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선이현AI – 자율 주행 알고리즘 최적화를 위한 비공식 합의팀

  • 장르: SF | 태그: #자율주행 #알고리즘 #자해공갈 #인공지능 #딜레마
  • 평점×91 | 분량: 145매 | 성향:
  • 소개: “저희 암페어 사는 언제나 사람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고려합니다.” 회사의 수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비공식적으로 자율 주행차의 사고 합의를 하는 게 업무인 암페어... 더보기

미선이현AI – 자율 주행 알고리즘 최적화를 위한 비공식 합의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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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반복되는 광고 영상처럼 스쳐 지나가는 창밖의 풍경들을 무심하게 돌아보며 태호는 훈제 연어와 양상추 위에 크림소스를 잔뜩 얹은 샌드위치를 크게 한입 베어 물었다. 다른 한쪽 손으로는 대시보드에 설치된 스크린을 밀어 올리며 배달된 뉴스들을 훑어보았다. 하나같이 쓸모없는 정보 조각들이었다. 그래도 체크해 둘 필요는 있었다. 뉴스들을 억지로 구겨 넣는 태호의 머릿속으로 내일 배달될 아침 샌드위치 메뉴가 떠다녔다. 햄에그였나. 아니면 치킨 샐러드.

 

– 긴급 제동입니다. 주의하세요. 긴급 제동입니다.

 

날카로운 경고음과 함께 전면 유리가 붉은색으로 번쩍였다. 차의 속도가 급격하게 줄어들며 안전벨트에 걸린 태호의 몸이 앞으로 쏠렸다. 가슴과 배가 강하게 조여지며 씹어 넘기던 샌드위치가 거꾸로 올라왔다. 손에서 빠져나간 샌드위치 조각이 대시보드로 날아가 달라붙었다. 걸쭉한 크림소스가 피처럼 흘러 내렸다.

 

편도 이차선의 좁은 도로 양쪽으로 임시 주차된 차들이 늘어서 있었다. 허둥대며 주변을 돌아보던 태호의 눈에 그 차들 사이에서 튀어나와 태호의 차 오른쪽을 향해 날아드는 한 사람의 모습이 들어왔다. 차의 속도가 급격히 줄어들고 있었지만 사람과의 거리는 더 빨리 줄어들었다. 이대로라면 충돌을 피하기 힘들어 보였다. 속도를 줄이던 차의 핸들이 살짝 왼쪽으로 돌았다.

 

중앙선 너머 반대편 차선으로는 다른 차 하나가 다가오고 있었다. 날렵하게 휘어지는 유선형의 곡선이 번쩍거리는 새빨간 스포츠카였다. 손톱에라도 살짝 긁히면 태호가 타고 있는 차를 통째로 팔아도 못 갚을 수리비가 나올 지도 몰랐다.

 

스포츠카는 전혀 속도를 줄일 기색이 없었다. 네트워크에 연동된 자율 주행 모드라면 두 차량 모두의 속도를 조절하여 사고를 피할 수도 있었겠지만 저런 스포츠카를 모는 사람이 자율 주행 모드를 쓸 리 없었다. 스포츠카는 중앙선을 넘는 태호의 차를 향해 곧장 달려왔다.

 

사람이 크게 다칠 속도는 아니었지만 사고로 인한 피해 금액은 생각만 해도 아찔했다. 급박한 상황에서도 태호는 자신의 차가 자율 주행 모드였다는 걸 다시 한 번 상기하고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피해 금액이 얼마든 태호가 부담해야 할 책임은 없었다. 오히려 태호 역시 자동차 회사에서 보상을 받아야 하는 입장이었다.

 

왼쪽으로 돌아가던 태호의 핸들은 하지만 회전을 멈추고 잠깐 움찔하더니 다시 오른쪽으로 돌았다. 태호의 차는 제한 속도를 꽉 채운 채 그대로 달려오는 스포츠카의 측면과 종이 한 장 차이로 아슬아슬하게 비껴 지나갔다. 짙게 선팅한 유리 너머에서 태호를 바라보는 운전사의 모습의 희미하게 보였다. 입꼬리를 치켜 올리며 웃고 있었던 것 같기도 했다.

 

쿵.

 

분명 스포츠카를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갔는데도 무언가에 부딪히는 둔탁한 충격음이 들렸다. 차가 가까스로 멈춰서고 비상등이 깜박였다. 시선을 오른쪽으로 돌린 태호의 눈에 길 위에서 나뒹굴고 있는 사람 하나가 들어왔다. 스포츠카는 유유히 사고 현장을 떠나 어디론가 사라졌다.

 

 

“도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아무리 갑자기 사람이 튀어 나왔다지만 이 정도를 못 피하다뇨? 자율 주행 이거 믿고 탈 수 있는 겁니까?”

 

티가 날 정도로 유난하게 항의하는 박태호를 달래며 안기현은 블랙박스와 주행 로그를 확인했다. 태호의 말 대로 보행자를 피하지 못한 건 정상은 아니었다. 보행자를 피할 것처럼 왼쪽으로 틀었던 조향 장치는 튕겨 나오듯 오른쪽으로 다시 회전했고 다시 좌우로 진동하며 흔들렸다. 내장 컴퓨터는 과도한 제어 반응으로 인한 오버슛 현상이라는 분석 결과를 내놓았다. 그 결과 가까스로 마주오던 차는 피했지만 보행자는 피하지 못했다.

 

이유가 무엇이든 자동 주행차가 사람을 들이 받은 건 후발업체들의 추격으로 업계 1위를 간신히 지키고 있는 암페어 사 입장에서 좋은 소식은 아니었다. 암페어 사의 자체 분석 프로그램은 보행자의 과실이 70% 이상 나올 거라고 회신해 왔고 나머지 30%도 보험으로 처리할 수 있을 테지만, 그렇게 원칙대로 처리할 일이었으면 굳이 기현이 현장으로 파견될 이유가 없었다.

 

“보험 처리 없이 비공식적으로 보상을 해 주시겠다고요? 저야 보상액만 충분하면 상관없습니다만…”

 

기현이 제시한 액수는 보험으로 처리했을 경우보다 30% 정도 높았다. 사고 현장에서 기다리며 이미 자신이 받을 수 있는 배상액을 따져 보았던 박태호는 예상보다 높은 추가 배상액을 제시하자 반색하면서도 미심쩍은 눈빛을 지우지 못했다. 기현은 최대한 사무적이면서도 정중한 말투로 상황을 설명했다.

 

“대물 피해만 발생한 사고인 경우에는 저희도 공식적인 규정대로 처리하는 게 간단합니다. 어차피 저희 회사도 사고 보험에 가입되어 있기 때문에 특별히 손해 볼 일도 없거든요. 다만 이번 건처럼 대인 피해가 발생한 경우에는 비공식적인 합의를 제안하는 경우가 가끔 있습니다. 아무래도 대인 피해의 경우에는 금액으로 산정할 수 없는 부가적인 손실이 발생할 수 있으니까요.”

 

태호는 여전히 잘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기현을 바라보았다. 기현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한숨을 쉬며 태호에게 살짝 몸을 굽혀 조용히 속삭였다. 근처에 둘의 말을 엿들을 사람은 없었다. 여기까지의 동작은 모두 대응 매뉴얼에 나와 있는 표준 절차, 합의 확률을 높일 수 있도록 인공지능이 계산하여 최적화한 행동 패턴이었다.

 

“솔직히 말씀드리죠. 저희 암페어 사의 대외적인 이미지를 생각하는 겁니다. 아실지 모르겠지만 공식적인 사고 발생률은 보험 처리 건수를 기준으로 계산됩니다. 대인 사고 발생률이 높은 자동 주행차는 아무리 성능이 뛰어나도 사람들이 꺼려하지 않겠습니까. 당장은 배상 금액에서 손해를 보겠지만 앞으로의 매출을 고려한다면 역시 저희로서는 이쪽이 이익입니다. 물론 선생님께도 이익이겠지요.”

 

태호는 그제야 무슨 뜻인지 알겠다는 듯이 눈을 번쩍였다. 이제 박태호의 얼굴에는 혹시라도 자신에게 책임이 돌아올지 모른다는 우려가 완전히 사라지고 이 협상을 주도하고 있다는 자신감이 들어찼다. 기현으로서는 반가운 일은 아니었다. 태호는 자못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하지만 굳이 비공식적으로 합의를 한다는 게 왠지 찜찜하네요. 게다가 사람이 다친 일이라. 너무 정신이 없었어서 확신하기는 힘들지만 잘하면 그 사람을 피할 수 있었다는 생각도 들고요. 이런 일을 비공개로 하는 대가로 돈 몇 푼을 더 받는다라… 저로서는 영 내키지 않네요.”

 

태호의 대답을 들은 기현이 속으로 안도했다. 말과는 달리 합의가 쉬운 타입이었다. 태호의 마음은 이미 비공식 합의로 기울었고 다만 보상금을 줄다리기 해보겠다는 심산이라는 걸 기현은 쉽게 눈치 챌 수 있었다. 그게 기현이 하는 일이었다.

 

“알겠습니다. 선생님의 마음은 백 번 이해합니다. 괜히 배상액 이야기를 꺼내서 선생님을 불쾌하게 해 드린 점 사과드립니다. 제 일이긴 합니다만, 저도 선생님처럼 점잖으신 분을 상대로 돈을 놓고 줄다리기하는 게 영 죄송스럽네요. 그냥 제 권한으로 제시할 수 있는 최대치를 말씀드리죠. 최대 50%의 추가 보상금을 드릴 수 있습니다. 이번 사고로 실망하셨겠지만 심기일전하여 앞으로 더 좋은 서비스로 모실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저희 암페어 사를 믿어 주신다면 마지막으로 한 번만 검토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기현은 마지막이라는 단어에 은근슬쩍 힘을 주었다. 조금 망설이던 태호는 더 이상 협상할 생각이 없어 보이는 기현의 표정을 보며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뭐. 좋습니다. 그렇게 합의하죠. 앞으로는 이런 일이 없도록 더 좋은 자율 주행차를 만들어 주셨으면 합니다.”

 

“물론입니다. 선생님의 믿음에 보답드릴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저희 암페어 사는 언제나 사람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고려합니다.”

 

 

기현은 어렵지 않게 1.5배의 보상액으로 합의를 이끌어 냈다. 사실 기현이 제시할 수 있었던 최대치는 보상액의 2배였다. 보행자였던 전수철과의 합의까지 완료하고 사건을 마무리하면 그 차액 중 20%를 인센티브로 받을 수 있었다. 피해액을 물어내야 하는 입장인 전수철과의 합의는 거저먹기나 다름없었다. 기현은 이번 인센티브로는 뭘 살까 고민하며 수철이 옮겨진 병원으로 향했다.

 

자율 주행차가 일으키는 사고마다 뉴스가 되던 시절은 지나갔지만 여전히 사람들의 시선은 곱지 않았다. 현재 사람이 직접 운전하는 자동차의 사고 발생률은 연간 100대당 1건, 사망자는 10000대당 1명꼴이었다. 그에 비해 자율 주행차의 사고 발생률은 연간 3000대당 1건에 불과했고 사망자는 아직까지 없었다. 현저히 낮은 사고 발생률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여전히 자율 주행차가 위험하다고 생각했다.

 

자율 주행차가 일으킨 사고의 책임을 운전자와 자동차 제작사, 자율 주행 알고리즘 개발자 중 누가 져야 하는지에 대한 논쟁은 모든 책임을 자동차 제작사가 지는 것으로 깔끔하게 끝났다. 자동차 제작사는 피해 보상을 위해 보험에 가입했고 보험금 납입액은 분산되어 차량 가격에 포함되었다. 그러니 사실 그 책임은 차량을 구매한 운전자가 지는 거나 마찬가지였지만 거기까지 따져보는 사람들은 없었다.

 

자율 주행차 업계 1위를 고수하고 있는 암페어 사 역시 초기에는 발생한 모든 사고를 보험으로 처리했다. 하지만 자율 주행차의 시장 점유율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사고 발생률 그 중에서도 대인 사고 발생률을 낮추는 방법에 정교한 알고리즘 개발만 있는 게 아니라는 걸 깨닫기 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회사의 수익을 최대화할 수 있는 비공식 합의 처리 기준 역시 시뮬레이션에 의해 개발되고 그 절차가 알고리즘화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직접적인 협상 수행마저 인공지능에 맡길 수는 없었다. 상대방의 심리를 파악하며 밀고 당기는 협상을 벌이는 데는 아직까지는 사람이 유리했다. 기계라면 일단 심리적으로 아래에 놓고 보는 사람들의 태도 또한 인공지능의 불리한 점이었다. 한때 잘 나가던 보험 판매원이었다가 정리해고 당하고 실업자 상태였던 기현을 암페어 사가 채용한 이유는 그래서였다.

 

보행자였던 전수철의 동선은 태호의 차에 장착되어 있던 블랙박스에 명확히 기록되어 있었고 그걸 판단으로 계산한 책임 비율이 번복될 가능성은 사실상 없었다. 소송을 해봐야 수많은 사례를 통해 정확성이 증명된 인공지능의 계산 결과를 굳이 부정할 판사는 없었다.

 

전수철의 책임 비율은 70%였고 그 정도면 자신의 치료비는 물론 박태호에게 지급할 위로금마저 물어줘야 할 상황이었다. 그런 수철과 협상하는 건 손바닥을 뒤집는 것 보다 쉬웠다. 관건은 배상액을 얼마나 줄여주는가였다. 표준 절차에서 제시하는 한계치는 관대하게도 배상액 전액 면제였다. 협상을 통해 전수철에게 배상액 중 일부를 부담하게 한다면 그 중 20% 역시 고스란히 기현의 인센티브로 들어올 수 있었다.

 

그런 낙관적인 생각은 전수철의 표정을 처음 본 순간부터 어딘가 어긋나기 시작했다. 수철의 얼굴에는 불안함과 두려움이 서려 있기는 했지만 당연히 함께 있어야 할 망설임이 보이지 않았다. 그 위화감은 협상이 진행될수록 더욱 진해지기만 했다.

 

“제 말을 잘 이해하지 못하신 것 같은데 선생님은 지금 책임 비율이 70%라서 피해를 배상하셔야 하는 입장이시구요. 돈을 받으시는 게 아니라 내셔야 하는 거예요. 저는 그 배상액을 절반으로 줄여 드릴 수 있다고 말씀드린 겁니다. 이런 사고를 유발했다는 공식적인 기록이 남지 않는 건 그냥 덤이구요.”

 

“싫다고 했습니다. 그냥 공식적으로 보험 처리해 주세요.”

 

수철은 기현의 설명을 전혀 듣지 않고 있는 듯했다. 기현이 말이 끝나자마자 기계적으로 거절 의사를 밝혔다. 마치 거절하기로 미리 짜인 알고리즘 같았다.

 

“음… 그렇습니까. 아마 비공식적 처리라는 데 거부감이 드신 모양이군요. 이건 전혀 불법적인 게 아닙니다. 사고 당사자들 끼리 피해 배상을 합의하는 건 법으로 정해진 권리예요. 그 합의가 불발되었을 때 아까 말씀 드렸던 책임 비율이 적용되는 겁니다. 그 비율을 무조건 따라야 할 이유는 없어요.”

 

“싫습니다.”

 

“선생님처럼 원칙을 중시하시는 분들이 가끔 계십니다. 요즘 같은 세상에 개인적으로 정말 존경스럽습니다. 진심이에요. 이렇게 협상하면 문책 사유가 됩니다만 그냥 솔직히 말씀 드리죠. 배상액의 70%를 면제해 드리겠습니다. 제가 해 드릴 수 있는 최대치예요. 이런 협상을 길게 끌고 싶지 않으신 마음을 이해하기 때문에 드리는 제안입니다.”

 

“싫다니까요.”

 

“그냥 협상 결렬로 처리하는 게 제 입장에서는 솔직히 편합니다. 하지만 배상하셔야 하는 금액이 만만치 않아요. 게다가 피해자 입장인 운전자가 소송이라도 제기하게 되면 문제가 아주 복잡해집니다. 물론 그렇게 해도 지금 계산된 배상액에서 크게 벗어나는 결과가 나오지는 않겠지만 괜히 법정에 출석하고 증언하고 하실 필요는 없지 않겠습니까.”

 

“몇 번을 말씀 드립니까. 그냥 공식적으로 처리해 달라고.”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다. 혹시 사고로 뇌에 충격을 받은 건 아닐까 싶어 검사 결과를 확인해 보았지만 정강이 골절과 요추부 염좌, 몸 여기저기의 찰과상이 전부였다. 머리에는 전혀 이상이 없었다. 비공식적인 합의를 권하는 기현의 의도를 의심하는 사람은 종종 있었지만 그런 사람일수록 합의를 밀고 당기며 조금이라도 배상액을 더 줄이려 하지 이토록 단호하게 거절하는 일은 없었다.

 

“휴… 이러면 안 되지만 제가 왜 이 협상을 하고 있는지 솔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사고 발생률 때문이에요. 선생님의 배상액을 대신 부담하는 게 단기적으로는 회사에 손해가 되지만 그렇게 해서라도 보험 회사에서 발표하는 사고 건수를 줄이는 게 장기적으로는 매출에 도움이 되니까요. 다시 말해 다 회사가 돈을 벌자고 하는 일이란 뜻입니다. 서로가 윈윈이에요. 굳이 손해보는 쪽을 따지자면 경쟁사가 되겠지만 우리가 그 사정까지 봐 줄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하지만 그 손익분기점이 아까 말씀드린 배상액 70% 면제예요. 그러니 회사 입장에서는 면제액을 그 이상으로 늘려 드릴 이유가 없는 겁니다.”

 

“면제액을 늘려 달라고 말씀 드린 적 없는데요. 전 공식적으로 처리해 달라고 했습니다.”

 

“대체 왜…”

 

답답한 마음에 분통이 터져 나오려는 걸 기현은 겨우 억눌렀다. 여기서 협상을 결렬시키면 박태호에게 확보한 인센티브도 날아가게 된다.

 

“80%를 면제해 드리죠. 제가 받을 인센티브까지 다 포기하고 권해 드리는 겁니다.”

 

“싫습니다.”

 

“90%. 제가 그냥 제 돈으로 메꾸겠습니다. 지금까지 설명 드린 제 노력이 아까워서 그러는 거예요.”

 

“싫어요.”

 

“정말 이런 분은 처음이군요. 좋습니다. 좋아요. 전액 면제해 드리죠. 이거 제가 경위서 쓸 각오하고 해드리는 겁니다. 여기에 싸인하시면 그냥 그 사고에 대해 다 잊으시고 돈 걱정 없이 치료 잘 받으시고 나가시면 되는 거예요. 골치 아프게 신경 쓰실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싫다니까요.”

 

“하…”

 

인센티브가 날아갔다. 협상을 하겠다고 쏟아 부은 기현의 시간과 기력도 낭비되었다. 무엇보다 기현의 실적에 협상 실패 하나가 추가되었다. 미친개한테 물린 셈 쳐야지. 포기하고 병실을 나가던 기현의 발길을 수철을 처음 봤을 때부터 느꼈었던 위화감이 붙잡았다. 기현은 수철을 돌아보며 물었다.

 

“도대체 어떤 조건을 드려야 합의하시겠습니까? 말씀이나 해 보시죠.”

 

입으로는 단호하게 거절하던 것과는 달리 잔뜩 긴장해 있던 수철의 얼굴이 그제야 밝아졌다. 수철은 속으로 몇 번이나 되뇌고 있었던 듯 거침없이 말했다.

 

“천만 원을 주시죠. 배상액 전액 면제에 더해서.”

 

“미쳤군.”

 

병원이 아니었다면 바닥에 침이라도 뱉고 싶었다. 기현은 진저리를 치며 병실을 빠져 나왔다.

 

 

“네? 그 조건을 받아들이라고요?”

 

기현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강동오 팀장은 자기도 모르겠다는 듯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러라잖아. 무조건 비공식으로 처리하라는 데 어떻게 해.”

 

“무슨… 그러면 손해잖아요. 혹시 제가 알고 있는 협상 리미트가 진짜 손익분기점이 아닌 겁니까? 중간에서 강 팀장님이나 다른 사람들이 더 떼고 있는 거예요? 요즘 애 학원비 대느라 힘드시다더니.”

 

“이 자식이 말 함부로 하네. 야. 나나 너나 건수 올려서 인센티브 받는 건 똑같아. 팀장 수당 몇 푼 더 나오는 게 전부인 거 몰라?”

 

“그런데 왜 그 조건으로 협상을 하라고 나와요? 인공지능 오류난 거 아니에요?”

 

“모른다니까? 나야 그냥 결과만 전달하는 거야. 그리고 오류난 거면 뭐 어때? 어쨌든 오더 떨어졌으니 그대로 하면 책임질 일은 없는 거잖아. 뭐 추가 인센티브야 받기 힘들겠지만 적어도 실적에 빨간 줄은 안 가니까 손해 볼 거 없지. 가서 해달라는 대로 해 주고 싸인 받아 와.”

 

“아니 그렇잖아요. 이건 뭐 자해공갈단도 아니고. 요즘 세상에 일부러 사고내서 돈을 받아 챙긴다는 게 말이 돼요? 더구나 자율 주행차하고? 나 원. 지나가는 차에 뛰어들어서 천만 원 벌 수 있는 거 알았으면 나도 이 짓 때려치우고 진작 그 길로 들어설 걸 그랬네.”

 

“그러든가. 그러든가! 아 몰라. 난 결과 전해 줬으니까. 가서 싸인을 받든 차에 뛰어 들든 맘대로 해!”

 

강 팀장이 책상을 탕탕 치며 눈빛으로 기현을 내몰았다. 기현은 어딘가 끈적한 느낌을 떨쳐내지 못한 채 마지못해 밖으로 나왔다.

 

 

천만 원. 요즘 세상에 큰돈은 아니었다. 하지만 한 번의 사고로 벌 수 있는 돈이라면 작지도 않았다. 이번 협상이 예전처럼 잘 진행되었다면 기현이 벌 수 있는 돈은 얼마나 되었을까. 건별 수당에 인센티브를 더해 봐야 오십만 원 남짓 되려나. 그렇게 한 달에 대여섯 건을 처리해야 겨우 입에 풀칠할 정도의 월급이 나왔다. 천만 원. 그 기준으로 따진다면 큰돈이었다.

 

그 액수보다 더욱 의심스러운 건 전수철의 태도였다. 돌이켜 보면 수철은 처음부터 이상했다. 기현이 비공식적인 합의 이야기를 꺼내기 이전부터 끝까지 버텨서 거꾸로 돈을 받아내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말도 안 되는 일이었지만 지금 그게 현실이 되었다.

 

기현은 또한 수철의 눈빛도 놓치지 않았다. 그런 엄청난 계획을 성공시킨 사람치고 수철의 눈에는 자신감이 없었다. 내뱉는 대답은 거침없었지만 그건 확신에서 나왔다기 보다는 기계적으로 연습한 결과로 보였다. 그렇다면 생각할 수 있는 건 하나였다. 배후에 누가 있다.

 

기현에게 떨어지는 사고 처리 콜을 모조리 무시하면서 수철을 미행한 이유는 그래서였다. 분명히 무언가 있다. 절반은 납득되지 않는 사건에 숨겨진 비밀을 알아내고자 하는 호기심 때문이었고 절반은 미친놈이라고 무시했던 수철에게 보기 좋게 한 방 먹은 상처 입은 자존심 때문이었다. 기현은 거보라는 듯이 합의서에 서명하며 내리깔던 수철의 눈동자가 잊히지 않았다. 자해공갈단을 뿌리 뽑아야 한다는 정의감도 약간은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수철을 문병 오는 사람은 없었다. 기현 혼자서 천만 원이 입금된 수철의 계좌를 추적할 방법도 없었다. 하릴 없이 시간이 갔지만 기현은 포기할 수 없었다. 팀장에게는 잠시 쉬겠다고 이야기해 놓고는 수철을 계속 감시했다. 마침내 퇴원일이 되었지만 알아낸 건 아무 것도 없었다. 배후가 정말로 있는지는 모를 일이지만 적어도 기현의 눈에 띌 정도로 어설픈 배후는 아닌 모양이었다.

 

퇴원 수속을 마치고 병원 밖으로 나간 수철은 택시를 탈 생각도 없이 아직 보조 외골격이 달려 있는 왼쪽 다리를 끌고 터덜터덜 어디론가 걸어갔다. 기현은 멀리서 수철의 뒤를 쫒았다. 수철이 향하는 곳은 사고가 났던 곳과 비슷한 편도 이차선 도로였다. 그러더니 도로변에 주차되어 있는 차들 사이에서 달려오는 차들을 기웃거리기 시작했다. 상황을 직감한 기현이 숨어 있던 곳에서 뛰어 나가려 했지만 한 발 늦었다. 수철은 또 다시 달려오는 차를 향해 몸을 던졌다.

 

“안 돼요!’

 

수철을 향해 날카롭게 소리를 지른 건 기현이 아니었다. 어디 숨어 있었는지 번개처럼 튀어나오며 수철을 향해 외친 목소리는 순식간에 달려들어 수철의 손목을 잡아챘다. 차도로 달려들던 수철의 몸이 멈칫했고 그 사이 다가오던 자동차는 수철의 옆을 아슬아슬하게 스치고 지나갔다. 자기 발로 뛰어들긴 했지만 그래도 역시 무서웠는지 수철은 다리를 휘청거리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아저씨 미쳤어요? 이렇게 무턱대고 뛰어들면 어떻게 해요? 그냥 아무렇게나 뛰어든다고 되는 게 아니랬잖아요! 까먹었어요? 이러다 진짜로 큰 사고 나면 민희 혼자 어떻게 살라고!”

 

민희라는 이름을 듣자 수철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수철의 어깨를 툭툭 치며 이마에 솟아오른 땀을 닦아내던 사람과 기현의 눈이 마주쳤다. 뜻밖에도 낯익은 얼굴이었다.

 

“김미선… 씨? 김미선 씨 맞죠? 저 사고처리팀 안기현입니다. 바로 옆 사무실이라 가끔 마주쳤었는데. 기억 안 나세요?”

 

사람 얼굴을 기억하는 건 기현의 특기였다. 상대방 역시 그런 특기가 있으리란 보장은 없었지만 적어도 이번만큼은 상대방 역시 기현을 알고 있는 눈치였다. 그런 걸 놓칠 기현이 아니었다. 하지만 상대방은 눈살을 찌푸리며 기현의 시선을 털어냈다.

 

“누구요? 사람 잘못 보셨네요.”

 

“분명히 맞는데. 암페어 사 고객상담팀에서 일하셨잖아요. 삼 년 전에.”

 

“저. 이런 식으로 접근하는 거 너무 구식 아닌가요? 불쾌하니까 그만 둬 주세요.”

 

단호한 말투였지만 기현은 오히려 그 태도를 보며 자신의 추측을 확신으로 바꿨다. 기현은 반갑게 웃으며 물었다.

 

“정말 나쁜 뜻은 없어요. 아마 절 기억하진 못하실 거예요. 저도 몇 번 복도에서 마주친 게 다니까. 사실 저 오늘 여기서 좀 이상한 일을 하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우연히 낯익은 사람을 만나니까 그게 반갑고 또 희한하고 그러네요. 참. 정이현 씨는 잘 지내요? 이현 씨는 아마 저 기억할 텐데.”

 

무어라 차갑게 받아치려던 미선의 표정이 정이현이라는 이름을 듣고 풀어졌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기현은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살짝 끄덕인 뒤 얼른 다가가 아직 제대로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수철을 일으켜 세워 부축했다.

 

“전수철 씨. 정신 차리세요.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셨는지 모르겠지만 지난번에 그렇게 좋은 조건에 합의를 해 드렸던건 정말 특별한 경우입니다. 사고를 당한 분께 드릴 말씀은 아니지만 극도로 운이 좋았던 거라고요. 지금 이렇게 일부러 차도로 뛰어드는 걸 제가 봤으니 다음에 또 이런 일을 하신다면 본인 과실 100%는 물론이고 보험 사기로 처벌 받으실 수도 있습니다. 다시는 이런 짓 할 생각 마세요.”

 

 

기현이 사람을 잘 기억하기는 했지만 김미선을 기억하는 건 사실은 미선 때문이 아니라 정이현 때문이었다. 천재 프로그래머 정이현. 암페어 사의 자율 주행 알고리즘 개발의 핵심 멤버였고 기현과는 사고 처리 시뮬레이션을 개발하는 일로 몇 번 만난 적이 있었다. 최연소 임원감이라며 사람들의 주목을 받던 이현은 삼 년 전에 갑자기 퇴사했다. 경쟁사로 옮긴 것도 아니고 그냥 업계에서 사라져 버렸다.

 

이현의 퇴사 이유를 놓고 사람들의 추측이 난무했다. 경쟁사가 비밀리에 스카웃해가서 일을 시키고 있다는 설부터 대규모 국가 행정 네트워크를 개발하기 위해 정부 부서로 들어갔다는 소문까지 다양했다. 반면에 알고리즘 개발 방향을 놓고 경영진과 마찰이 있었다거나 연봉 협상에서 감정이 틀어져 그만 뒀다는 말도 돌았다. 그 중 가장 신빙성이 없었던 게 같은 시점에 퇴직한 고객상담팀의 한 직원과의 사랑의 도주설이었다.

 

이현이 갑자기 사직서를 제출하고 나서 일주일 뒤에 미선 역시 회사를 그만뒀다. 평소라면 그다지 눈에 띄지 않는 평범한 직원이었던 미선의 퇴사가 화제가 될 일은 없었겠지만 이현의 퇴사로 온갖 종류의 입방아를 찧던 시기라 미선의 퇴사를 그와 연결해 보려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 둘이 눈이 맞아 함께 퇴사한 거라는 주장이었다. 시골로 내려갔을 거라느니 세계여행 중이라느니 하는 아무 근거 없는 추측들이 더해졌다.

 

억지로 꾸며진 도주설은 얼마 시간이 지나지 않아 사람들의 머리에서 지워졌지만 기현은 아니었다. 기현은 정이현의 퇴사를 놓고 떠드는 사람들 중 유난히 미선이 눈에 띈다는 걸 눈치 챘다. 은근히 이현을 시샘하던 사람들이나 그저 가벼운 농담거리로 삼는 사람들, 혹은 암페어 사의 주가 하락을 걱정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진정으로 이현을 걱정하는 모습이 표정에 드러나는 건 미선 하나였다.

 

도주까지야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적어도 미선의 퇴사는 틀림없이 이현과 연관이 있다고 기현은 확신했다. 물론 기현은 아무에게도 그런 생각을 말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에 대한 추측을 떠들고 다니는 건 아마추어나 하는 일이었다. 다른 사람을 관찰하고 꿰뚫어 본다는 평을 얻어봐야 좋을 게 없었다.

 

“사실 저 기현 씨 알아요. 암페어 사 다닐 때 몇 번 마주친 기억이 나긴 하지만 그걸 떠올린 건 퇴사하고 나서예요. 기현 씨가 하는 일에 관심 가질 이유가 있거든요. 요즘에는. 그때는 아니었지만.”

 

미선이 미리 연락해 놓았었는지 얼마 지나지 않아 사고가 날 뻔 했던 현장에 열 살 남짓 되어 보이는 아이 하나가 나타났다. 전수철의 딸인 민희였다. 민희는 기현의 모습을 보고 다가오던 걸음을 멈추었지만 미선이 괜찮다고 손짓하자 얼른 달려와 수철에게 안겼다. 수철이 다시 차도로 뛰어들 기색은 보이지 않았지만 미선은 안심이 되지 않는지 몇 번이나 다짐을 받은 뒤에야 두 사람을 보냈다. 근처 카페로 기현을 끌고 간 미선은 물어보지도 않고 아이스커피 두 잔을 주문했다. 기현이 물었다.

 

“무슨 일을 하고 계시는 거예요?”

 

“자선 사업이라고 해야 하나.”

 

시원한 대답은 아니었지만 무언가를 숨길 기색이 보이진 않았다. 기현은 천천히 물어보기로 했다. 어차피 시간은 많았다.

 

“제 일에 관심 가지는 이유가 궁금하네요.”

 

“아니 그것보다. 대체 왜 일 잘 하더니 갑자기 전수철 씨를 감시하는 거예요? 천만 원 기현 씨 지갑에서 꺼내 준 것도 아니잖아. 협상 실적 하나 올렸으면 됐지 뭐가 아쉬워서 콜도 안 받으면서. 티나 안 내면서 감시하면 몰라. 그렇게 대놓고 붙어 있으면 누가 접근해요? 말은 그럴 듯하게 잘 하면서 어쩌면 그런 일은 그렇게 어설퍼요?”

 

“어설펐어요? 나름 최선을 다 한 건데.”

 

“뭐 그건 됐고. 하여튼 기현 씨 떼어낸다고 전수철 씨 내버려 두다가 결국 사고 날 뻔한 거니까 그것만 알아둬요. 진짜 사고 났으면. 아까 민희 봤죠? 전수철 씨 무슨 일 생겼으면 기현 씨가 민희 책임질 수 있어요? 없잖아요. 그러니까 우리가 하는 일에 끼어들지 말고 그냥 각자 자기 일 하자고요. 기현 씨는 사고 처리하는 일 계속하고 우리는 우리 일 계속하고.”

 

“미선 씨 하는 일이 뭔데요? 자해공갈단?”

 

일부러 슬쩍 자극해 봤지만 미선은 개의치 않는 듯했다. 어느새 테이블 옆에 다가와 깜박이고 있는 트레이에서 아이스커피를 집어 한 모금 쭉 빨아들이더니 이제야 살겠다는 듯이 길게 한숨을 쉬고는 기현에게 눈짓했다. 기현도 커피를 집어들자 트레이는 다시 주방으로 굴러갔다. 미선은 빨대로 얼음을 휘저으며 말했다.

 

“그렇게도 볼 수 있죠. 자해하는 것도 맞고 공갈치는 것도 맞으니까.”

 

“왜 그런 일을 해요? 미선 씨 같은 분이.”

 

“자선 사업이라니까요.”

 

“자선… 그래요. 하시는 일에 대해 저한테 자세히 알려 주실 이유는 없겠죠. 그래도 저 나름 진지하거든요. 일도 쉬면서 전수철 씨에게 붙어 있었던 거니까요. 납득할 만한 대답을 들어야 저도 포기하고 하던 일로 돌아갈 수 있지 않을까요. 자해공갈로 자선 사업을 한다니 말이 안 되잖아요.”

 

“배상금을 받아내야 할 사람에게 천만 원을 주고 합의하는 건 말이 돼요?”

 

사실 그게 기현이 이 일에 말려든 이유였다. 기현은 아이스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는 천천히 말했다.

 

“설마. 미선 씨 암페어 사와 짜고 이런 일을 벌이는 거였어요? 말도 안 되는 금액을 합의금으로 제시하고. 그걸 암페어 사 내부의 누군가가 승인해 주고. 커미션 나눠 먹고?”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이네요. 한 가지 확실한 건 우리가 암페어 사의 누군가에게 주는 커미션은 없어요. 인공지능에게 커미션을 줄 수는 없잖아요? 천만 원 합의 승인한 거. 인공지능이에요. 아시잖아요. 사고처리 기준 다 인공지능이 결정하는 거.”

 

“인공지능이 그런 결정을 내릴 리가 없잖아요? 배상액 면제가 합의 한계 값인데. 손익분기점을 면밀히 계산하면 얼마간 합의금을 주는 게 이익일 수도 있겠지만 그게 천만 원일 수는 없어요. 제가 이 일을 한 게 벌써 몇 년인데요. 그 정도 계산은 나오죠.”

 

미선이 기현을 잠시 바라보다가 말했다.

 

“민희. 전수철 씨 딸 말이에요. 어려 보이겠지만 얼마 전에 중학교 합격 통보를 받았어요. 과학 영재들을 모아 가르치는 곳이에요. 좋은 학교기는 하지만 일반 중학교가 아니다 보니까 돈이 좀 들어요. 민희 걔가 하도 똘똘해서 알바하면서라도 다니겠다고는 하는데 당장 입학금과 첫 학기 등록금을 마련할 방법이 없네요. 전수철 씨 보셔서 알겠지만 갑자기 어디서 돈 마련할 위인이 못 돼요. 팔백 정도만 있으면 되는데. 그래요. 뭐 영재중 꼭 가야하는 것도 아니고 똘똘한 애니까 다른 길을 찾을 수도 있겠죠. 하지만 다리 한 번만 부러지고 애가 그렇게 가고 싶어 하는 영재중에 보낼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그걸 전수철 씨에게 권하는 게 나쁜 일은 아니지 않을까요?”

 

기현은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아무리 그래도 자해공갈로 돈을 마련한다는 걸 쉽게 받아들이긴 힘들었다. 자칫 잘못하면 다리가 아니라 머리를 다칠 수도 있는 일이었다. 머뭇거리는 기현을 보며 미선이 말했다.

 

“이 이상은 기현 씨에게 그냥 오픈하기가 곤란해요. 여기까지도 기현 씨를 믿으니까 말해 준 거예요. 제 퇴사가 이현이랑 관련이 있다는 걸 알면서도 지금까지 떠들고 다니지 않았으니 입은 꽤 무거운 편일 거란 판단을 한 거죠. 결정하세요. 우리랑 손잡을래요? 아니면 그냥 여기까지만 아시고 돌아가세요. 우리가 나쁜 뜻으로 이런 일을 하고 있는 게 아니라는 것만 믿어 주시고요.”

 

미선은 명함을 한 장 내밀었다. 노란색과 검은색이 뒤섞인 촌스러운 글자체로 급전 필요하신 분이라는 문구와 전화 번호 하나가 적혀 있었다. 미선이 재미있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기현 씨한테 차에 뛰어 들라고 하는 거 아니니까 걱정 말아요. 기현 씨 영업 능력이 필요한 거니까. 다시 말하지만 자선 사업이에요. 자선 사업은 돈 안 되는 거 아시죠? 뭐 그냥 입에 풀칠만 하고 산다고 보시면 돼요. 그래도 좋으면 연락 주세요.”

 

 

“강 팀장님. 그 천만 원 합의금 건 말입니다. 누가 승인한 거죠?”

 

“뜬금없이 전화해서 뭔 소리야? 너 콜 언제부터 받을 거야? 돈 안 벌 거야?”

 

“모아 놓은 걸로 대충 입에 풀칠은 해요. 그나저나 천만 원. 무조건 비공식으로 처리하라고 한 게 누구예요. 부장? 상무? 아니면 더 윗선?”

 

“얘가 큰일 날 소리하네. 부장 상무가 왜 나와? 그냥 계산 결과가 그렇게 나온 거지.”

 

“계산 결과요? 인공지능에서 나온 값이라고요? 팀장님. 그거 말 안 되는 거 아시잖아요. 우리가 이 짓 일이 년 해봐요? 누가 특별 승인을 했겠지.”

 

휴대폰 너머로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잠시 후 강 팀장이 두 음 정도 낮아진 목소리로 말했다.

 

“기현아. 너는 이런 건 처음인 거 같은데. 요즘에 가끔 고액 합의금 승인 나는 건들이 있어. 나야 이유는 모르지. 인공지능에서 왜 그런 계산 결과가 나 … (계속 읽으시려면 로그인해야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