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일

— 본 작품은 무료이지만, 로그인해야 읽을 수 있습니다. —
미리보기

2일.

 

 

 

덥다. 오늘도 덥다. 아 더위는 안 사라지나. 어제 얼마나 마셨는지 기억이 없다. 오늘도 몸이 서늘하다. 기억이 끊긴 그 취한 정신으로 기어들어와 샤워까지 다 하고 잤나 보다. 땀에 끈적한 팔에서 희미하게 비누 냄새가 난다. 뭐 내 쓰레기 같은 뇌가 갖춘 그나마 괜찮은 기능이지.

 

머리가 안 아픈걸 봐서 많이 마시지는 않았던 모양인데 기억이 없다. 거 이상하네. 어제 먹은 고기가 무슨 숙취해소제로 절여둔 고기였나. 고픈 배가 또 울어대기에 냉장고를 연다. 계란 하나 치즈 한 장 식빵 두 조각을 꺼낸다. 가스레인지 불을 켜고 프라이팬을 얹는다. 이상하다. 식빵 두 조각이 냉장고에 들어있다. 손에 든 식빵까지 네 조각. 네 조각. 네 조각.

 

컴퓨터를 켠다. 전화기 화면에 오늘 날짜를 확인한다. 어제 날짜가 깜빡인다. 옷장을 연다. 입었던 옷이 깔끔하게 정리돼있다. 설마 그 술 취한 정신으로 빨래를 하고 건조까지 해다가 정리하지는 않았겠지. 감이 안 잡힌다. 무슨 상황인지 영문을 모르겠다. 현관에는 어제 버렸던 쓰레기가 그대로 있다. 문을 열고 뛰쳐나간다. 501호 앞 쓰레기도 그대로 있다. 아 저건 그대로 있는 게 맞지. 잠결에 밖에 나왔더니 서늘하다. 후다닥 집에 올라가 옷을 입는다. 대충 펑퍼짐한 티셔츠와 운동복에 몸을 쑤셔 넣고 다시 나간다. 어제와 다른 게 아무것도 없다.

 

황망한 정신으로 뛰어 내려와 집 앞 고깃집을 가본다. 분명 내가 어제 들쑤셔 둔 흔적이 있을 거야. 가게에는 가스냄새가 가득 차 숨이 막힌다. 여기저기 상이 차려있고 석쇠 위에는 새카맣게 탄 고기가 굴러다닌다. 어제 처음 들어갈 때 본 모습과 똑같다. 내가 먹은 흔적은 하나도 없다. 소주도 냉장고에 고기도 냉동고에 그대로.

 

상황이 정리가 안 된다. 분명 어제 돌아다닌 기억이 난다. 하지만 그 흔적이 없다. 세상이 멈추고 나만 움직이는가? 아니면 자고 일어나면 세상이 다시 정리되나? 이게 뭐야. 아니야 나만 움직이는 게 아닐 거야. 그래 내가 자는 동안 누가 와서 다 정리하는 것 아닐까. 이 동네가 거대한 실험장이고 실험대상은 나야. 그리고 연구원들 차트에 이렇게 적혀있지 않을까. 실험체 #22. 30대 초반 한국인. 실험장에서 깨어나자 마자 식욕부터 해결함. 저열한 지능의 소유자가 틀림없음. 상당량의 알코올 섭취. 정신과 상담이 필요함.

 

정신을 차리자. 일단 차를 구해서 어디까지 사람이 없는지 찾아보자. 그나저나 액셀이 왼쪽이든가 오른쪽이든가. 차는 또 어디서 구하나. 동네 구석구석마다 차가 꽉 차 있지만 열쇠가 없으니 말짱 꽝. 버튼으로 시동 거는 차도 있던데 이 동네에도 있으려나. 여기저기 기웃거린다. 아무래도 젊은 사람들이 몰려 사는 원룸 촌이라 그런지 신형차가 많다. 신형이 많으니까 하나 정도는 버튼으로 시동 거는 차일지도 몰라. 결국 한 대 찾아 차문을 열어보니 역시나 잠겨있다. 이걸 어쩌나 고민하다가 역시 방법은 하나뿐이라 집에 올라가 화분을 하나 들고 온다. 화분 안에 말라 죽은 국화는 이놈의 주인이 날 두 번 죽이는구나 하며 노려보지만 어쩔 수 없다. 국화야 미안해 좋은데 가라. 깨진 유리를 대충 털어내고 시동을 건다. 봄이라 다행이야 겨울에 오픈카를 탈 수는 없지.

 

이제 가볼까. 어디를 가볼까 고민하다가 아무 생각 없이 그냥 출발한다. 무작정 거리로 나간다. 도로에 차가 하나도 없어서 운전에는 부담이 없다. 하지만 이곳은 변두리니까 새벽에 차가 없었으리라.

 

역시 그냥 달리려니 무섭다. 내비게이션을 켠다. 나는 길을 못 찾는다. 표지판을 보고 달리라지만 그것 역시 어렵다. 아무래도 내 머릿속 해마는 길에 아무런 관심이 없는지 아무리 자주 보는 길이라도 못 찾는 일이 많다. 상냥한 언니 목소리가 들리며 내비게이션에 도로가 표시된다. 목적지를 찾고 입력을 누르면…… 경로를 탐색 중입니다. 로딩 로딩 로딩. 로딩이 도무지 끝나질 않는다. 하늘을 바라본다. 하늘에 계신 위성님이시여. 오늘도 거룩히 지구를 돌고 있나이까. 부디 길을 열어 주소서. 아니 휴가를 받은 사람은 난데 왜 세상이 통째로 쉬냐고! 억울하잖아!

 

목적지도 없이 차는 앞으로 간다. 어딘지도 모를 그곳에 가는 동안 아무도 없다. 가도 가도 아무도 없다. 텅 빈 길을 바라보며 괜히 눈물이 난다. 서럽고 슬프고 무섭다. 인희가 보고 싶다. 나는 도로 한복판에 차를 세우고 조용히 운다.

 

 

 

인희는 천사 같았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작은 천사. 무서운 초등학생을 다루니까 대가 셀 것 같지만 전혀 그렇지 않았다. 키도 작고 몸도 가냘프고 얼굴도 선이 가늘고 앳돼서 아이들이랑 나란히 걸어 다니면 그저 키만 조금 큰 6학년 같았다. 가끔은 아이들보다도 작았다. 짙은 갈색 곱슬머리를 어깨너머로 기르고 어린 사슴처럼 큰 눈으로 생글생글 귀엽게 웃었다. 학교에서 인기도 많았다. 사람이라는 짐승은 어려서부터 예쁜 애들만 좋아한다. 그래서 그랬는지 인희는 독보적인 아이돌이었다. 그렇게나 예뻤으니까. 아니 아름다웠으니까. 적당히 하얀 피부에 작디 작은 손에는 가늘고 긴 손가락이 붙어 있었다. 무슨 반지를 끼워줘도 무슨 네일아트를 해줘도 잘 어울렸다. 장갑을 끼워주면 루이 14세 옆에서 부채를 들고 웃던 유럽 어느 백작가 영애 같았다. 그런 백작가 영애가 진짜 있는지는 모르지만.

 

 

 

눈물을 닦고 … (계속 읽으시려면 로그인해야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