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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담

분류: 수다, 글쓴이: bard, 19년 8월, 댓글2, 읽음: 103

율리시스에서 쓰는 두 번째 글입니다. 율리시스는 소설 쓰기에 최적화된 앱이라는 말을 듣기는 했는데, 이상하게 소설보다는 “잡담”이라는 제목을 달고 쓰는 부담이 가지 않는 짧은 글이 잘 나옵니다. 왜일까요?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은 잠시 한켠에 놓아 두고, 오늘은 영화를 보기 위해 동대문 디자인플라자 안에 있는 카페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거대한 인파의 무리 속에서 작은 테이블에 앉아서 글을 적고 있자니 마치 유럽에 있는 붐비는 카페에서 일정 사이에 낀 휴식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만 같습니다. 늦여름의 하늘은 맑고 구름은 아름답습니다.

제가 오늘 보기로 한 영화는 <벌새>입니다. 이 영화를 보기로 한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는데요, 사실 하나라고 말해도 이상하지 않을 겁니다. 하나는, 영화비평가로 유명한 듀나 님이 <벌새>의 여성 서사를 칭찬해서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였는지 궁금해졌다는 게 이유입니다. 둘은, 사소한 논란이기는 하지만 왓챠에서 <벌새>에 0.5점을 준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의 프로필에 들어가 봤더니 로만 폴란스키나 김기덕, 홍상수 같은 감독들이 있어서 수준(?)을 알 만하다는 트윗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듀나 님이 리트윗하면서 자연스럽게 대결이 여성 서사 vs. 남성 서사의 대결로 흘러가고 있었던 것 같은데, 이런 논쟁에는 별다른 관심이 없어서 할 말이 없습니다. 왓챠에서 <벌새>를 찾아 들어가 봤더니 해당 코멘트가 받은 “좋아요!”의 수가 가장 많더라구요. 아무튼 볼 예정에 없던 영화였는데 오랜만에 여유로운 주말이 찾아와서 영화관에 갑니다.

소설가들이 전부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제 주변에 남은 사람들은 자신의 일에 열중하는 사람밖에 없습니다. 창업을 한 친구도 있고 전문직도 있어요. 만나서 사소한,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라 어김없이 대화의 주제가 정치, 사회, 문화, 같은 거대한 담론으로 흐르고 맙니다. 그런데 거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도 재미는 있지만 사실 거대한 이야기만 하면 생각이 쉽게 추상적으로 흘러가며 종국에는 공허해지고 맙니다. 이를테면 한국 사회의 문제들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하게 되면, 끝에 가서는 “어차피 한국 사람들은 변하지 않으니까 포기하는 게 낫다”는 식으로 말하거나, 아니면 “지도자가 문제니까 지도자를 바꾸어야 한다”는 식으로 말하기도 합니다. 저는 그런 대답이 들려 오면 이야기에 진전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벌새> 논란도 그렇고 한국 사회에 대한 비평도 그렇고, 제게는 모든 논란이 공회전을 하면서 담론의 형성이 되지 않는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사실, 모든 문제를 현명하게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란 없거든요. 영화를 보면, 특히 벌새처럼 예술 영화라고 분류되는 영화를 보고 나면, 영화의 좋은 점과 나쁜 점을 일별해서 정리해 주는 사람이 있어야 하는데 한번 논란이 되면 그런 것들이 파도 앞의 모래성처럼 사라져버리고 맙니다. 그렇게 되면 이 영화에 “좋아요!”를 찍거나 앞에서 언급한 코멘트에 “좋아요!”를 찍거나 둘 중 하나가 되어버립니다. 한국 사회에 대한 비평도 마찬가지에요. 보통 누가 한 일이 좋다는 말이 아니라 누가 한 일이 누가 했기 때문에 나쁘다는 식으로 말이 흘러가니 그 사람이 발언한 말의 내용보다는 말 이외의 상황을 평가하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말을 신뢰할 수 없는 수단으로 만든 기성 정치인의 책임도 있겠지만, 전반적으로 말보다는 누군가의 감정에 호소하는 말이 점점 더 힘을 얻게 되는 것 같습니다.

세상에 완전히 객관적인 의견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최대의 객관성이라고 해 봤자 여러 사람의 의견을 모아서 전체적인 그림을 보여주는 데 그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상호주관성이라고 말하지요. 그렇다고 해서 객관성을 포기하기에는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너무나 아깝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건 어쩌면 카페에서 영화를 기다리는 시간에도 글을 쓰는 제 심리의 문제일지도 모르겠지만(인정하지요), 조금 더 나은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욕망은 저만 가지고 있는 욕망이 아니라고 믿습니다. 대화의 묘미란 진전된 결론에 있으니까요.

ba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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