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부터 집안 제사를 많이 지냈습니다. (나름 대문집 장남의 장손)
늦은 밤 제사를 지내다 축문을 읽는 시간이 되면 모두 무릎을 꿇고 앉았고, 아버지는 낮고 엄숙한 목소리로 축문을 읽었습니다.
“유세차 (維歲次)…….”
뜻을 정확히 알지는 못했지만, 그 말이 시작되면 방 안의 공기가 잠깐 달라지는 것 같았습니다.
문은 살짝 열려 있었고, 불을 끄고 뒤돌아서는 시간도 있었습니다.
어른들은 조상님들이 오셔서 음식을 드신다고 했고, 어린 저는 아주 잠깐이나마 정말 무언가가 다녀간 것 같은 착각을 하곤 했습니다.
지금은 그렇게 느끼지 않습니다만, 그래도 제사는 여전히 지내고 있고, 그때의 묘한 감각은 몸 어딘가에 남아 있습니다.
[이름을 잃은 신들의 왕국]은 그런 기억에서 시작한 이야기입니다.
우리의 제사, 축문, 지방, 이름을 부르는 방식. 그리고 세계 여러 나라의 신화와 신들, 민속신앙 속 존재들, 사람들이 두려워하거나 숭배해온 것들.
그런 것들을 한데 섞어, 잊힌 이름들과 다시 불리는 신들에 관한 이야기를 써보려 합니다.
거창한 신들의 전쟁이라기보다, 문을 조금 열어두던 밤과 식어가던 밥상과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는 일에서 시작하는 판타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