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화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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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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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m. 자전거가 도로에서 차지하는 폭은 단 1m뿐이다.

지금 내 옆을 나란히 달리며 연달아 경적을 울려대는 무쏘 승용차가 나를 앞질러 가는 데 필요한 공간은 단 2m면 충분하단 이야기다.

운전자가 운전대를 잡은 손을 살짝만 틀고 발목에 아주 미약한 힘만 더해 주면 수초 이내에 나는 무쏘 승용차 뒤에 아른거리는 점으로 사라질 일이다.

어차피 밤 10시가 넘은 3번 국도에는 오가는 차량도 없어 추월을 위해 필요한 공간도 널찍했다.

무쏘 운전자의 생각은 나와 좀 달랐던 모양이다.

수안보에서 연풍면 방향으로 3번 국도를 따라 5km쯤 달려왔을 때 따라붙어 벌써 2km가 넘는 구간을 동행중이다.

이제는 조수석 창문을 내리고 욕설까지 퍼붓는다.

“야. 쫄쫄이 입은 변태 새끼야. 자전거로 왜 도로 틀어막고 지랄이야!”

얼핏 바람결에 술 냄새가 풍겨 오는 것도 같다.

“우리나라는 너 같은 새끼들 때문에 안 되는 거야. 알아?!”

국가의 기강을 바로잡기 위해 애써 수고하시겠다는데 더는 어울려줄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애당초 2톤이 넘어가는 쇳더미 안에서 시원한 에어컨 바람을 쐬며 발목만 까딱거려도 사람 한둘 치어 죽이는 건 일도 아닌 운전자에게 심장 박동과 허벅지 근육을 엔진 삼아 고되게 달려나가는 자전거가 대적할 길은 없지 않은가?

나는 자전거를 세우고 페달에 고정된 발을 풀었다.

무쏘 운전자도 옆에 나란히 차를 세우더니 열린 조수석 창으로 나를 쳐다본다.

자전거용 저지 뒷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들어 운전자의 얼굴을 촬영하는 시늉을 하고 다이얼을 누르는 척 하자 무쏘 운전자는 욕설과 함께 떠나갔다.

“개새끼 내가 이화령 터널에서 너 마주치면 갓길로 밀어서 죽여버릴 거야!”

컴퓨터가 장착된 자전거 속도계에 표시되고 있는 내 심박 수는 어느덧 분당 170회를 넘어서고 있었다.

부산까지 가야 할 길이 아직 250km도 넘게 남아 있었다.

심박 수가 높아지면 근육에 쌓이는 피로도가 증가한다. 진정하고 심박 수를 낮출 필요가 있었다.

몇 모금의 물을 마시고 토사물 맛이 나는 전해질 용액을 뜯어 마시자 다시 심박 수는 분당 100회 정도로 떨어져 있었다.

무쏘 운전자가 사라진 도로는 적막감이 감돌았다. 도로 위의 불빛이라고는 내 자전거 전조등과 후미등의 광원뿐이었다.

‘차라리 쌍욕 들으며 나란히 달리는게 나을뻔했나?’

충동적으로 무박 국토 종주를 나선 건 좋았지만 출발한 시간대가 너무 애매했다.

그래도 이 정도의 페이스를 꾸준히 유지 한다면 내일 저녁에는 부산에 도착할 수 있다는 게 다행이었다.

곱창을 안주 삼아 소주 한 병 비우고 고속버스 타면 모레 새벽에는 다시 집에 들어와 월요일 출근하는데에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일단은 10km쯤 떨어진 연풍면에서 물통의 물도 다시 채우고 가볍게 요기를 하기로 마음먹었다.

새벽이 되면 도로의 차량도 더 줄 것이고 기온도 많이 내려갈 것이다.

다시 해가 뜨기 전의 마지막 불빛과 온기를 즐길 필요가 있었다.

연풍면의 편의점에서 라면과 간단한 주전부리들과 물을 사고 핸드폰을 들여다보니 배터리가 바닥 나 있었다.

‘완전히 충전된 상태에서 10시간 정도 지났다지만 통화를 하거나 인터넷을 하지도 않았는데 왜 이렇지?’

범인은 자전거 속도계였다.

최신의 자전거 속도계답게 GPS와 컴퓨터가 내장된 모델이었는데 내 휴대폰의 블루투스와 연동되어 실시간으로 내 위치를 인터넷상의 불특정 다수에게 공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동네방네 국토 종주 하고 있다고 소문내고 다닌 셈이군…….’

역시 사람은 매뉴얼을 꼼꼼히 읽어볼 노릇이었다.

“핸드폰 충전 좀 하고 싶은데요. 고속 충전기 없나요?”

“저희 가게는 그런 거 없는데요…. 제 것 충전기로 잠깐 충전 도와드릴까요?”

아르바이트생의 친절은 고마웠지만, 라면 먹느라 15분을 넘게 소비했는데 또 핸드폰 충천을 위해 수십 분을 까먹을 수는 없었다.

달아오른 몸의 근육이 식어 버리는 것도 곤란했고 하루 정도라면 날 찾을 사람도 딱히 없을 거 같았다.

“아 괜찮습니다. 가다 날 밝으면 다음 편의점 한번 들러볼게요.”

아르바이트생에게 인사를 건네고 3번 국도를 타고 문경 방면으로 다시 나아가는데 무쏘 운전자의 저열한 협박이 떠올랐다.

[… 이화령 터널에서 .. 마주치면…]

11시가 넘어가는 시간에 이런 지방 국도의 터널 안은 대단한 적의를 품은 운전자가 아니더라도 위험요소가 많기는 했다.

인적도 없는 도로에서 규정 속도를 지키는 운전자가 몇이나 되겠으며 갑자기 속도가 빨라지는 터널 안에서 자전거는 금방 눈에 띄는 존재가 아니기도 했다.

생각해보면 문경을 가기 위해서 꼭 3번 국도를 고집해야 할 이유도 없었다.

유유자적한 자전거 여행을 즐기는 이들은 이화령 옛길 구간을 더 선호한다.

문제는 이화령 옛길을 통해 문경으로 가려면 약 5km 구간의 오르막길을 지나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평균 경사도 6% 정도로 그리 가파르다고 할 수는 없는 오르막이었지만 그 길이 때문에 국토 종주를 즐기는 자전거 초심자들에게는 거대한 관문처럼 여겨지는 구간이기도 했다.

‘…. 그리고 나는 인터넷 구간 기록상으로 대한민국에서 이화령 옛길 오르막 구간을 가장 빨리 올라간 사람이기도 하지.’

대단한 자랑거리는 아니겠지만, 대다수의 자전거 여행객들이 40분에서 길게는 2시간은 소모해야 통과할 수 있는 구간을 13분 만에 올라갈 수 있다는 건 꽤 대단한 업적 아닌가?

물론 최고 기록을 세웠을 때 보다 3살이나 더 먹고 몸무게는 5kg이나 늘긴 했지만, 지금은 기록을 갱신 하기 위해 올라가는 게 아니다.

‘절반 정도, 아니 삼 분의 일 정도 페이스로 천천히 올라가도 40분이면 정상 도착할 거야.’

생각하면 할수록 터널에서 차들의 매연과 위협에 고생하느니 일, 이십분 더 소비하고 체력은 더 소진할지 몰라도 안전하고 운치 있는 길 쪽이 더 나은 선택인것 처럼 보였다.

무엇보다 5km의 오르막을 오르고 나면 다시 5km 정도의 내리막을 즐길 수도 있다는게 매력적 이었다.

잃는 게 있으면 얻는 것도 있는 법이다.

나는 자전거를 돌려 이화령 옛길로 나아갔다.

옛길의 시작은 그리 높지 않은 경사도에 굽이굽이 산을 끼고 돌아 펼쳐진 2차선 도로였다.

낮 시간이었다면 드문드문 등산객들이나 자전거 여행객들을 만날 수도 있었겠지만, 자정에 가까워진 시간에 이 길을 지나가는 건 나처럼 정신 나간 놈 정도일 것이다.

구름에 달이 가려져 어둠에 잠긴 도로는 자전거 전조등이 닿는 부분만 훤히 드러나 보였다.

시간이 안 좋기는 했다.

날 위협할 차량도, 내 앞길을 가로막을 자전거도 없었지만, 문제는 소리였다.

오직 들려오는 소리라고는 체인이 기어에 부드럽게 맞닿아 돌아가는 자르륵 소리,타이어의 고무와 도로가 마찰하며 내는 소리, 내 입에서 나오는 규칙적인 날숨의 소리뿐이다.

그 사이로 가끔 도로옆 풀숲의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오면 심장박동이 순간적으로 1~20회가 넘게 치솟아 오르곤 했다.

어쩌면 들짐승이 은밀히 움직이며 내는 소리일 테고, 어쩌면 바람에 나뭇가지가 나부끼며 내는 소리일 거다.

그리고 등 뒤에선 콧노래 소리가 들려왔다.

‘콧노래??’

글쎄…. 환청이라기에는 너무 뚜렷하다.

소리는 점점 더 커져 왔다. 다가오는 소리였다.

곧 뒤편에서 자전거의 전조등 불빛이 나타났다.

조금은 마음이 놓였다.

‘쓸데없는 생각을….’

이 시간에 이화령을 넘어가는 사람이 또 있다는 게 의아하긴 했지만 그건 상대방에게도 마찬가지 일 거다.

속도계를 보니 시속 22km가 넘어가는 속도였다.

심박 수는 분당 140회 정도로 적당한 운동강도였지만 콧노래를 부를 여유 따위는 내게 없었다.

아마 대다수 사람들에게는 이 정도 경사에서 시속 20km를 넘는 속도를 내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일 것이다.

뒤편 자전거 운전자가 지금의 내 페이스를 한참 능가하고 있다는 건 분명해 보였다.

아마 곧 나를 스쳐 지나갈 것이다.

잠깐의 마주침일 테지만 이 산길에 또 다른 누군가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다.

이제 뒤편의 자전거 운전자는 얼굴이 보일 정도로 바짝 따라붙었다.

남자와 눈이 마주치자 난 묵례를 하였고 남자는 가볍게 손을 들어 보였다.

남자가 나를 앞질러 가기 좋게 도롯가로 자전거를 붙이며 속도를 조금 더 떨어뜨렸다.

남자는 여전히 내 뒤에 바짝 따라 붙어있다.

조금 더 속도를 떨어뜨려 보았다.

여전히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며 콧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2m… 피 빨겠다는 소리군’

앞선 자전거와 2m 이내의 간격을 유지하면 뒤따라가는 자전거는 공기 저항으로부터 자유로워져 한결 적은 에너지 소모로도 항속을 유지할 수가 있다.

내뒤에 따라 붙어 손쉽게 이화령을 올라가겠다는 남자의 의도가 명확해 보였다.

알지도 못하고 나보다 페이스도 좋은 사람에게 피를 빨리기는 싫었다.

손을 들어 나를 앞질러 가라는 신호를 보내봤다.

남자는 여전히 나를 무시하며 콧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부아가 치밀며 심박 수가 분당 160회까지 치솟아 올랐다.

나는 자전거를 급정지한 후 페달에서 발을 풀고 도로에 내려섰다.

남자도 같이 멈추더니 나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뭡니까? 먼저 지나가세요?”

“같이 가요. 한밤에 이런 길 혼자 가면 무섭거나 심심하잖아요?”

“난 누가 내 뒤에서 피 빠는 거 안 좋아합니다. 보아하니 잘 타시는 분 같은데 먼저 치고 나가세요.”

자전거의 전조등에 얼핏 얼핏 비춰 보이는 남자는 190이 훌쩍 넘어 보이는 키에 몸에 딱 달라붙는 타이츠를 입었음에도 군살 하나 드러나지 않는 근육질의 몸매였다.

나는 남자의 얼굴에 맴도는 웃음기가 보기가 싫었다.

“……. 건데”

남자가 고개를 떨구고 웅얼거리듯 내뱉었다.

“뭐라고요?”

“그쪽 쫓아가서 죽이려고 그러는 건데 내가 먼저 가면 어떡합니까?”

남자의 투정부리는 듯 친근한 말투에 온몸이 털이 곤두서는듯했다.

— 본 작품은 유료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