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테인을 삼킨 후 이상한 게 보이기 시작했다
신분을 위장하고 이 조직에 잠입한 지 2년 째. 볼펜이나 믹스커피 따위 비품 횡령, 근무 시간 중 인터넷 쇼핑, 공용 프린터로 사적인 문서 출력, 과도한 업무 지시 때마다 그건 좀 어렵겠다고 말해서 부서 내 근무 의욕 저하시키기 등 다양한 사보타주 임무를 훌륭히 이행했으나 조직은 와해되지 않았고, 브릿G는 실패한 요원을 폐기처분 하기로 했다. 이 캡슐을 삼키면 내 임무와 나의 존재는 영영 암흑 속으로 사라지고 말겠지. 평범한 루테인 알약 캡슐처럼 보이는 독극물 캡슐이라니. 역시 세계 최고의 비밀정보국 브릿G의 암살 방식은 기발하군.
이럴 수가. 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거지? 한번 더 기회를 주겠다는 마지막 배려인가? 아님조직에서 나를 보호해 주지 못해 미안하다는 사과일까? 냉혹하기 그지없는 브릿G가 그럴 리가. ‘실수는 병가지상사’니까 건강 챙겨가며 앞으로 잘 하라는 격려일까? 그러기엔 타이밍이 너무 안 맞는다. 내가 요원이 된 이후로 요즘처럼 눈이 촉촉한 적이 없다. ‘눈물이 차 올라서 고갤 들어. 흐르지 못 하게 더 활짝’ 웃느라고 항상 눈에 눈물이 고여 있으니까. 아니면, 이 한 병에 들어있는 30개의 캡슐 중에 1개만 독극물인가? 복불복이라니. 역시 ‘우리가 타락한 이유’ 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데니스 루테인 요원 답군. 이래야 내 라이벌이지.
아니, 설마 진짜로 독극물이었나? 왜 환시가…! 김 대리가 줄타는 광대로 보이는데? 브릿G! 대체 나에게 무슨 짓을 한 거지! 정 과장도, 이 주임도…혹시 내가 타인의 전생을 보게 된 건가? 김 대리, 라인을 잘 타더니 역시 전생에서도 줄타는 광대였군. 보자 보자 어디 보자…유 부장 전생은 환관이군. 요새 탈모 때문에 고민이라더니. 거세하면 남성 호르몬이 줄어들어서 탈모도 안 오고 오래 산다고 했는데.
내 전생은 이완용 아닐까. 전생에 나라를 팔아먹지 않고서야 현생이 이렇게 꼬일 리 없다. 이완용은 약하고, 중국 대륙 정도는 팔아먹었을 것 같긴 한데…오 마이갓! 주여, 인샬라. 웬 스님이…그래서 내가 지금 술과 고기에 환장하는 모태솔로인 건가. 법명은…’분노를 두드린다’는 ‘타노’로 하자. 타노스님 멋지네. 손가락 좀 튕길 것 같고.
유 부장은, 아니 환관은 내게 후궁의 회임을 기도해 달라고 청했다가 썩 물러가라는 호통만 듣고 이를 갈며 돌아더니 앙심을 품었는지 내세에서까지 나에게 복수하고 있다. 그런 건 삼신할매한테 갔어야지. 왜 중생을 구제할 스님한테 일신의 영달을 구하냐고. 하여튼 예나 지금이나 부당한 업무지시나 하고 말이야. 이렇게 악연이 이어질 줄 알았으면 호통치지 말고 잘 구슬려서 보냈어야 했는데. 이렇게 현생에서 만날 줄 알았으면 전생에서라도 호통으로 끝내지 말고 쌍시옷으로 욕했어야 했는데…스님, 진정하세요.
전생에서도 암자에서 면벽수행을 했는데 현생에서도 하루 종일 복도 벽만 보는 심문을 받고 있다. 조직이 나를 의심해서 책상을 복도에 내놓고 날 고립시키고 미치게 한다 해도 내가 브릿G의 정체를 누설할 것 같은가! 전생에서 면벽수행으로 모자라서 묵언수행도 했었나. 복도를 오가는 누구도 내게 말을 걸지 않는다.
노조를 만들었거나, 비리를 내부 고발했거나, 프로젝트를 거하게 말아먹었으면 억울하지나 않지. 일 잘하는 2030 직원들 뽑아다가 1020 소비자를 잡아보겠다고 만든 TF의 리더가 회장님 아들이었는데, 이 도련님이 자기의 분노조절장애를 업무열정으로 착각하시는 분이셨다. 강남에서 명품 휘감고 살다가 유학 갔다 와서 아버지 회사에 평사원으로 입사해서2년 만에 임원 달고 기분전환 삼아 해외여행 가는 게 평균적인 20대의 삶인 줄 아는 리더님께옵서, TF가 평범한 1020 소비자에게 먹힐 서비스를 내놓기만 하면 그거 아니라고 버럭 대는 회의를 들어갔는데, 그 날따라 너무 바빠서 회의 전에 인공눈물도 점안하질 못했다. 눈이 뻑뻑해서 잠깐 감았다 떴는데, 리더님과 눈이 딱 마주쳤다. 조는 거 아니라고, 요새 모니터를 오래 봐서 눈이 건조하다고 공손하게 말씀드렸더니, 저 새끼 모니터 뺏고 책상도 빼라고 하셔서 복도에서 석고대죄를 하게 된 거다. 전생에서도 지 기분 잡치게 했다고 아무나 목 치는 폭군이더니, 현생에서도 잘 처먹고 잘 사네.
회의도 없고 야근도 없고 매일 정시 출퇴근하니까 고양이만 신났다. 얘는 전생에 혹시 경국지색 절세미녀 아니었을까.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예쁠 리가 없는데, 얘가 내 심장을 찔러 죽였다.전생에 죄를 지으면 내세에 짐승으로 태어난다더니. 이래서 얠 볼 때마다 내가 심쿵사 하는 거였다. 고양이는 무릎에 올라 앉으며 “니야아(췟 들켰군)냐앙(츄르나 짜라)” 했다. 그래, 사무직이 이 불경기에 어디로 이직하겠니. 더러워도 빡쳐도 나는 안 울어. 참고 참고 또 참지 울긴 왜 울어. 하루에 8시간 벽만 봐도 월급을 주는데. 월급을 받아야 언니가 너 장난감이랑 간식 사 주지.
복도에 앉아서 오가는 직원들을 보며 전생의 원수나 찾아 보기로 했다. 전생의 원수가 현생의 부부로 만난다니까. 날 벽 보듯 하던 직원들은 내가 자기네들을 빤히 보니까 시선을 피했다.
전생의 어느 날, 부장 새끼, 아니 환관이 이번엔 후궁을 데려 왔다. 보랏빛 비단 치마를 입은 후궁은 시녀도 없이 혼자 득남 기도를 드리러 왔다고 했다. 환관이 돌아가고, 후궁은 내 옆에 앉아 하루 종일 말없이 나와 함께 벽을 봤다. 흰 벽이 치마폭처럼 보랏빛 노을색으로 물들 때에서야 후궁이 말을 걸었다.
“무엇을 깨달으셨습니까.”
“마음이 지옥이면, 세상이 다 지옥이라는 것.”
“종일 벽을 보며 무슨 생각 하십니까.”
“강제로 내 머리를 깎고, 이 궁벽한 암자로 보낸 자들이 벌 받는 지옥도를 벽에 그립니다. 마마께서는 어쩌다가.”
“곤궁한 집안에서 용모가 곱거나 재주가 많으면 높으신 분의 눈에 들었다가 내쳐지는 노리개가 되는 법이지요.”
밤이 되어 벽이 보이지 않자 후궁은 내 이불 속에 누웠다.
“홀로 절에 들어 가 기원하면 회임을 한다는 게 무슨 의미겠습니까.”
“후회하지 않겠습니까. 언젠가 제가 더 큰 화를 당할 때에 연루된다면.”
“한 줄의 포승에 같이 묶일 수 있다면 마다하지 않겠습니다.”
“이불 속에 몸 누이실 자리를 내어 드리지요. 마음 한 켠만 비워 주십시오.”
우리는 한 계절을 함께 살았다. 나는 그 동안 머리를 깎지 않았다. 후궁은 흰 벽에 사계절을 그렸다.
“봄에 발 밑에 제비꽃 굽어볼 때, 여름에 포도알에 침이 고일 때,가을에 들국화 애처로울 때, 겨울에 고구마에 손 데울 때 저인 듯 여겨주세요.”
백 일째가 되는 날, 후궁의 손을 잡았다.
“기도에도 아기가 생기지 않았으니, 또 백 일을 머물러 오시겠습니까.”
“그것은 제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궁에 있는 사람은 벽을 보라면 보고, 머리를 조아리라면 조아리고, 출궁하라면 해야합니다.”
“그렇다면 암자를, 궁을 벗어나면 어떻겠습니까.”
“어디로 가야 합니까.”
“보랏빛 다리를 건너면 신선이 산다는 자하가 있다고 합니다. 거기서 나는 글을 쓰고, 그대는 그림을 그립시다.”
다리를 건너기 전에 추격자들이 따라 붙었다.
“그대의 체취가 밴 옷을 주십시오. 여기서 헤어지더라도 추억이자 증표로 간직할 수 있게.”
보랏빛 치마를 입고, 추격자들을 따돌렸다. 내 얼굴을 확인한 추격자가 단번에 내 목숨을 끊었다. ‘죄송합니다’ 그가 입모양으로 말했다. 나도 눈으로 말했다. ‘너 다음 생에 우리 집 고양이로 태어나면 간식 안 줄 거야. 그리고,’…전생의 나새끼야, 이렇게 금방 죽으면 어쩌냐! 뒷말을 마저 해야지! 유언이 왜 저따위야!
“종일 벽을 보며 무슨 생각하세요?”
“절 여기로 보낸 사람들이 벌 받는 지옥을 상상하는데요.”
“복도가 좀 춥네요.”
내가 벽만 보고 있던 후로 처음으로 내게 말을 건 사람이 입고 있던 보라색 카디건을 벗어 걸쳐 주었다. 낯설지 않은 향수 냄새가 났다.
“루테인 한 알 먹어도 되죠? 제가 드린 거니까.”
“그거 브릿G에서 받은 거예요.”
“제가 여기 놓아두고 간 거 맞아요. 브릿G 당첨자 명단에 ‘한켠’은 없을 걸요? 확인해 보세요.”
“제가 브릿G에서 그런 필명으로 글 쓰는 거 어떻게 아셨어요?”
그 사람은 빙긋 웃으며 루테인 약병에 슥슥 제비꽃과 포도와 들국화와 고구마를 그렸다.
“근데 이렇게 얘기해도 되요? 저랑 엮이면 별로 안 좋을 텐데요.”
그 사람이 의자를 들고 나왔다.
“같이 묶일 수 있다면 마다하지 않으려고요. 자리 좀 내어 주세요. 저는 마음 한 켠을 내어 드릴게요.”
우리는 또 함께 벽을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