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일. ,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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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일.

 

 

 

인희는 옥상에 올랐다. 아무 관심도 없는 회색 세상이 점점 온 세상을 덮어갔다. 그렇게 세상은 우중충하게 색을 잃었다. 마침내 인희도 회색으로 물들고 말았다. 울적한 마음에 그저 하늘만 보며 한없이 한숨만 쉬었다. 새까맣게 날카로운 밤 하늘에는 점점이 별이 차 올랐다. 달도 없이 어두운 하늘. 그 하늘에 점점이 박힌 별을 바라보며 인희는 생각했다. 내일 아침 출근 길을. 내일 아침에 만날 아이들을. 교무실에서 치근덕거릴 박선생을. 퇴근길 들릴 마트를. 마트에서 아무렇지 않은 척 그 사람을 찾을 시간을. 그리고 집에 와 혼자 먹을 저녁을. 마음이 복잡할 때면 하늘을 올려다본다. 하늘을 보면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았지만 오늘은…… 오늘은 아니다. 화살 맞은 말처럼 날뛰는 마음을 부여잡고 옥상 어두운 난간에 기대 하염없이 별을 바라봤다. 저 멀리 같은 하늘아래 언제나 그 곳에 그대로 있을 그 사람을 생각하며.

 

여기 내가 있다. 거기 네가 있다. 이곳에 우리가 있다.

 

날카로운 하늘에 유성이 흘렀다. 인희는 눈을 감았다.

 

 

 

1일.

 

 

 

덥다. 아침부터 날이 찐다. 좁아 터진 옥탑에 살면서 시원한 아침을 기대한다면 욕심일까. 알지만 짜증이 솟는 것이 본성. 창문을 연다. 아직은 여름이라고 하기에는 애매한 바람이 망설이며 고개를 들이민다. 소심하긴. 문을 활짝 연다. 그래 이왕 열었으니 환기나 하자. 문을 열고 부끄러운 마음에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는다.

 

에어컨을 발명한 사람이 누군지는 모르지만 노벨상을 줘야 한다. 더운 세상을 식혀서 짜증을 줄여주니 세계 분쟁의 반은 예방하는 정말정말정말정말 훌륭한 기계를 발명했다. 그렇지만 안타깝게도 꾸준히 틀어놓으면 라면만 먹고 살아야 하는 아주 사소한 문제가 생긴다.

 

멍한 머리가 말을 거는지 고픈 배가 말을 거는지 어디서 이상한 소리가 난다. 아무래도 머리보다는 언제나 배가 할 말이 많다. 뭐든 쳐 넣으면 닥치겠지. 냉장고를 열고 계란 하나, 치즈 한 장, 식빵 두 조각을 꺼낸다. 가스레인지에 불을 얹고 프라이팬에 계란을 두른다. 계란에 치즈에 빵을 순식간에 해치운다. 우유가 없네. 식빵도 두 조각 남았다. 내일 살아남으려면 장을 봐야 할 숙명. 대충 수돗물을 목에 넘기고 부스스한 얼굴을 씻는다.

 

머리가 많이 길었구나. 머리를 말리면서 컴퓨터를 켠다. 전화기에 알림이 하나도 없는 것을 보니 역시 세상은 나 없이도 잘 돌아간다. 메일을 들여다보자. 메일 함은 깔끔하게 비어있다. 세상을 날 모르는지 스팸메일 하나 없다. 책임어르신도 선임느님도 동기 개놈도 소식이 없다. 연락이 없는 것이 당연할 지도 모른다. 왜냐면 오늘부터 월차에 연차까지 다 붙여서 여행을 가겠다고 강짜를 부렸으니까. 자그마치 한 달이나 칭얼거렸다. 이렇게나 편한 아침을 맞이하고 싶어서. 그리고 기대하고 기대하던 여행을 떠난다. 내 옥탑 방으로.

 

내 단 하나 남은 전리품. 박사과정을 그만둔다고 했을 때 어머니는 당장 다시 등록하라 하셨고 아버지는 네 멋대로 하라고 하셨고 친구들은 다들 부러워하면서 한심해했다. 그거 참 지금 생각해도 신기하다. 어떻게 부러워하면서 한심해하지. 부모님께서는 평생을 투자해 자식 하나 잘 키워서 박사까지 만들면 인재 없던 집안이 길이 길이 잘 되리라 생각하셨나. 아니면 못다한 아빠 꿈을 대신 이뤄주리라 믿으셨나. 그렇게 시작된 전투는 중간중간 소강 상태에 빠지기도 했지만 결국 내가 취직을 하면서 휴전국면에 들어섰다. 휴전협정에는 내 취직조항이 필요했다. 나는 끔찍하게 싫어하던 연구원이 되었다. 결국 길고 긴 전투를 끝내고 내가 얻은 것은 절연한 가족과 이 작은 세계뿐이었다.

 

우울한 아침은 싫다. 사라져 버린 찌꺼기로 만든 손가락[1]. 음악을 틀고 옷을 고른다. 벌써 한 달이나 우울했다. 이제 더는 축 처진 하루는 사양하고 싶다. 오늘처럼 맑고 밝은 봄날 산책이라도 가자. 벌써 몇 년째 별다른 운동도 안하고 하루 종일 사무실에만 가끔은 집에만 틀어박혀 있던 내 피부는 유난히 창백하다. 우울할 만큼 창백한 살. 그렇게 우울한 삶을 잇고 잇고 또 잇고. 그런 일상은 이제 지겹다. 오늘은 그렇게 살고 싶지 않다. 그러니 알을 깨고 나가자.

 

그 동안 쌓인 쓰레기며 분리수거 할 것들을 챙겨 들고 뒤를 돌아 본다. 더 버릴 물건은 없다. 계단을 내려간다. 밤마다 쌈박질을 하는지 사랑놀이를 하는지 언제나 시끄러운 501호 부부는 출근도 안 했는지 뭐하길래 복도에 꽉 찬 쓰레기 봉투가 그냥 있다. 냄새…… 바리바리 이고 지고 내려온 내 생활의 흔적을 버린다. 이 시간이면 202호 아줌마가 아침산책에서 돌아올 시간이다. 마주치면 또 말도 안 되는 잔소리를 늘어놓겠지. 아니 내가 결혼을 하든 말든 무슨 상관이신지. 그런 소리 하시려면 어디 기가 막힌 사람 하나 소개해 주시든지. 마주치기 전에 빨리 사라져야 한다.

 

큰길에 나와 마트로 걷는다. 바람이 선선하다. 앞으로 일주일은 이렇게 살 수 있다. 연구소 사람들이랑 마주칠지도 모르니 시내에는 나가지 말아야지. 일주일 먹고 살 양식을 지르자. 왠지 안 읽을 것 같지만 책도 몇 권 살까. 바쁘다고 내버려둔 국화가 죽어버렸으니 잘 안 죽는 화분도 하나 사야겠다. 장을 보고 트럭도 한 대 사야 하나. 사고 싶은 물건이 너무 많다. 봄이니까 커튼도 갈고 싶다. 화장실도 깔끔하게 청소 해야지.

 

길을 걷다 문득 이상한 기분에 소름이 돋는다. 묘한 감각이 소름을 타고 온몸을 뒤덮는다. 이런 감각을 느낀 적이 있던가. 주변이 지나치게 조용하다. 비록 서울도 아니고 변두리 외곽이지만 나름 4차선 국도가 지나 이래저래 시끄러운 동네인데 오늘은 너무 조용하다. 도로에는 지나가는 차도 한 대 없이 텅텅 비어 허전하다. 오전 10시 22분. 마트까지는 대강 10분. 벌써 반이나 걸었지만 아무도 마주치지 않는다. 이상한데. 집에서 출발하고 지금까지 지나가는 차도 사람도 하나 없다. 완전히 빈 거리. 오로지 햇살만 거리에 떨어진다. 소리를 지르면 텅 빈 거리에 메아리가 울릴 것 같다.

 

전화를 들고 뉴스를 찾는다. 국회는 여전히 파행이고, 아빠가 애를 패서 죽이고, 축구 대표팀은 어이없이 패배하고, 오 뭐야 얘랑 얘랑 사귀네. 흠…… 평범한 대한민국 맞는데. 다들 어디 갔을까. 기사 날짜가 다 어제 기사다. 오직 별 관심도 없는 축구팀 이야기만 오늘 날짜다. 새벽 1시 17분. 그 이후로 기사가 하나도 없다. 뭐야 나 휴가라고 다들 노냐? 업데이트 안 해?

 

아니 어쩌면 도로에 우연히 아무도 없을지도 모른다. 마트에는 누구라도 있지 않을까. 그렇게 도착한 마트도 텅 빈 채 아무도 날 반기지 않는다. 직원도 없다. 손님도 없다. 불도 켜있고 상품도 다 있는데 사람만 없는 텅 빈 마트. 문득 예전에 읽었던 소설이 생각난다. 서울 한복판에 갑자기 새까만 구체가 나타나 사람들을 다 집어삼키는 소설.[2] 그런 일이 진짜 벌어지지야 않겠지만.

 

사람 하나 없는 마트는 생각보다 무섭다. 식품코너도 의류코너도 다 비어 싸늘하다. 뜬금없이 소리를 질러본다. 계세요— 마트 안에서 메아리가 친다. 생각보다 더 소름이 끼친다. 혹시나 누군가 대답을 한다면 더 무서울까.

 

전자제품코너 TV에서 화려하게 차려 입은 걸그룹 애기들이 춤을 춘다. 오늘 처음 만난 사람. 사람 같은 것들 별 관심 없는데 막상 아무도 없으니까 서운하고 쓸쓸하다. 이제 어쩌지. 우유를 사가려도 계산해 줄 사람이 없잖아. 사람이 없어서 그냥 들고 나갔다고 하면 도둑질이라고 할지도 몰라. 천장 CCTV에서 불이 반짝인다. 사람은 없어도 누군가는 나를 치켜본다. 어쩌지 어쩌지 어쩌지.

 

일단 먹지 뭐. 나는 멍청이니까 좀 먹어도 돼. … (계속 읽으시려면 로그인해야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