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분기점 – 발해의 구원 요청(10~12세기 초)
924년, 실제 역사에서 발해의 마지막 왕 대인선은 신라에 사신을 보낸다. 하지만 이 대체역사에서는 고려의 태조 왕건에게 사신을 보냈다. 이듬해인 925년, 거란이 발해를 침공하자 고려 태조는 친히 구원병을 이끌고 북상했다. 그러나 거란군이 기습적으로 상경성을 함락하면서 태조의 구원병이 닿기도 전에 발해는 멸망했다.
태조 왕건은 발해의 잔당을 규합, 926년 중순 거란군을 격퇴하고 상경성을 수복했다. 여기서 왕건은 고려 및 발해인들의 추대로 황제를 칭했다. 실제 역사에서 외왕내제 정책을 취했던 것과 달리, 이 대체역사에서 고려는 대외적으로도 황제국임을 선언했다. 역사상 이를 고려 ‘제1제국’이라 부른다.
고려는 실제 역사보다 북방에 역량을 집중해 북방 고토를 회복 했다. 그러나 이러한 역사의 개변은 후백제 태자 신검의 정변에는 영향을 주지 않았다. 때문에 신검은 역사대로 견훤을 폐위했고, 견훤 역시 역사대로 고려에 망명했다. 덕분에 고려는 후삼국까지 통일하는데 성공했다.
고려 제1제국은 북방의 말갈(여진)인들을 제국민으로 편입시켰다. 때문에 고려와 여진 문화 간 융합이 활발히 일어나, 고려의 문화는 실제 역사보다 북방 전사적인 기풍이 강화되었다.
또한 거란이 만주 동부지역을 지배하지 못했으며, 여진족이 금나라를 세우지 않아서, 이 시기 동북아시아 정세는 실제 역사와 상당히 다르게 개편되었다. 거란은 몽골고원과 북중국을 지배했다. 송은 금나라에게 밀려났듯이 거란에 의해 중국 대륙 남쪽으로 밀려났다. 동쪽은 고려 제1제국이 만주와 한반도를 지배하에 두고 이 두 제국을 견제했다. 이 동북아 3강 체제는 칭기스칸과 몽골 제국의 등장으로 무너졌다.
2. 칭기스칸과 몽골(12세기 말~13세기 초)
거란은 실제 역사의 금나라를 대신해 몽골 고원을 통제하면서 몽골인들을 핍박해왔다. 따라서 칭기스칸의 성장환경은 실제 역사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소년 테무진은 실제 역사와 거의 비슷한 치련을 겪으며 성장했다. 그리고 그는 칭기스칸이 되었다.
다만 외교적 상황이 다소 달라졌다. 실제 역사에서 탕구트인들의 서하는 칭기스칸과 대립했다. 하지만 여기서는 함께 거란을 무너뜨린 동반자로서, 몽골 제국의 제후국 중 하나로 남았다.
고려의 경우 발해 영토를 흡수한 뒤 서경으로 천도했는데, 때문에 강화도에서 저항하지 않고 요동 지역에서 몇 차례 패배를 겪은 후 태자를 인질로 보내고 항복했다. 이후 고려는 우구데이 카간 사후 뭉케 카간이나 쿠빌라이 카간 등의 계승을 지지하면서 입지를 확대, 부마국이자 주요 제후로서 몽골 제국 내에 자리잡았다. 다만 이때 칭호가 왕으로 격하되고, 흥안령 산맥 동쪽의 상당한 영토를 몽골 제국에 빼앗기면서 제1제국은 막을 내렸다.
빼앗긴 지역에는 칭기스칸의 동생들에게 분봉된 영지, 동방 왕가가 설치되었다. 그래도 고려는 이르게 항복한 현실적인 결정 덕분에 국력의 상당부분을 보존할 수 있었다.
실제 역사에서 칭기스칸은 서하 정벌 중에 사망했으나, 여기서는 북중국에서 일어난 한족들의 반란을 진압하고, 이를 지원한 남송과 전쟁을 벌이던 중 병사했다. 실제 역사에서 칭기스칸의 유언은 서하인들을 몰살시키라는 것이었지만, 여기서는 한족을 몰살시키라는 내용으로 바뀌었다. 한족 학살을 말렸던 신하 야율초재는 몽골이 거란을 멸망시킬 때 다른 야율씨 황족들과 함께 사망했다. 한족들은 몽골의 학살에 무방비 상태로 놓일 수밖에 없었다.
3. 한족 대이동, 그리고 산업혁명(12세기 말~14세기)
북중국에서 발생한 대학살을 피해 엄청난 수의 난민이 장강 하구로 몰려들었고, 이렇게 집중된 인구는 초보적인 형태의 산업혁명을 일으켰다. 쿠빌라이 카간 시대에 몽골 제국은 남송을 병탄하면서 그러한 산업 혁명의 성과도 흡수했다. 증기기관, 그리고 철도가 대몽골 제국(예케 몽골 울루스) 전역에 조금씩 보급되면서, 몽골 제국의 통합 시대와 제국의 수명은 약간 늘어났다.
4. 일본원정(13세기)
고려의 국력이 실제 역사보다 많이 보존되어 있었기 때문에, 여몽연합군은 교토를 성공적으로 정복했다. 이로써 일본의 군주정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일본은 한동안 몽골 제국의 식민지로 전락했지만, 몽골의 총독-다루가치는 일본열도 전역에 행정력을 행사하는 데는 끝내 실패했다.
일본 농민들의 끈질긴 잇키는, 몽골 제국이 붕괴하면서 마침내 독립의 열매를 맺었다. 무사나 귀족이 아닌, 농민들의 잇키로 이루어낸 성과이기에 이는 농민들의 의식을 일깨웠다. 일본은 실제 역사와 달리 최초의 ‘농민공화국’으로 거듭났다. 따라서 이 대체역사에서 일본은 임진왜란을 비롯한 침략전쟁을 일으키지 않았다.
5. 태평양 대항해시대(13~14세기)
몽골의 점령 당시 많은 일본인들은 옛 일본 신화에 나오는 신들의 세계를 찾아 동쪽 바다를 탐험하기 시작했다. 태평양 여러 섬의 원주민들과 접촉하면서 이들은 하와이까지 이르는 항로를 재발견했다. 한편 몽골인들 역시 인도네시아(마자파히트)를 비롯한 태평양 여러 섬들을 점령할 원정을 계획했으며, 이 계획을 실행에 옮긴 탐사가 태평양 대항해시대의 문을 열었다. 그 결과 일본인들은 14세기에 처음으로 북미 대륙을 밟게 되었다.
북미 대륙 서해안 일대에 정착한 일본인들은 남하하며 아즈텍 제국과 접촉했다. 실제 역사에서 유럽의 탐험가들은 본국의 지원을 받는 사람들이었지만, 이 대체역사에서 일본인들은 피난민들이었기에 거대한 식민정부를 만들 역량은 없었다. 그러나 이들과의 접촉은 아즈텍 제국과 메소아메리카 지역에 변화를 일으키기에는 충분했다. 실제 역사처럼 아즈텍인들은 전염병으로 상당한 인구를 잃었지만, 병마를 이겨내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의술과 위생을 발달시켰다.
그동안 아즈텍인들은 ‘꽃전쟁’이라 일컫는, ‘인신공양에 쓸 포로를 잡는’ 전쟁 방식을 고수해 왔다. 그러나 서쪽에서 온 이주민들은 ‘살육의 전쟁 방식’을 선보였고, 이에 따라 인력이 귀해지면서 아즈텍인들의 종교에서 ‘인신공양’은 사라졌다.
철제 도구의 도입도 아즈텍의 사회상을 완전히 변화시켰다. 아즈텍인들의 ‘인신공양용 가축’이었던 틀락스칼라인들이 일으킨 혁명으로 아즈텍은 일종의 연방 공화국으로 변모했으며, 북쪽으로 진출하여 체로키나 이로쿼이 등의 부족들과 접촉, 흡수하면서 그런 경향은 더욱 강해졌다.
몽골 제국의 수명이 늘어나면서 실크로드의 수명도 늘어났기에, 그리고 원시적 형태의 철도가 도입되었기에, 서유럽의 대서양 탐험은 실제 역사보다 늦어졌다. 유럽인들이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했을 때는, 이미 북미와 남미에 거대한 제국들이 자리를 잡고 침략자들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6. 이성계 일가(14세기 말~15세기 초)
이성계는 고려가 아닌 몽골의 장수로 임관했다. 이성계는 그 군사적 역량을 조선 건국이 아니라 위기를 맞은 원나라를 구원하고 분열된 몽골 제국을 재통합하는데 썼다. 조선 태종이 되어야할 이방원은 재상으로서 몽골 제국 개혁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세종이 되어야할 이도는 몽골의 문자와 언어 교육법을 혁신하여, 몽골 문화가 북중국 일대에 깊숙이 전파되도록 했다. 이는 스스로를 ‘몽골인’으로 자각하는 인구를 증가시켰기에, 이후 근대사에서 몽골은 인구 부족 문제에 그다지 시달리지 않게 되었다.
실제 역사에서 세종 이도는 여진족에 대해 강경한 정책을 펼치기도 했는데, 이 대체역사에서도 비슷한 일이 일어났다. 이도는 몽골 제국의 재상으로서 훨씬 강력한 권력을 바탕으로 동화를 거부하는 한족에게 강경한 압박정책을 펼친다. 이때 이도가 명분으로 삼은 것이 ‘전족’의 폐지인데, 이를 ‘미개한 한인의 문화’로 규정하고, 반역에 준하는 죄로 다스렸다. 덕분에 전족 같은 문화는 실제 역사보다 빨리 사라졌지만, 그의 정책은 한족의 반발을 불러일으켜 몽골 제국을 붕괴시킨 원인 중 하나로 지목된다. 은퇴한 이도는 말년을 고려에서 보냈는데, 이때 몽골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훈민정음을 창제, 보급했다.
7. 몽골 제국의 붕괴(15세기)
몽골 제국의 붕괴는 세 방면에서 일어났다. 첫째, 페르시아 일대를 지배하던 훌레구 울루스(일칸국)의 붕괴이다. 이성계는 티무르와의 협상을 통해 훌레구 울루스를 황금씨족과 티무르 일가의 연합 정권으로 만들어 일단 예케 몽골 울루스(대몽골 제국)의 일원으로 묶어두는 데는 성공했다. 그러나 훌레구 울루스가 지니고 있던 불교 국가적 성격이 티무르에 의해 훨씬 강화되면서 문제가 발생했다. 실제 역사와 달리 티무르는 광적인 불교도가 되었으며, 그에 따라 무자비한 이슬람 탄압이 이어졌다. 티무르 생전에는 티무르의 강력한 통제력 덕분에 정권이 유지될 수 있었으나, 티무르 사후 각지에서 발생하는 무슬림 반란으로 인해 훌레구 울루스는 급속히 붕괴했다. 훌레구-티무르 울루스 붕괴 이후 인도로 탈출한 잔여 세력은 역사대로 무굴 제국을 건설했다.
티무르가 불교 광신도가 되었기 때문에 오스만 투르크는 실제 역사와 달리 살아남지 못했다. 실제 역사에서는 그나마 같은 무슬림이었기에 티무르의 신하로 목숨은 부지할 수 있었지만, 이 역사에서 티무르는 무슬림에게 훨씬 더 잔인했다. 오스만 투르크는 사라졌으며, 덕분에 로마는 어느 정도 영토와 국력을 수복할 기회를 얻었다. 원래 로마의 마지막 황제가 되었어야 할 콘스탄티노스 11세는, 훨씬 더 좋은 조건 아래에서 제국을 이끌게 되었다. 로마는 화려하게 부활했다.
그러나 로마의 부활은 러시아를 지배하던 주치 울루스(킵차크 칸국)에는 전혀 좋은 역사 전개가 아니었다. 그리스 정교회의 수장 국가인 로마 제국은 러시아 내 여러 공국들의 반 몽골 연합을 지원했으며, 러시아 류리크 왕실과의 혼인을 통해 그 계승까지 개입하는 등, 주치 울루스의 종주권을 위협했다. 결국 주치 울루스 역시 러시아에서 물러나면서 수도 사라이와 캅카스 일대로 그 판도가 축소되었다. 북쪽 볼가 강 일대에는 카잔 칸국이, 동쪽 아랄 해 일대에는 호레즘, 카자흐, 사마르칸드 칸국이 각각 주치 울루스에서 분리되어 자립했다.
카간 울루스(다이온, 대원大元)는 한족들의 대대적인 반란으로 중원의 대부분을 잃고 북방으로 밀려났다. 다만, 실제 역사와 달리 이 대체역사에서 몽골은 내륙국이 아니다. 칸발리크(베이징)와 그 일대를 지켜내는 데에 성공한 것이다. 러시아 제국이 바다에 면한 페테르부르크를 수도로 삼았던 것처럼, 몽골 제국은 칸발리크를 계속해서 수도로 유지했다. 다소 늦게 건국된 명나라는 베이징 일대를 차지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다른 지역에서도 상당히 축소된 영토를 보유했다.
몽골 제국이 한족에 대한 압박 정책으로 다른 민족들에게 편입시킨 영토는 다음과 같다. 운남성과 사천성 일부, 귀주성 일대는 대리 왕국의 영토로 편입되었다. 남은 사천성 일부는 티베트의 영토로 편입되었다. 하서회랑을 비롯한 감숙성 대부분, 장안을 비롯한 섬서성 일부는 탕구트 왕국에 편입되었다. 광서성과 광동성 일대에는 퉁족의 대예 왕국이 자리했다. 이러한 영토들을 한족은 ‘빼앗겼다’고 생각하였으며, 이는 후일 일어날 비극의 밑바탕이 되었다.
8. 고려 제2제국(15세기~20세기 초)
몽골 제국의 붕괴와 함께 독립을 쟁취한 고려는 흥안령 산맥 동쪽, 몽골 황족들의 ‘동방 왕가’와 연합하여 새로운 제국을 건설했다. 고려 황제의 혈통에 섞인 칭기스칸-쿠빌라이 카간의 피와 그 정치적 위상은 고려 황제의 지위를 ‘카간’에 거의 가까운 것으로 만들었다. 본래 몽골 황통은 부계 만을 인정했으나 티무르와 이성계의 타협 이후 이 원칙은 무너진 지 오래였다. 결국 몽골과 고려 간 갈등은 전쟁으로 이어졌다. 전쟁은 몇 차례 충돌 이후 애매한 강화 협상으로 끝이 났다. 여기서 고려 황제는 ‘솔롱고스의 카간’이라는 칭호를 받게 되는데, 이로써 두 제국은 친척이자 동맹으로 대등한 별개 국가이면서, 동시에 껍데기만 남은 예케 몽골 울루스의 구성원이라는 아슬아슬한 균형 상태를 한동안 이어나갔다.
이러한 균형 상태는 1627년, 명나라가 정묘한란(丁卯漢亂)을 일으켜 고려를 침공하면서 잠시 위기를 맞이하기도 했다. 몽골은 고려와 명나라 사이를 중재하는 움직임을 보이다가 고려와 명나라 양국 모두로부터 이득을 보려 했으나, 고려는 성공적으로 명나라군을 격퇴했다.
몽골의 계산과 달리 명나라는 평양을 함락시키지 못했고, 원정군 대부분도 섬멸되면서 고려는 동맹의 의무를 저버린 몽골을 노려보기 시작한다. 정묘한란 이후 명나라가 붕괴하고 이자성의 순나라와 오삼계의 주나라가 중화를 두고 내전을 벌였지만, 고려의 보복을 두려워한 몽골은 이 내전에 개입하지 못했다. 중화의 내전은 오삼계의 승리로 끝났고, 이후 19세기에 태평천국이 들어서게 되어서야 몽골과 고려는 신뢰와 동맹을 회복한다.
9. 나폴레옹(18~19세기)
아즈텍 연방과 서유럽의 대서양 전쟁은 서유럽의 경제를 파탄으로 몰고 갔다. 신대륙 정복이 좌절되었을 뿐만 아니라, 아프리카 대륙에서의 확장도 로마 제국과 에티오피아 제국의 견제로 실패로 돌아갔다. 결국 역사대로 프랑스 대혁명이 발발, 황제 나폴레옹 역시 역사대로 등장했다.
다만 로마 제국이 동유럽 정교회권의 종주국으로 건재했기에 중부, 동부 유럽의 판세는 실제 역사와 달라졌다. 러시아는 민스크, 키예프, 노브고로드, 모스크바 등 대공국으로 갈라졌고, 바르샤바 대공국 역시 정교회 왕국으로 로마의 세력권에 들어 있었다. 마자르는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황실의 영지가 되지 않고 독립 왕국으로 남았으며, 왈라키아와 몰다비아 공국, 수오미(핀란드) 왕국 역시 로마의 세력권이다.
이 상황에서 로마 제국은 원교근공 정책을 취했다. 크로아티아를 두고 경쟁을 벌이던 오스트리아를 견제하기 위해, 나폴레옹과 손을 잡고 그에게 서로마 황제의 지위를 부여한 것이다. 덕분에 실제 역사와 달리 나폴레옹은 신성 제국의 황제로 즉위하여, 독일과 이탈리아까지 영토로 편입하는 데 성공했다. 나폴레옹은 브리튼, 에스파냐, 칼마르의 동맹을 거의 격파할 수 있었으나, 이번에는 로마의 중재로 확장을 멈추었다. 그러나 그는 신성 제국의 황제로 천수를 누리고 새로운 수도 엑스-라-샤펠(아헨)의 황궁에서 생을 마칠 수 있었다. 아들 나폴레옹 2세 역시 천수를 누리면서 ‘자유제국’의 이념을 실현, 신성 제국은 무사히 입헌군주정으로 이행했다.
콘스탄티노스 11세 이후 세계력은 서서히 서력에 가깝게 수정되어 왔는데, 이 무렵 완전히 일치하도록 개정되었다.
10. 세계대전(20세기 초, 1905~1910)
몽골 제국으로부터 독립을 쟁취한 이슬람권은, 오랜 분열을 거듭해온 종파 간 통일과 옛 이슬람 제국의 재건이라는 구호의 광풍에 휩쓸렸다. 민족 대신 종교적 통합을 내세운, 현실과는 조금 다른 형태의 네셔널리즘은 페르시아, 아라비아, 메소포타미아, 레반트, 이집트를 통합하는 거대한 제국을 출현시켰다. 이 신생 이슬람 제국은 아프리카 대륙 및 인도로의 영토 확장을 꿈꾸며 끝없는 팽창주의 정책을 펼치기 시작했다. 한편으로 로마 제국 역시 레반트와 이집트를 수복하고자 하는 야망이 있었고, 같은 크리스트교 국가인 에티오피아와 동맹을 맺고 아프리카에서의 영향력을 확장해나가고 있었다. 두 세력 간 충돌은 불가피한 일이 되었다.
아시아에서는 19세기 초 주나라가 무너졌다. 이후 크리스트교와 유가적 이상주의를 결합한 ‘태평천국’이 명나라의 자리를 대신했다. 태평천국은 베트남과 버마를 비롯한 동남아시아, 인도네시아(마자파히트), 오스트레일리아(펑라이, 봉래) 등을 식민지로 삼으며 팽창주의 정책을 펼쳤다. 장강 산업혁명을 통한 폭발적인 국력 증가는 중원의 완전한 수복을 꿈꾸는 네셔널리즘과 결합하여 고려, 몽골, 티베트, 대리, 탕구트 등 주변국가와 마찰을 빚었다.
이슬람 제국과 태평천국 사이에 동맹이 체결되었다. 자연스럽게 로마와 몽골, 그리고 이슬람 제국의 북방에 위치한 사카르토벨로(조지아), 카자흐, 호레즘, 사마르칸드, 알티샤흐르(위구르)도 이 동맹에 가담했다. 태평천국-이슬람 동맹과 몽골-로마 동맹 간의 갈등은 세계대전으로 발전하였으며, 전쟁의 결과 몽골-로마 동맹이 승리하면서 소설 속 국제정세를 형성하였다.
로마 제국은 영토를 크게 확장하여 이집트와 리비아, 튀니지 일대뿐만 아니라 메소포타미아까지 영토로 병합하였다. 신생 이슬람 제국은 붕괴하고 그 극단적 교리는 전 세계적으로 금지되었다. 세계대전의 영향에서 비껴있던 이슬람 국가들 역시 극단적 교리를 금지하라는 승전국의 압력을 받았다. 그 결과 수많은 무슬림들이 아라비아 반도의 이슬람 왕국으로 추방되었다. 현재 아라비아 칼리프국은 사실상 국경을 완전히 봉쇄당해, 외교적, 경제적으로 완전히 고립된 상태다.
태평천국 역시 붕괴하여 고려와 몽골의 분할 통치를 받고 있다. 막심한 피해를 입은 고려는 산동반도 일대를 점령하고 있으며, 그 외 중원은 북부의 키타이 울루스(칸국)와 남부의 낭키아스 울루스(칸국)가 성립되어 각각 몽골 황족의 통치를 받는다. 다이비엣(베트남), 라타나코신(타이), 버마와 마자파히트(인도네시아), 펑라이(오스트레일리아), 마닐라(필리핀) 등은 독립을 쟁취했다.
인도 무굴 제국의 경우 가장 큰 변화를 겪었다. 이슬람 제국과 태평천국 양쪽에서 공격을 받은 무굴 제국은 제정이 붕괴, 사회주의 국가로 변모했다. 현실에서 소련의 위상을 차지하고 있다. 일명 ‘바라트 사회주의 연방’은 서쪽으로는 카불, 후라산, 페르시아에서 사회주의 혁명을 지원했으며, 더 나아가 알티샤흐르, 호레즘, 사마르칸드, 티베트, 대리, 버마 등의 사회주의 세력을 지원하며 영향력을 확대해 나가고 있다.
11. 고려 제3제국(20세기 초, 1910~)
몽골과 함께 태평천국에 맞서 참전한 고려는 태평천국군의 기습적인 폭격과 상륙작전으로 인해 수도 서경(평양)이 사실상 괴멸되는 큰 피해를 입었다. 가장 큰 문제는 이때 황위계승권을 가진 황족들이 미처 피신하지 못하고 전멸했다는 점이다. 이후 전쟁의 상처를 수습한 고려는 재상인 태사(太師)가 공석인 황제를 대신해 통치하는 체제로 전환하였으며, 이를 ‘제3제국’이라 부른다.
전쟁의 여파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아, 국가의 방어를 위한 부국강병을 내세우는 파시즘이 대두하였다. 태사는 이를 적절히 이용해 황제 이상의 권력을 누리며 독재정치를 펼쳤다.
소설에서는 제3제국 초대 태사가 사망하고 조카 미리안이 태사의 자리를 승계한 상태다. 그러나 파시즘의 광풍을 등에 업은 문하시중 허동주가 차기 지도자 후보로 떠오르고, 민주주의자 불법단체인 고려민국 임시정부의 활동이 늘어나면서 여러모로 그 권력이 불안정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