큐레이션에 대한 기대:한국에서 장르 단편소설을 판다는 것
큐레이션 페이지가 추가된걸 보고 예전에 생각했던 아이디어가 떠올랐습니다. 저는 웹 공간에서 단편소설도 연재소설처럼 수익을 올릴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큐레이션처럼(그때는 앤솔러지처럼이라고 생각했습니다만) 작품을 선별할 수 있는 인원이 작품집을 꾸릴 수 있는 공간이 있으면 좋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게 있다면 분명 장르 단편소설로도 먹고 살 수 있는 작가들이 생길거라고요.
저는 단편소설을 좋아합니다. 좋은 앤솔러지(또는 작가 단편선집)는 작가끼리 자존심을 건드릴 수 있다는 이유로 작가 이름을 가나다 순서대로 줄을 세워 책에 채워넣지 않죠. 몰입하기 쉬운 작품을 제일 처음에, 그리고 여운이 남는 작품을 가장 마지막에, 표제작은 3/4 정도 지점에, 보통 제일 재미있는 작품은 첫번째나 표제작이 되죠. 서로 다른 작품들을 모아 하나의 책으로 엮는다는건 편집에 대한 이해와 더불어 그 장르에 대한 안목 가지고 있다는 걸 증명하고, 각각 떨어진 작품을 더 큰 주제 아래 하나로 묶는 시도입니다. 관록이 묻어나는 편집자나 비평가가 묶은 좋은 단편집(특히나 앤솔러지나 선집처럼 작가가 슬럼프에 빠지거나 자기반복하는 등 컨디션이 나빴던 시기의 작품 같은 게 들어있지 않은 것들은)은 빈틈없이 금괴가 들어간 궤짝 같은거죠.
그렇지만 웹에서는 이런 단편집을 찾을 수 없습니다. 단편집은 고사하고 단편소설도 찾기 힘들죠. 큰 포털 사이트 구석에 있는 작은 카페나, 운영이 정지되고 호스팅 비용이 언제 거덜날지 모르는 작은 소설홈페이지, 큰 웹연재 사이트에서 겉치례로 만들어놓은 단편란, 이따금 소설을 쓰는 이들의 블로그와 SNS… 등에 파편화되어 뿌려져 있습니다. 제가 아는 한 단편이 가장 많이 올라오는 사이트는 fangal.org/freenovel 과 환상문학웹진 거울 입니다. 그러던 차에 브릿G가 생기고 더불어 타자 님이 감상을 하신다는 이야기가 나오면서 많은 사람들이 꿍쳐뒀던 단편을 올리고 있긴 합니다(도배는 죄송합니다)만 그리 많다고 보기는 힘듭니다. 특히나 최근에 흥하고 있는 인터넷 연재소설에 비하자면요. 하지만 이런 상황이라고해서 좋은 단편이 존재하지 않거나 존재할 수 없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단편을 써왔던 장르 작가들은 꾸준히 두각을 보이며 작품 활동을 해왔으니까요. 그리고 해외의 유수의 장르 단편집이 국내에 번역되었고 읽어본 사람들은 장르 단편이 줄 수 있는 재미의 저력을 충분히 알고 있죠. 한국이라고해서 못할 건 없습니다.
해외와 비교해봤을 때 한국 장르 단편의 풀이 크지 않은 것은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한국에서 단편을 읽는 사람들은 대개 문단 내부에 있고, 장르 문법에 의해 쓰인 단편은 문단에서 (잘) 받아들여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제가 아는 한 장르 단편소설을 계속 쓰고 출판하는 작가는 한국에 SF 작가 서넛과 추리소설 작가 둘셋 정도입니다. 저는 잘 모르겠지만 로맨스의 경우도 권단위 장편소설 위주지 단편은 크게 취급하지 않는 것으로 압니다. 비정기적이라도 장르 단편집이 계속 나오는 곳은 황금가지, 온우주, 에픽로그, 크로스로드를 제외하면 없습니다. 풀이 작으면 좋은 작품도 적죠.
하지만 제 생각은 이렇습니다. 한국 장르 단편 풀의 절대치가 크지는 않겠지만, 현재 이 시장이 ‘유난히’ 협소한 이유는 이런 작품들이 모일 공간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어딘가에 좋은 작품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크게 흩어져 있으니 찾아 읽으려고 해도 읽을 수가 없는거죠. 이 문제는 완전 해결되지는 않더라도 시간이 지나면 어느 정도는 해소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브릿G가 단편을 위한 노력도 하겠다고 한 이상, 곳곳의 장르 단편들은 수익을 기대할 수 없는 다른 플랫폼이 아닌 브릿G로 올테니까요. 일단 올 수 있는만큼은 오겠죠.
문제는 다음입니다. 단편이 있다고해서 사람들이 읽고, 거기에 돈을 내는건 다른 문제입니다. 단편이 소위 ‘돈이 안 되는 이유’는 단편 그 자체가 가지는 속성에 있으니까요. 1) 문장의 밀도가 연재소설보다 높아서 읽는데 더 집중이 필요하고 2) 이야기가 이어지지 않아서 무척 짧습니다. 독자들은 돈을 더 내더라도 더 많은 이야기를 읽고 싶어하죠. 사실 작품이 읽기 쉽고 분량이 아쉽지 않으면 접근도가 더 오르고 더 많은 사람이 삽니다. 그러기 위해선 일단 작가들의 노력이 필요합니다. 저는 현재 장르 단편 시장은 구태여 ‘팔리기 위한 노력’이 없는 시장이라고 생각해요. 어차피 안 팔리니까 그냥 쓰고 소수의 마니아들이 읽어주길 바라는거죠. 하지만 이 문제는 작가들의 임무라고 생각합니다.
이야기가 조금 길어졌는데 지금부터가 본론입니다. 후에 시간이 지나서 자연스럽게 팔릴만한 단편소설들(시장성 있는 작품군)도 있고, 브릿G에 그걸 사줄 충분한 독자들도 있다고 가정하면, 다음 문제가 생깁니다. 독자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단편소설이 어디있는지를 모른다는거죠.
이 시점이 온다면 작품 큐레이션은 대단히 중요해질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큐레이션을 꾸리는 큐레이터도 그만큼 중요해지겠죠. 저는 결과적으로 큐레이터가 브릿G 내부의 글들을 정리하고 취합해 앤솔러지처럼 작은 출판사의 역할을 할 거라고 생각해요. 리뷰도 하고 광고도 대신해주는거죠. 그러면 독자들은 신용하고 알려진 큐레이터의 큐레이션에서 재미있는 작품만 찾아 읽을 수 있게 되는 겁니다(스터전의 법칙에 따라 정말 좋은 10%만 독자들에게 노출되는 거죠). 물론 제 생각에 큐레이터는 그를 통한 수익을 얻을 수 있어야하고, 어쩌면 전문적으로 고용될 정도로 숙련되고 그 일에 열의를 보일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고도 생각해요. 구태여 비교하자면 문단의 비평가 역할을 장르소설에선 이들이 할 수 있어야합니다. 하지만 제한된 문예지 지면이 아니라 브릿G와 같은 웹공간을 포함해 유튜브 같은 다양한 컨텐츠를 보여줄 수 있는 공간에서 활동할 수 있는 인재들이어야 한다고 봐요.
저는 지금까지 장르소설계에서 이런 종류의 사람이 나올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지만, 황금가지가 브릿G를 만들고 큐레이션이라는 시도를 보여준만큼 이런 형태의 시스템도 나타날 수 있다고 생각해요. 구체적으로 어떤 시스템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장르 단편소설을 써서 먹고 살 수 있는 작가들이 존재하게 된다면 좋을 거 같다고 생각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현재 웹소설, 연재소설들을 좋지 않은 눈으로 보는 거 같지만 저는 아주 많이 긍정적으로 보고 있습니다. 장르 연재소설의 성공이 곧 장르 단편소설의 성공은 아니지만, 아주 작은 가능성을 보여주고는 있는거죠.
이런 날이 오지 않을 수도 있어요. 브릿G에 절대적인 사람의 숫자가 부족하면 아무리 좋은 시스템이 마련되어도 사람들이 오지 않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좋은 것을 원하지만 구태여 찾아다니진 않으니까요. 하지만 브릿G가 가진 잠재력이라면 조금은 희망을 걸어볼만 한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