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게시판

우울한 사람이 소설을 쓰는 이유

분류: 수다, 글쓴이: stelo, 17년 3월, 댓글6, 읽음: 188

추리 소설을 쓰는 Stelo입니다.

 

저는 우울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저는 합리적으로 따져보기를 좋아합니다. 제 리뷰와 글들을 읽어오셨다면 아시겠죠. 또 우울한 이유를 분석해보기로 했어요. 왜 우울할까요? 이유는 차고 넘칩니다. 옛 기억을 떠올리기도 하고, 고통스러운 일을 겪거나, 미래가 걱정되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헌법 재판소가 발표를 했죠. 저에게도 기쁜 일이었어요. 기프티콘 알티 이벤트를 하는데, 다들 치킨을 먹습니다. 그런데 저는 채식주의자거든요. 닭이 죽는다고 생각하니까 또 답답하고 고통스럽습니다. 저는 예전에 그런 걸 보면 말을 했었어요. 힘들다고요. 하지만 “폭력적으로 채식을 강요하는 비건 나치”라는 말을 들을 뿐이었죠.

브릿G 게시판에 들어가니까, 역시 치킨절 이야기가 나왔어요. 어떻게 할까. 어떻게 할까.

저는 입을 다물기로 했었어요.

분명 좋은 기억도 있을텐데, 힘들고 아픈 이야기들만 기억에 남죠. 저를 응원해 준 분도 있었어요. 제가 채식주의자가 아니었어도 행복했을 것 같진 않아요. 다른 일들도 너무 많거든요. 세상도 인간도 복잡합니다. 한 두 가지로 정리되질 않더라고요.

 

저는 고통스러울 때면 이야기를 상상했어요. 캐릭터들을 만들고 제 일부를, 제가 만난 사람들을 집어넣어요. 다르게 할 수 없었을지 고민해보기도 하고, 상황을 바꿔보기도 해요.

지금 쓰는 추리 소설도 그렇습니다. 길고양이들이 시체로 발견됩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누가 해부를 하려고 잡아서 죽인 겁니다. 주인공은 고등학생들이에요. 누군가는 울고, 누군가는 범인을 잡으려고 추리를 합니다.

물론 이런 사건은 없었어요. 픽션이지요. 실존 인물이 등장하지도 않고요. 하지만 실제로 있었던 일들, 제가 보고 듣고 느낀 것들을 분해하고 조립한 것이긴 합니다.

제 프로필 사진에 있는 길고양이는 죽었어요. 가까운 사람의 시체를 보고, 화장하는 것도 봤죠. 울 때도 있었어요. 저는 고등학교 때 살아있는 동물을 해부해봤습니다. 저희 학교에는 의대 지망생들이 스펙을 쌓을 수 있도록 ‘생물 해부반’이 있었어요.

그래서 소설에 이런 내용이 나와요.

   주말 동안 화장을 하고 유골을 받아왔다. 2마리에 40만원이었다. 직원들도 썩은 고양이 시체는 처음이었을 것이다. 수레에 시체를 가지고 들어간다. 기계 문이 닫히고 십 몇 분을 기다린다. 작아서 그런지 시체는 금방 타버렸다. 직원이 수레를 끌고 온다. 정말 납골당은 필요하지 않으시냐고 다시 묻는다.

 

심장이 뛰는 걸 관찰하기 위해서였죠. 제가 가장 깨끗하게 심장을 도려냈어요. 애들은 사진도 찍었어요. 신기하잖아요? 범인도 당연히 고양이 심장이 뛰는 걸 보고 싶었을 거에요. 살아있는 걸로요. 그래서 죽은 닭을 해부할 수는 없어요. 죽은 거니까.”

지금 생각하면 끔찍하죠. 하지만 그게 당연했거든요. 당연한 일이었어요. 선생님도 학생들도 누구도 이상하다거나, 끔찍하다고 말하지 않았어요. 생물 해부반은 지금도 남아있습니다. 소설에 나오는 이야기를 다 할 수는 없으니까 여기서 끊을게요.

저는 굳이 말하자면 사회파 추리 소설을 써요. 고통스러운 현실 이야기죠. 디즈니 같은 해피엔딩을 약속해드릴 수는 없어요.

 

하지만 저는 고통을 싫어해요. 저는 추리 소설을 좋아하지만, 누군가 죽는 건 싫어해요. 사회파 추리소설들을 읽을 때마다 생각해요. 왜 다들 그렇게 시니컬하고 무력하냐고요. 현실을 고발하긴 하는데 아무 것도 하질 못하죠.

저는 반대에요. 현실을 바꾸고 싶었어요. 살리는 이야기를 쓰고 싶어요. 성장하는 이야기를 쓰고 싶어요. 고통을 이겨내는 이야기를 쓰고 싶어요. 그래서 제 주인공들을 움직이게 하고 있어요. 다들 무기력하게 앉아 있지 않아요. 무언가를 하죠. 결국 범인을 잡고, 진실을 밝혀내요.

다들 세상을 바꾸고, 아픔을 이겨내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저는 신화학자 캠벨이 한 이 말을 정말 좋아해요.

추악한 것이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하는 곳에서

우리는 신을 발견할 것이고

남을 죽일 수 있다고 생각하던 곳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죽일 것이며

밖으로 나간다고 생각하던 곳을 통해

우리는 우리 존재의 중심으로 들어갈 수 있을 것이고

외로우리라고 생각하던 곳에서

우리는 세계와 함께하게 될 것이다

제 소설도 그럴 거에요. 저도 그럴 거고요.

 

물론 소설을 쓰는 건 힘들어요. 저는 한 번도 습작을 발표한 적이 없어요. 별로라고 생각했거든요. 아마 저 말고도 다들 그렇게 생각하시나봐요. “내 그저그런 소설이 랭킹에 올라가다니”라고 하시더군요. 우울하신 분들도 많고요.

저도 그래요. 지금 쓰고 있는 소설도 부족해요. -랭킹에 올라갈지는 모르겠네요.- 어쨌든 만족스럽진 않아요. 쓰다보면 막히기도 합니다. 그러면 또 지치죠. 3일 동안 한 자도 안 썼습니다. 무작정 인터넷을 돌아다니면서 도망치기도 하고요.

하지만 결국 계속 쓰기로 했어요. 어제 4천자를 오늘 또 4천자를 썼어요. 내일도 쓰고 모레도 쓸 거에요. 퇴고도 하고요. 예상보다 늦어졌지만 완성하려 해요.

여러분께 처음으로 제 소설을 보여드릴 수 있으면 좋겠어요.

물론 별로겠죠. 하지만 저는 저만이 쓸 수 있는 이야기를 썼다고 생각해요. 부족하지만 앞으로 계속 성장해나가겠죠. 계속 이야기를 생각하려 해요. 돌아와서도 소설을 쓸 거에요. 이번 소설은 시작이지 마지막이 아닐 거에요. 제 인생은 아직 수 십 년도 더 남았거든요.

(그러고보니 1달 뒤면 군대에 가요. 군대에 가면 소설도 쓰기 어려울테고, 채식주의자인데 급식은 어떻게 해야하나 고민이네요. 이 고통도 언젠가 소설 소재로 써먹어야 할지…)

 

저는 지금 저를 위해 제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제가 힘드니까 글을 쓰는 거죠. 며칠 전에 리뷰를 쓰면서 이런 말을 했었어요. “남들에게 강한 사람처럼 보이려고 발버둥치면서 느꼈던 고독감”을 느꼈다고요. 글을 쓰면서 객관적인 척? 대단한 사람인 척한다는 기분이 계속 들었어요. 리뷰를 쓰면서 그 말을 하질 못했어요. 저는 강한 사람이 아니라고 말이죠.

하지만 다른 분들을 위해 쓰는 것이기도 해요. 제 글이 위로가 되면 좋겠어요. 누구나 우울할 때가 항상 있죠. 그럴 때면 “다들 괜찮은데 나만 끔찍하다”고 생각하기도 해요. 그럴 때 남들도 ‘다르지만 비슷한’ 고통을 겪고 있고, 이겨내려 노력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 위로가 되더라고요. 적어도 저는 그랬어요. 타자께서 말씀하셨듯이, “인간은 단수가 아니”니까요.

 

긴 이야기를 횡설수설 늘어놓았네요.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마지막으로 질문을 드릴게요. 소설을 쓸 때 무엇이 두려우세요? 두려움을 이겨내고 계신가요? 아직 실패하고 계셔도 괜찮아요. 저도 실패하고 있거든요.

stelo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