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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에 한 달 간 미친 짓을 해본 적이 있습니다.

글쓴이: 천가을, 17년 2월, 댓글12, 읽음: 167

작년 10월 말이었을 겁니다, 제가 한창 대학 면접 보기 위해 전국을 돌아다니고 수능 공부도 해야 했었으니까요. 도저히 공부가 하기 싫었던 저는 미친 척하고 소설을 마구 써보자고 결심했어요. 그래서 묵혀뒀던 초대장으로 티스토리 블로그도 만들고, 하루에 한 편씩 단편소설을 써보는 무모한 도전을 했어요. 도전 처음에는 막막했지만 가면 갈 수록 점점 즐거웠습니다. 스스로 “당일 자정”이라는 마감 시간을 지키니까 그것이 오히려 모티베이션이 되기도 하더라고요.

그렇게 37일 동안, 심지어 수능 날에도 빠짐없이 단편을 썼던 저는, 하지만 솔직히 말하면 이것이 과연 잘했던 짓일까 아직도 고민을 많이 하고 있어요. 우선 즐거운 ‘취미’여야 했을 글 쓰기가 한동안 즐겁지 않았습니다. 예상하셨겠지만, 도전이 37일 만에 끝나버린 건 가면 갈 수록 떨어지는 단편의 질 때문이었습니다. 특히 마지막에서 두 번째와 세 번째 단편은 저초자도 “그냥 올리지 말까”하고 생각할 정도로 형편 없었습니다. 소재는 점점 고갈되고, 더 좋은 소설을 써야 한다는 압박감은 증가하고, 스스로를 옭아매다 보니 정신적으로도 힘들었습니다.

웃긴 건 “도전 종료”를 선언한 다음 날 단편을 무려 세 편이나 완성했다는 점이죠.

37일 간의 도전이 남기고 간 건 그것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아시다시피 단편을 쓸 때 소재를 구상하는 건 꽤 힘들지만 그래도 대략적인 이미지를 잡는 건 가능합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건 그 소재를 어떻게 요리하냐죠. 안타깝게도 하루, 그것도 자는 시간과 학교 시간, 그리고 그 외의 공부하는 시간을 제외한 시간 동안 단편을 하나 완성해야 했던 저는 소재에 대한 “깊은 고찰”이 불가능했습니다. 어떤 소재에 대한 중심적인 이미지, 그리고 그것을 풀어갈 대략적인 플롯이 잡히면 바로 써내려 갔죠.

그래서 가끔 단편에 댓글이 달리면 기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불안했습니다. 왜냐하면 어떤 댓글은 읽다보면 독자 분이 같은 소재에 대해서 더 깊고 많이 생각을 했다는 것이 느껴지거든요. 그러면 제 사고의 얕음이 드러난 건 아닐까 하고 부끄러웠습니다. 더 깊게 생각한 독자 분이 부럽기도 했죠. 하지만 어쩌겠어요, 그건 독서도, 경험도, 상식도, 그리고 시간도 부족한 제 잘못이죠. 아뇨, 아무래도 변명에 불과하지만요.

문제는 37일 동안 길면서 짧은 도전 이후에도 “얕은 고찰”은 사라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이냐면, 어느새 ‘단숨에 써내려가기’가 제 습관이 되어버렸습니다. 물론 단숨에 써내려가는 작가 분들 중에서도 충분히 깊이 생각한 후에 쓰시는 분들도 계시겠죠. 하지만 저는 그러지 못했습니다. 충분히 많이 생각했다 싶어도 다시 읽어보면 결국 제가 무슨 생각을 한 건지 알 수 없는 그런 단편들도 많았습니다. (사실 이 글도 깊은 생각 없이 아무렇게나 써내려가고 있는 글입니다.) 차차 고쳐야 할 습관이겠지만, 안 그래도 소재마저 생각나지 않는 요즘 억지로 글 쓰는 습관을 고치려니 너무 힘드네요.

정신 없이 썼지만, 결국 하고 싶었던 건 단순한 한풀이었습니다. 물론 37일 동안 미친 듯이 쓰기만 하니까 글 실력이 늘긴 합니다. (전 잘 모르겠는데 제 친구 분이 늘었다고 해주셨어요.) 예전에 썼던 글들에서 고쳐야 할 부분들도 한층 더 수월하게 찾아낼 수 있게 됐어요. 그 부분을 어떻게 고쳐야 하는 지는 아직 잘 모르겠지만, 대부분의 경우는 그냥 지워도 상관 없더군요. 그래서 저는 한 달 간의 미친 짓이 결코 헛된 짓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얻는 것만큼 잃는 것도 꽤 있었다고 생각해요. 무작정 연습하기란 게 반드시 올바른 길이라는 게 아니란 것도 느꼈고요.

요즘은 대학 새내기 오리엔테이션 때문에 한동안 쓰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오리엔테이션이 끝난 뒤에는 놀랍게도 소재가 전혀 떠오르지 않아 이렇게 이상한 글만 쓰고 있고요. 37일의 마지막 날만큼이나 정신적으로도 피곤했어요. 제가 걸어온 길이 옳은 길인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전 글에 재능이 있는 게 아닐 지도 모릅니다, 다른 재능이 있는데 괜히 이 길로 왔다가 재능을 썩히고 있는 걸 지도 모르고요. (애초에 제가 소설을 쓰기 시작한 건 그나마 관심 받을 수 있는 방법 중 가장 만만할 것 같다는 착각 때문이었습니다.)

아마 한동안은 새로운 작품을 쓰는 게 힘들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쓸데없는 글로라도 한 번 얼굴 비추고 가보고 싶었어요. 이상한 글을 끝까지 읽어주신 분들, 감사합니다. 언젠간 다시 돌아올게요. 재밌고 새로운 작품 들고.

 

p.s. 하루에 한 편 썼던 단편들은 아직 제 블로그에서 “단편 소설 > 하루에 한 편 글쓰기”에 있습니다. 흠, 누구에게 자랑스럽게 보여줄 만한 글들은 아니지만, 궁금해 하시는 분들이 있을까 해서 남겨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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