애인 같은 거창한 사람 없다고 했다.

 

 

 

왜 가게 같이 오던 언니 있잖아. 헤어졌어?

 

 

 

애인 아니라니까 이 언니가 왜 이러시나.

 

 

 

괜찮아, 괜찮아, 다니다 보면 자기처럼 애인 아닌 척 하는 사람들 많아.

 

내 눈에는 다 보이는데.

 

그런 거 숨겨봐야 소용 없어요.

 

서로 좋아하면 다 티 난다니까.

 

눈만 보면 바로 아는데.

 

 

 

아 좀 닥쳐 줬으면 좋겠다. 인희 노력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취급하지 말아줬으면 좋겠다. 이 언니는 입만 다물면 더 예쁠 텐데. 내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갑자기 팔짱을 끼고 끌어 당겼다.

 

 

 

그럼 오늘 나랑 술이나 먹자.

 

나도 오늘 좀 우울한데.

 

자기 괜찮지?

 

 

 

위로 치켜 올라간 눈꼬리가 생글생글 웃으며 내 눈 속을 들여봤다. 내 눈 속에서 무얼 찾고 있을까. 아 모르겠다. 될 대로 되라지. 마시자. 그래 마시고 죽자. 이 술이 식기 전에 돌아오겠다며 수염을 휘날리며 달려간 미염공도 나처럼 비참하고 신났을까.

 

미연언니는 칵테일을 좋아했다. 달달한 칵테일 시큼한 칵테일 쓰디 쓴 칵테일. 도대체 무슨 이름인지 알지도 못할 칵테일을 줄줄이 꿰고 다녔다. 나한테도 몇 잔 권했지만 나는 그래도 보드카가 좋았다.

 

그때부터 미연언니는 내 손톱을 돈도 제대로 안받고 갈아줬다. 크리스마스에는 빨간 선물상자를 그려줬다. 설에는 하얀 눈을 그려줬다. 발렌타인 데이에는 손톱마다 글씨를 새겨줬다. 오른 손에는 H A T E, 왼 손에는 L O V E. 이건 또 무슨 허세인가 싶다가도 이왕 해준 손톱 고맙다고 했다.

 

미연언니는 내 왼손을 달라고 하더니 자기 왼쪽 가슴에 얹고는 나에게 키스를 했다. 그 대장군 같은 눈이 번뜩였다. 역시 부담스러웠다. 자기가 싫어지면 오른손을 주면 된다고 했다. 오른 주먹을 꽉 쥐고 왼뺨에 멋진 훅을 한 방 날려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났다. 차마 그렇게는 못하겠다. 마음 속 한편으로는 어쩌면 인희를 잊을 때가 오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현석처럼 인희도 머리 구석으로 밀려나지 않을까.

 

 

 

밥을 다 먹고 편의점에서 콜라를 하나 꺼내다 마신다. 톡톡 튀는 음료가 목을 타고 내려가면 왠지 몸 속을 청소하는 기분이다. 마트에서 챙겨온 과일도 꺼내 먹는다. 치킨은 다 식어서 영 먹고 싶지가 않다. 그래도 눈에 보이니까 다리를 하나 뜯어다 입에 문다.

 

나는 언제나 대식가다. 어려서도 그랬지만 다 커서는 정말 엄청나게 먹어댔다. 닭은 한 마리를 다 먹으라고 그 정도 크기로 자라는 것 아닌가. 미연언니 평에 따르면 나는 열효율이 나쁘다. 먹기는 웬만한 남정네만큼 먹으면서 마르기는 젓가락 같으니까. 인희는 오히려 내 밥그릇에 밥을 더 넘긴다. 자기는 웬만한 초등학생보다 못먹으니까. 현석은…… 별 관심 없다.

 

배가 부르니 늘어진다. 좌석을 뒤로 젖히고 눕는다. 깨진 창문으로 따뜻한 바람이 들어온다. 조용한 세상. 아무 소리도 없는 평화. 이렇게나 조용한 세상에 살 수 있으리라 생각해 본 적도 없다. 스르르 잠이 온다.

 

 

 

자다 흠칫 놀라 깬다. 무슨 꿈을 꾼 것 같은데 기억은 나지 않는다. 밖이 어두워지려 한다. 시간을 보니 벌써 다섯 시가 다 되어간다. 치킨은 식다 못해 딱딱하고 회는 어쩐지 먹으면 안될 것 같다. 창 밖으로 다 던져 버린다. 얼굴을 비벼 정신을 끌어 모으고 시동을 건다.

 

가자. 이왕 여기까지 왔는데 못 가면 억울해서 죽어도 눈을 못 감을 것 같다.

 

하지만 시간이 너무 늦는데. 별 수 없지. 되는대로 속도를 내고 액셀을 꽉꽉 밟는다. 휴게소를 지나고는 차가 전혀 없다. 새벽에는 다니는 사람이 거의 없나. 차가 없으니 모든 차선이 하이패스 차선. 좋구나. 속도계는 어느새 140Km를 넘어선다. 신난다. 평생 이렇게 달려본 적이 없다. 창문을 있는 대로 다 열어 놓고 음악을 튼다. 돌아가신 마왕님께서 은총을 내리신다. 이미 던져진 주사위 돌이킬 생각은 없다. 저 강을 건너가라.[1]

 

 

 

미연언니는 락이라면 질색을 했다.

 

 

 

너는 그런 걸 어떻게 듣니.

 

듣고 있으면 정신이 들어?

 

아휴 나는 머리가 다 아픈데.

 

 

 

그러면서 자기는 EDM만 들었다.

 

 

 

야 좋잖아.

 

막 춤추고 싶어지지 않냐.

 

너도 취미 좀 들여봐 너 전공이 일렉트로닉 뭐야 그, 엔지니어? 엔지니어링? 맞나?

 

하여튼 뭐 그거라면서 이것도 비슷한 거 아냐?

 

 

 

돌처럼 쇠처럼 굳건하게 사시는 언니도 락이든 메탈이든 취 … (계속 읽으시려면 로그인해야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