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철 수거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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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호의 의리는 땅에 떨어졌다…….

박은 깊은 탄식을 뱉었다. 등줄기에서는 연신 땀이 흘러내려, 오천 원 주고 산 남방이 흠뻑 젖었다. 멀미를 만난 사람처럼 눈앞이 빙글빙글 돌았다. 가늘어진 목구멍 사이로 밭은 숨이 새어 나왔다. 전철을 빠져나와 승강장의 플라스틱 의자까지 가기가 천릿길이었다. 박을 내려놓은 전철이 눈 먼 토룡(土龍)처럼 한바탕 용트림을 한 후 어둠속으로 떠나갔다. 바람이 일었다가 이내 잠잠해졌다.

“어찌 이런 일이…… 어찌…….”

의자에 앉아 숨을 헐떡이면서도 박은 계속해서 중얼거렸다. 몇 분 전의 일이 생생했다. 생생하긴 했으나, 믿을 수는 없었다. 믿을 수는 없었으나, 엄연한 현실이었다. 삭풍 앞의 메마른 나뭇가지처럼 덜덜 떨리는 팔다리가 그걸 증명하고 있었다.

박은 눈을 감았다. 자신을 최라고 밝힌 그 건달의 얼굴이 떠올랐다. 아니다. 건달이 아니다. 건달 축에도 못 끼는 시정잡배였다. 기름을 발라서 넘긴 머리하며 앞주머니에 꽂아 넣은 색안경이 영락없었다.

“아따. 영감님도 참 딱하네. 버린 신문 줍는 처지에 도가 어디 있고, 예가 어디 있습니까?”

한 예순다섯이나 됐을까, 검버섯 하나 없는 반질반질한 얼굴은 일갑자(一甲子)하고도 십오 년을 더 산 박이 보기에는 핏덩이나 다름없었다. 그런 놈의 입에서 도(道)와 예(禮)가 걸레 쥐어짜듯 줄줄 흘러나오자 박은 눈앞이 아찔했다. 노기(怒氣)가 단전을 지나 전신을 휘돌았다. 설상가상 놈의 메밀눈은 슬며시 비웃음을 흘리는 게 아닌가.
박이 최의 소문을 들은 건 보름 정도 전이었다.

‘최라는 만무방이 지하철을 헤집고 다니는데 아무도 건드리지를 못한다.’

처음에는 대충 그런 정도로만 말이 돌았다. 박은 신경 쓰지 않았다. 다른 노선에서 헤살을 부리는 뇟보에게까지 관여할 정도로 박은 여유롭지 않았다. 옆 동네의 임이 찾아왔을 때도 그 마음에는 변함이 없었다.

“이보오, 박 영감. 좀 도와주시오. 최라는 놈 때문에 굶어죽을 판입니다. 몸집이 마치 동면 전 살 오른 불곰과 같고, 성정(性情)이 며칠 굶주린 이리 같으니 일개 노인들로서는 최를 당할 수가 없습니다.”

“임 영감. 사정은 딱하나 나도 내 코가 석자요. 마누라는 병세가 깊어 구들더께로 지낸 지 어느덧 삼 년이고, 자식들 또한 변변치 않아 내 손으로 아등바등 벌어야만 겨우 하루를 넘긴다오. 예전에야 뭣 모르고 불 같이 나서기도 했지만 이제는 나도 조용히 지내고 싶소.”

묵묵히 듣고 있던 임은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기고 떠나갔다.

“어쩔 수 없지요. 하지만 이것 하나 만은 알아두시오. 최는 분명히 박 영감을 노릴 것이오. 이 일대에서 박 영감 자리가 제일 쏠쏠하다는 건 누구나 아는 사실이니까.”

박의 뇌리에 그 말이 묘하게 남았다. 그러고 보니 요 며칠 간 뒤통수가 근질근질한 것이 꼭 누가 뒤를 밟는 것만 같았다. 지하철 역무원이 아닐까 싶어 몇 번이나 뒤를 돌아보기도 했다. 늙어서 신경이 예민해진 탓이라 여겼는데, 혹시 그것이 최의 미행(尾行)은 아니었을까…….

박은 그렇게 생각한 후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가당치 않은 이야기였다. 박의 자리가 아무리 탐나기로서니 잠행(潛行)을 하면서까지 노릴 리는 없었다. 게다가 그 자리가 좋다는 걸 알았다면 박의 명성도 익히 들었을 터, 섣불리 덤비지는 않으리라는 자신감 또한 박에게는 있었다.

하지만 이야기는 요상하게 흘러갔다.

‘박이 근본도 없는 최를 무서워해서 피한다!’

통사정을 하던 임이 힘없이 집으로 돌아간 후, 마른 풀에 불붙듯이 그런 소문이 번지기 시작했다. 다음 날 오시(午時)가 되기 전, 박의 패퇴(敗退)를 알리는 헛소문이 휴대전화(携帶電話) 전음(傳音)을 통해 노인들 사이에서 퍼져나갔다. 이제 박의 시대는 저물었다는 섣부른 예측을 내놓는 사람도 있었다.

“뭐야? 어떤 가납사니가 그래?”

아무것도 모른 채 집에서 쉬고 있던 박이 정의 전화를 받고 버럭 화를 낸 건 당연한 일이었다. 정은 본디 남의 말 전하기를 좋아하고, 흠을 바르집어 떠벌리는 치였지만 적어도 거짓말을 하지는 않았다. 과장이 섞였다 해도, 정의 말은 사실일 것이다.

박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았다.

“최든 뭐든, 나타나기만 하면 내 당장에 응징할 터이니 똑똑히 봐 두라고 사람들한테 전해.”

박의 호언장담(好言壯談)이 호사가(好事家)들의 입을 통해 사방으로 퍼져나간 것 또한 당연한 일이었다.

최가 박의 이야기를 들었는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다만 더 이상 최의 이야기를 옮기는 사람은 없었다. 그가 옆 동네 노인정을 접수했다는 이야기가 얼핏 들려오기도 했지만 박은 애써 무시했다.

그렇게 며칠이 흘렀다. 그동안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박은 친구인 김과 함께 도(道)에 어긋남 없이 여느 때처럼 신문 수거를 했다. 물론 전혀 다툼이 없었다면 거짓이리라. 양쪽 선반이 아닌 전철 바닥에 떨어진 신문의 소유권을 놓고 때로는 말씨름을 하기도 했지만, 그것은 허초(虛超)가 섞인 비무(比武)일 뿐이었다.

그런데 지난 이틀 동안 김이 보이지 않았다. 동네 노인들끼리 자주 모이는 ‘경석침대무료체험관(磬石寢臺無料體驗官)’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날씨가 갑자기 쌀쌀해져서 감기에라도 걸린 모양이겠거니 하고 그냥 넘어갔는데, 웬걸 오늘 보니 낯선 이가 김의 자리를 꿰차고 마구잡이로 신문을 걷고 있었다.

그이가 바로 무뢰배, 최였다.

‘그래, 바로 네 놈이로구나.’

박은 최의 덩치에 놀라면서도 의연함을 잃지 않았다. 언젠가는 이런 날이 오리라, 무의식 깊은 곳에서는 예감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박은 최를 말없이 톺아봤다. 과연, 위압감이 들 정도로 몸집은 컸지만 나이에 맞지 않게 꾸민 모습이 일견 솔봉이 같아 보이기도 했다.

박은 어린아이를 달래는 심정으로 조용히 말을 이었다. 원래 이 시간에는 김이라는 노인이 수거를 담당한다고, 며칠 안 나왔지만 그래도 자리는 지켜주어야 한다고, 그것이 상도(常道)고 예의(禮誼)라고.

하지만 최는 콧방귀도 뀌지 않았다. 그리고 대꾸한 말이 바로 그것이었다.

도와 예가 어디 있느냐는…….
“한낱 구걸에도 법도가 있고 위아래가 있거늘 신문 수거도 하나의 일인데 어찌 도가 없단 말이냐?”

박은 진기(眞氣)를 실어 준엄하게 꾸짖었다.

그렇다. 신문을 수거하는데도 나름의 도가 있었다. 승객들의 위치와 신문이 놓인 자리를 잘 파악해서 최대한 소리 없이 수거하니 이것을 지(智)라 했다. 경쟁자를 위해 전철의 한쪽 선반만 수거하는 것이 의(義), 그리고 경쟁자가 몸이 아파 힘들어 한다면 한 칸 정도 슬쩍 양보를 하는 것은 바로 인(仁)이었다.

작년까지만 해도 중원(中原)은 무법천지였다. 몇 푼 안 되는 신문 수거에 너도 나도 뛰어들어 혈투(血鬪)를 벌였고, 흡사 개싸움과 같은 그 상황 속에서 도(道)와 예(禮)는 늙은 개의 불알만큼도 쓸모가 없었다. 무료신문수거인인증제(無料新聞收去人認證制)가 폐지된 이후에는 그 정도가 더 심해졌다. 한 전철에 네댓 명씩 물려들어 승냥이처럼 아귀다툼을 벌였다. 수거하는 노인들끼리 언성을 높이는 건 물론이고 신문 한 장을 사이에 두고 피바람이 몰아친 적도 부지기수였다. 시민들의 원성이 자자했고, 전철 내에서 암약(暗躍)하며 노인들을 잡아 내리는 공익(公益)의 탄압도 극에 달했다.

그 난세 속에서도 박은 정도(正道)를 벗어나지 않았다. 갑자기 나타나 분대질을 해대는 불한당에게는 따끔한 맛을 보여주었지만, 오랫동안 함께 일했던 동료에게는 한없이 관대했다. 박이 일하는 시간대에 어쭙잖게 끼어든 노인들은 박의 서슬 퍼런 달구침에 줄행랑을 놓기 일쑤였다. 그런 방법이 아니고라도 대부분의 야인(野人)들은 일주일을 넘기지 못하고 나가떨어졌다. 신문 수거는 그만큼 고된 일이었다. 폐지를 내다팔아야 연명할 수 있는 박 같은 사람이 아니고서는 견디기가 쉽지 않았다.
최는 박의 꾸짖음에도 아랑곳없이 선반 위의 신문을 걷어갔다. 이쪽저쪽 가리지 않았다. 몸도 날렵하고 걸음이 빨라 승객들 사이를 잘도 지나갔다. 마치 경공(輕功)을 보는 듯했다. 박도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어금니를 질끈 깨물고 최의 뒤를 따랐다. 악한을 처단하고자 하는 의협심(義俠心)이 들불처럼 일어났고, 그보다 조금 늦게 생계에 대한 걱정이 격랑(激浪)이 되어 머릿속을 때렸다.

물이 불을 이기는 것이 세상의 이치. 수거를 할수록, 최가 이쪽저쪽 선반의 신문을 죄다 쓸어 담으며 앞으로 내달릴수록 박의 마음속에는 ‘생계’라는 두 글자가 선명해졌다. 일 킬로그램 당 사십 원씩 하는 신문은 다리가 빠지게 모아야 만 원을 받을까 말까였다. 그마저도 없으면 자리 보존하고 누운 마누라와 하루 종일 굶을 판이었다.

박은 내공(內功)을 끌어올려 발걸음을 재촉했다. 소싯적에는 시장 통에서 힘깨나 썼던 박이였다. 상인들 푼돈을 뜯어먹는 양아치들이 죄다 박 아래 무릎을 꿇었다. 타고난 강골이기도 했지만 권투, 합기도, 소림 권법 등으로 다져진 박을 아무도 당해내지 못했다.

절대고수(絶對高手). 분명, 그렇게 불리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나이는 속이지 못했다. 세월은 금강불괴(金剛不壞)와 같던 박의 몸을 서서히 좀먹었다. 낙엽 고인 웅덩이처럼 관절이 썩어갔고, 오십 줄에 달라붙은 당뇨는 근육의 힘을 앗아갔다. 비슷한 연배라면 몰라도 얼추 십 년 이상 차이 나는 최를 따라잡기란 애당초 힘든 일이었다.

거리는 점점 벌어졌다. 더불어 손에 쥐는 신문 수도 줄어들었다. 자리에 앉은 사람들이 불쌍하다는 듯 건네주는 게 전부였다. 숨이 가쁘고 다리가 후들거렸다. 비틀거리다가 승객들에게 부딪치기 일쑤였다. 그때마다 짜증 섞인 표정이 화살처럼 날아들었다. 명치 부근이 뻐근했다. 무리하게 움직인 탓에 내상(內傷)을 입은 게 분명했다. 진기(眞氣)가 빠져나간 자리에 짙은 분노가 차올랐다. 박은 남은 힘을 쥐어짜내 최에게로 달려가 뒷덜미를 낚아챘다.

“네 이놈! 언제까지 헤살을 놓을 것이…….”

전철의 지붕을 뚫을 듯 매서웠던 박의 사자후(獅子吼)는, 그러나 끝을 맺지 못하고 탁한 공기 속으로 흩어져 버렸다. 최가 박의 멱살을 잡은 것이다. 마침 전철이 정차했고, 최는 열린 문으로 박을 내던지듯 밀어내 버렸다.

“곱게 미칠 것이지. 에이, 재수 없어.”라는 조롱과 함께.
박은 억장 무너지는 한 시진(時辰) 전의 사건을 곱씹으며 ‘경석침대무료체험관’으로 향했다. 최에게 치욕을 당한 후 가까스로 정신을 추슬러 신문 수거를 했지만 평소의 삼분지 일밖에 얻지 못했다. 승강장에 버려놓고 간 신문들만 모았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다음 전철에 올라 수거를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곳엔 또 다른 수거 노인들이 있었고, 그걸 무시한다는 건 최라는 잡놈과 다를 바가 없다는 뜻이었다.

박은 ‘경석침대무료체험관’이라 적힌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안마기 이용 순서를 기다리고 있던 정이 알은체를 했다.

체험관에는 이미 노인들이 가득했다. 아는 얼굴 몇몇이 박에게 눈인사를 건넸다. 시큼한 파스 냄새와 안마기 돌아가는 소리가 좁은 공간을 가득 메웠다. 박은 다른 이들의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따뜻한 실내에 들어서자 쌓이고 쌓였던 피로가 파도처럼 밀려왔다. 다리가 아프고 어깨에 힘도 빠졌다. 일분이라도 빨리 뜨끈한 안마기에 누워 최를 몰아낼 계획을 세우고 싶었다. 그때 정이 옆으로 다가왔다.

“소식 들었어?”

박은 묵묵부답(不答) 허공만 바라봤다. 또 어디서 소문을 물어온 모양이었다. 혹시 최와의 일을 벌써 알게 된 건 아닌지, 박은 속으로 뜨끔했다.

한동안 박의 얼굴만 바라보던 정이 답답하다는 듯 꽥 소리를 질렀다.

“김 영감이 죽었다는 소식 들었냐고?”

박의 짙은 눈썹이 순간 꿈틀, 했다.

“뭐라고? 누가 죽어?”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았다.

“김 영감 말이야. 자네랑 신문 줍는. 여기 안 나온 지도 며칠 됐잖아? 그 양반이 살던 동네에서도 마찬가지였나 봐. 같은 연립에 사는 사람이 현관 앞에 신문이 수북이 쌓여 있는 걸 보고 경찰 불러서 문 따고 들어갔다네. 그랬는데, 보일러를 이빠이 틀어놓은 방 안에 김 영감이 죽어가지고 반듯하게 누워 있더라는 거야. 바닥이 뜨거워선지 며칠 안 지났는데도 시체 썩는 냄새가 고약하더래.”

김은 혼자 살았다. 벌써 오년 째라고, 어느 날인가 수거한 신문을 갖다 팔고 함께 설렁탕을 먹는 자리에서 김이 말했다. 한 그릇에 천오백 원 하는 설렁탕은 국물 맛이 헛헛했다. 혼자 사는 노인네의 푸념도 헛헛하긴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죽는 순간까지 끝끝내 혼자였던 빌어먹을 영감탱이의 이야기 또한 헛헛하다고, 박은 생각했다.

“자식새끼들한테 연락을 해도 덤덤하더라는 거야. 망할 놈들, 지 애비가 죽었는데도…….”

정의 이야기는 더 이상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이 소용돌이쳤다.

돈 아까워 보일러도 잘 안 튼다는 양반이 죽을 걸 예감하고 마지막으로 등허리라도 지진 걸까?

박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앉아 있던 의자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쓰러졌다. 정이 놀라서 토끼눈을 떴다. 안마기 앞쪽의 넓은 공간에서는 각종 건강보조식품과 옥돌매트에 대한 설명이 한창이었다. 구입한 누구누구 할머니 할아버지를 불러내 박수를 유도하고 난리도 아니었다. 그치들이 죄다 박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이 사람아. 어디 가는 거야?”

문을 박차고 나가는 박의 등 뒤로 정의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박은 정신없이 거리를 걸었다. 어디로 가는지 자신도 알지 못했다. 땀인지 눈물인지 모를 것이 얼굴을 타고 흘러내렸다. 성긴 머리카락이 바람에 휘날렸다.

김과 함께 신문 수거를 한 지 올해로 딱 삼년 째였다. 처음에는 서로를 못마땅하게 여겼다. 저 놈이 내 밥그릇을 뺏는구나,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거의 매일 얼굴을 마주치다 보니 시나브로 정이 들었다. 공익이 쫓아올 때는 함께 도망도 쳤다. 아마 그때가 처음이었으리라. 얼굴에 여드름이 잔뜩 난 공익요원 한 명을 따돌리고 숨을 헐떡인 뒤, 이럴 게 아니라 우리 통성명이나 합시다, 하고 말을 튼 게.

박은 무릎이 아파 더 이상 걸을 수 없게 되어서야 멈춰 섰다. 정신은 여전히 혼미(昏迷)했다.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니 전철역, 그것도 승강장 안이었다. 김과 제일 많은 시간을 보냈던 장소.

‘김, 이 사람아…….’

박의 눈앞이 흐려졌다.

‘이렇게 허망하게 가다니.’

누런 이 사이로 비탄(悲歎)에 빠진, 박의 뜨거운 숨이 새어나왔다.

‘다시마진액을 마셔보는 게 소원이라 했지 않은가. 노인정 윤 할머니한테 잘 보이겠다고 크림도 바르고 다니던 양반이 뭐가 그렇게 급해서…….’

그때였다. 눈물이 두껍게 자리 잡은 안구(眼球) 위로 흐릿한, 하지만 절대 잊을 수 없는 상(像)이 맺혔다.

미련스레 벌어진 어깨, 청재킷, 살 오른 엉덩이, 바로 최였다.

최가 승강장 맨 앞에 서 있었다. 널따란 등짝이 못 견디게 밉살스러웠다. 청재킷을 가로지른 주름이 박을 비웃고 있는 것만 같았다. 박은 홀린 것처럼 최를 향해 다가갔다. 머리를 까딱까딱하며 흔드는 모습이, 남을 짓밟고도 양심의 거리낌조차 없는 발김쟁이의 바로 그것이었다.

지금 열차가 들어오고 있습니다. 안전선 밖으로…….

허공에서 아련히 안내방송(案內放送)이 들려왔다. 대못박이 같이 답답한 목소리라 평소에는 마음에 들지 않았으나, 지금 이 순간만은 심지 굳은 전언(傳言)처럼 느껴졌다.

박은 꿀꺽, 침을 삼켜 귓속에서 울던 안내방송을 가라앉히고 최를 향해 한 발 더 다가섰다. 저 멀리서 전철이 땅을 훑는 소리가 들렸다. 숨을 삼켰다. 귀식대법(龜息大法). 호흡과 심장의 움직임마저 멈춰 적의 주위에 잠복(潛伏)하는 기술. 최의 뒤에 그림자처럼 붙어 섰으나 언제 뒤를 돌아볼지 몰라 불안했다.

박은 좌우를 살폈다.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 일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전철에 빈자리가 많은 늦은 오후라 자리 뺏길 이유가 없는 지금 이 순간, 노인 둘에게 관심을 기울일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손바닥을 활짝 폈다. 최의 등과는 반자가 채 안 되었다. 벽공장(劈空掌)을 사용해 밀어버리면…….

박은 아랫입술을 물며 호흡을 골랐다. 전철의 울부짖음이 점차 가까워졌다. 서늘한 바람이 박의 뺨을 때렸다. 한 발 더 다가갔다. 시뻘건 불빛이 승강장을 비췄다. 이제 정말 지척이다. 박은 온몸의 기를 양손에 집중했다. 눈을 감았다. 숨을 들이켠 후, 힘껏 팔을 뻗었다.

빠앙.

“뭐하시는 거예요?”

눈앞에서 하얀 섬광(閃光)이 번쩍였다.

“노망이 났나. 죽을 거면 집에 가서 곱게 죽으세요.”

귓가를 맴돌던 잡음이 사라지는 것과 동시에 서서히 의식이 돌아왔다. 박은 눈을 떴다. 제일 먼저 본 것은 희고 높은 천장이었다. 그것이 승강장의 천장이고, 자신이 바닥에 대(大)자로 쓰러져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건 전철에서 내리는 사람들의 발길에 이리저리 채이고도 한참 후였다.

“큰일 날 뻔했다고요. 전철이 들어오는데 그렇게 다가가면 어떻게 해요?”

박은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박의 좌편(左便)에 쪼그려 앉은 공익의 얼굴이 보였다. 박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 어떻게 된…….”

박이 힘겹게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

“어떻게 되긴요, 할아버지가 선로에 떨어질 것처럼 붙어서기에 제가 끌어당겼죠. 저 아니었으면 할아버지 집에 송장 칠 뻔했다니까요.”

‘연생이 같은 놈이 말하는 품세하고는.’

구들장에 불이 들어오듯이 서서히 화가 치밀어 오르면서 덩달아 머리도 맑아졌다. 이성을 잃고 헛것을 봤다는 사실을 그제야 깨달았다. 까딱했으면 죽은 목숨이었다는 사실도…….

온몸이 땀에 절어 축축했다. 박은 승강장 의자에 걸터앉았다. 공익이 한심하다는 듯 바라보다가 휘적휘적 걸어갔다.

얼마나 있었을까, 축지법(縮地法)을 쓰는 노사처럼 저 혼자 내달리던 심장이 조금씩 자리를 찾았다. 팔다리의 떨림도 잦아들었다. 육체적인 고통이 줄어들면서 깊은 분노가 노구(老軀)를 흔들었다.

걷잡을 수 없는 분노이되, 그 방향만은 명확했다.

최. 그 무뢰배. 소드락질을 일삼는 천하의 나쁜 놈.

모든 게 최 때문이다. 김의 죽음도, 손자뻘도 안 되는 공익 놈에게 송장 운운하는 소리를 들은 것도, 지긋지긋한 가난도, 잔소리꾼 마누라도, 이 빌어먹을 세상도 모두 최 때문이다.

박은 치솟는 분노를 날선 창처럼 벼르고 또 별렀다. 주먹을 그러쥐었다. 한때는 한 번 휘두르기만 하면 권풍(拳風)이 일고, 지면(地面)이 부르르 떨던 전설의 주먹이었다. 이제는 손자 녀석들이 가지고 노는 수수깡처럼 앙상하게 말라붙은 그 주먹에 아주 잠깐, 푸른빛의 은은한 강기가 맺혔다가 사라졌다. 대신에 산보다도 높고, 바다보다도 깊으며, 바위보다도 단단한 맹세하나가 박의 심중(心中)에 자리 잡았다.

복수하리라.

김을 위해서, 빗물 젖은 신문지처럼 짓이겨진 도와 예를 위해서, 그리고 생계를 위해서 최에게 복수하리라!
“이 천하(天下)의 불땔꾼 같은 놈을 당장에…….”

박이 복수를 다짐하며 일떠선 그 순간, 돌연 영롱하면서도 맑은 가죽피리 소리가 옆자리에서 들려왔다. 뒤이어 바람 잦은 날 풍기는 다복솔 향처럼 은은하고 청아한 냄새가 박의 코끝을 간질였다. 사람의 창자를 돌아 나왔다고는 도저히 믿기 힘든 소리와 향이었다.

놀란 박이 옆자리로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는 노숙자(露宿者)로 보이는 한 사내가 누워 있었다. 박을 향해 드러낸 투실한 엉덩이가 할 말이 더 남았다는 듯 저 혼자 씰룩거렸다.

‘기척(棄擲)도 없이 언제부터 누워 있었던 걸까?’

아무리 분노에 사로잡혔다 한들 바로 옆자리 사람의 기척을 못 느낄 리 만무했다.

“노형(老兄)께서는 무에 그리 분개(憤慨)하시오?”

자고 있는 줄로만 알았던 사내의 입에서 그런 말이 흘러나왔다. 박은 다시 한 번 놀랐다. 목소리가 예사롭지 않아서였다. 그저 미성(美聲)이라 하기에는 부족했다. 분명 맑고 부드러웠으나 그 속에는 위엄 어린 내공(內功)이 실려 있었다.

“괜찮으시다면 이 떨꺼둥이에게 곡절을 들려주시지요.”

사내는 그렇게 말하며 일어나 앉았다.

과연, 범상치 않은 용모였다. 부리부리한 눈에는 열끼가 가득했고, 벽장코 아래로 자란 탑삭나룻은 옛 이야기에 나오는 용맹한 장수를 연상시켰다. 머리칼은 또 어떤가. 힘차게 뻗어 있으면서도 윤기가 좌르르 흐르는 그것은 흡사 맹수의 갈퀴 같았다. 흰머리가 하나도 없는 것이 언뜻 보면 삼십 대 중반이었지만, 또 어느 순간에는 여든을 훌쩍 넘긴 노인처럼도 보였다.

‘도무지 나이를 짐작할 수 없구나.’

나이뿐만이 아니라 정체를 알 수 없기도 마찬가지였다. 갑옷이라도 두른 듯 터지고 헤진 옷을 여럿 겹쳐 입은 품새야 영락없는 노숙자(露宿者)였지만, 풍기는 분위기와 예스런 말투로는 노숙자(老宿者)라 해도 무방해 보였다.

“저, 그것이…….”

박은 노숙자(露宿者)들을 경멸했다. 그치들은 게으르고 무지한 만무방이라는 것이 박의 생각이었다. 빨갱이들과 노숙자, 그리고 생각 없이 날뛰는 젊은 애들만 없어도 나라 사정이 더 나아질 거라고 김과 이야기했던 게 한 두 번이 아니었다.

박의 마음을 안다는 듯 사내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제 몰골 때문에 말씀하시기 저어하시면 나름 짐작해 보지요. 그 전에 소개부터 드리겠습니다. 갑이라고 합니다.”

사내가 때에 전 손을 내밀었다. 박은 마지못해 그 손을 잡았다.

“제가 짐작하기로 노형께서는 복수의 칼을 갈고 계신 듯한데, 아니신가요?”

짧은 악수가 끝나기도 전에 갑이 박을 향해 물었다.

박은 내심 크게 놀랐으나 짐짓 딴청을 부렸다.

“광명천지 밝은 세상에 복수라니 허허. 그것도 제 몸 하나 가누기도 힘든 늙은이한테…….”

“대의와 명분만 있다면야 복수가 꼭 나쁜 것은 아니지요. 세상의 도와 예를 저버리는 이가 있다면 그에 마땅한 복수를 해서 의를 세워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제가 보기에 노형은 충분히 강건하십니다. 갑술년 개띤데도 이리 대살지시니.”

기이한 일이었다. 갑이라는 사내는 박의 마음을 꿰뚫어 보는 데다가 나이까지 단번에 맞춰 버렸다.

“그, 그런 걸 어떻게 아시오?”

“허허. 앎의 이유가 중요하겠습니까. 안다는 사실이 중요한 것이지. 노형의 아픈 사정 또한 저는 왠지 알 것만 같군요. 최근에 지인을 잃으셨지요? 게다가 북쪽에서 괴인(怪人)이 나타나 세상을 어지럽히니, 노형의 마음 또한 심란한 것 아니겠습니까?”

“당신은 뉘시오?”

박의 목소리가 떨리기 시작했다.

이이는 노숙자 따위가 아니다. 아니, 예사 사람이 아니다. 어쩌면 나는 기연(奇緣)을 만났는지도 모른다. 박의 머릿속은 그런 생각으로 가득 찼다.

“소인은 다만 노형을 돕고 싶다는 생각으로 결례를 무릅쓰고 말을 건 걸인일 뿐입니다. 허허.”

노숙자는 그렇게 말하며 천천히 일어섰다. 승강장의 조명이 노숙자의 윤기 흐르는 머리카락에 닿아 눈부시게 빛났다. 각기 다른 방향에서 달려오는 전철 두 대가 일진광풍(一陣狂風)을 일으켰다. 노숙자의 윗옷이 말려 올라가며 새하얀 맨살이 드러났다.

그 순간 박의 머릿속이 환해졌다. 마음속에 채워져 있던 큼지막한 자물쇠가 풀린 느낌이었다.

“아아. 고맙소.”

박은 갑의 두 손을 덥석 잡았다.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더럽게만 여겨졌던 구정물 말라붙은 손이 세상을 등진 채 은거하는 와호(臥虎)의 앞발이요, 장룡(藏龍)의 꼬리처럼 보였다.

“허허. 고맙긴요. 어디 들어볼까요?”

박은 갑에게 사정을 설명했다. 신문 수거를 시작하게 된 일부터 친구인 김이 죽었다는 사실까지, 그리고 최라는 갈개꾼의 등장과 자신의 억울한 심정을 시시콜콜 털어놓았다. 도와 예가 수시로 등장했고, 박의 몇 개 없는 이 사이로 서너 방울의 침이 튀었으며, 갑은 이야기가 계속되는 동안 아름다운 가죽피리 소리로 추임새를 넣었다.
“그러니까 아침에 수거할 수 있는 무료 신문에는 대표적으로 네 가지가 있단 말입니다.”

갑은 삼각 김밥을 우물거리며 말했다. 마요네즈 섞인 참치가 갑의 수염에 묻었다.

이야기 듣기를 마친 후, 갑은 복수할 방법을 가르쳐 주겠다며 박을 지하철 안에 있는 편의점으로 데리고 갔다. 그러고는 삼각 김밥 두 개와 컵라면 한 개를 골랐다. 계산은 박의 몫이었다. 하루 벌이의 절반 정도가 날아갔지만 복수를 위해서라 생각하니 조금, 아주 조금만 아까웠다.

“《파리전철(巴里電鐵)》과 《초점(焦點)》, 그리고 《묘시(卯時)》와 《무삭제소식(無削除消息)》이 그것들이지요. 그 외에 나머지 군소 신문들이 세 가지 정도 더 있지만 세력이 미미하기에 거론하지는 않겠습니다.”

갑은 쓰레기통을 뒤져 모아온 각기 다른 네 종류의 신문을 편의점 테이블에 펼쳐 놓았다. 박에게는 낯익은 것들이었다. 최가 나타나기 전까지, 하루에도 수백 장씩 만지느라 손톱 밑이 까매질 정도였다.

컵라면 뚜껑을 열어 휘휘 저으며 갑이 말을 이었다.

“앞서도 말씀드렸지만, 복수에는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상대를 완벽하게 제거하는 것과, 그 상대보다 내가 더 잘 되는 것. 첫 번째 방법은 위험 부담이 크니 최후의 한 수로 남겨두는 것이 현명한 처사이지요. 그렇다면 남은 방법은 한 가지. 바로 최라는 그치보다 노형께서 잘 되는 것, 즉 더 많은 신문을 수거하는 것이지요. 그러자면 신문의 특성을 파악할 필요가 있습니다. 노형은 네 가지 신문들이 어떻게 다른지 아십니까?”

멀뚱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신문 수거 생활을 삼 년 넘게 했지만 그런 생각을 해 본적은 한 번도 없었다. 박에게는 그저 똑같은 신문일 뿐이었다.

“내가 설명해 드리지. 《파리전철(巴里電鐵)》은 다른 셋에 비해 무게가 조금 가볍고 더 미끄럽습니다. 《초점(焦點)》은 무게는 중간 정도, 하지만 넷 중 제일 뻣뻣하지요. 《묘시(卯時)》 역시 무게는 중간이지만 훨씬 부드럽습니다. 마지막으로《무삭제소식(無削除消息)》은 넷 중 제일 무거운 데다가 퍽이나 거칠고 뻣뻣하지요. 이 차이의 핵심을 아시겠습니까, 노형? 후루룩.”

후루룩, 후루룩, 갑은 연신 면발을 빨아들였는데, 박은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사정없이 군침이 돌아 안 그래도 뜻 모를 소리가 더 어렵게만 들렸다. 주머니에는 천 원이 남아 있었다. 컵라면 하나쯤은 사 먹을 수 있는 돈이었지만 집에서 기다릴 마누라 얼굴이 아른거려 차마 돈을 쓸 수 없었다.

“어허, 시원하다. 라면은 역시 국물 맛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그나저나 아직 핵심을 모르시는 모양이군요. 그럼, 내 또 친절히 설명 드리리다. 신문의 특징을 안다는 것은 그놈들을 수거할 때 적절히 힘을 배분할 수 있다는 말과 같습니다. 예를 들어 노형한테 십의 힘이 있다면, 전철을 돌아다니는데 오 할을 쓸 것이고 신문을 직접 수거하는데 그 나머지를 쓰겠지요. 그 중에서도 까치발을 하고 선반까지 손을 뻗는데 또 몇 할, 그리고 신문을 집어 내리는데 몇 할, 이렇게 나눠지겠지요.”

“가, 가만.”

박은 손을 들어 갑의 이야기를 막았다. 무언가, 찰나의 깨달음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자신이 최를 당해내지 못하는 이유는 노쇠한 몸과 체력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두 가지를 한 순간에 해결할 수는 없었다. 아니,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렇다면…….

“가진 힘을 적절히 배분해서…….”

“바로 그겁니다. 힘의 배분. 불필요한 동작을 빼고, 신문 별로 힘을 달리해 수거한다면 기(氣)가 쉬이 고갈되지는 않을 겁니다. 다만 지공(指功)으로만 신문의 종류를 판별할 수 있도록 수련을 거듭해야겠지요. 내 장담하는데 하루 종일 틀어박혀 삼 일만 수련하면 웬만큼은 가능할 것입니다. 무운을 빌겠습니다, 노형.”

갑은 그 말을 끝으로 남은 삼각 김밥 한 개를 주머니에 집어넣은 후 휘적휘적 편의점 밖으로 나갔다. 생각에 잠겨 있던 박이 깜짝 놀라 그 뒤를 따랐다.

“이보시오. 어디로 가는 겁니까?”

“헛되고 또 헛된 것이 세상살이 아니겠습니까? 힘 센 놈이 약한 놈을 등쳐먹고, 약한 놈은 더 약한 놈의 뺨을 후리는 세상, 이 한 몸 누울 곳을 찾아서 또 정처 없이 헤매야겠지요. 허허허.”

“그, 그래도 이리도 빨리 가시면…….”

“아닙니다. 이제 제 도움은 필요 없을 겁니다. 노형께서는 충분히 비법을 터득할 수 있습니다. 삼 일, 딱 삼 일만 수행을 하십시오. 그럼.”

지하철역 계단을 향해 걸어가는 갑의 등이 바다처럼 넓어 보였다.

“가르쳐 주신 방법으로도 복수를 하지 못하면, 어찌하면 되겠습니까?”

애절함이 담긴 박의 질문에 갑이 멈추어 섰다. 그러고는 다시 편의점으로 들어가 계산대에 있는 학생과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누더니 되돌아 나왔다. 손에는 어느새 잘 접힌 종이쪽지가 들려 있었다.

“내 여기 비책을 적어두었습니다. 이 비책은 노형께서 꺼리는 방법일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최후의 순간에 펼쳐보십시오. 그리고 그대로 행하신다면 필시 최라는 사람을 무찌를 수 있을 것입니다.”

쪽지를 받아든 박은 감읍하여 차마 고맙다는 말을 하지 못하고 깊숙이 허리를 숙였다. 박이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갑은 홀연히 사라지고 없었다. 은은한 미향(迷香)만이 허공에 맴돌 뿐이었다. 오후의 한적한 전철역 구석구석을 둘러보며 박은 혼자서 중얼거렸다.

“참으로 귀인(貴人)이구나. 참으로…….”

또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