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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먼 옛날, 재미있는 이야기꾼이 있었어요.

분류: 수다, 글쓴이: 후안, 18년 10월, 댓글4, 읽음: 135

아주 먼 옛날, 황금색 가지들이 죽 뻗은 보라색 다리를 건너면 재미있는 이야기꾼을 만날 수 있다는 소문이 자자했어요. 사람들은 별 기대도 없이 이야기꾼의 이야기들을 재미삼아 들었죠. 찰진 대사들과 적나라한 화법에 모두는 놀랐고, 기대 이상의 수확을 얻은 기분으로 돌아가, 주변 사람들에게 재미있는 놈이 하나 있는데 하며 건너 건너 소개를 했답니다.

이야기꾼의 이름은 [후안]이었어요. 사실 이야기꾼은 젊은 시절 왕궁에서 난다 긴다 하는 사람들이랑 어울려 재롱을 떨었던 적이 있지요. 하지만 그들보다 재능이 떨어지는 걸 느끼며, 회의감에 젖어 입을 멈췄죠. 팔 년이 지나 우연히 보라색 다리를 건너다가 황금색 가지들과 보라색 다리가 어울러진 그 묘한 아름다움에 홀려, 문득 너무 아까웠던 시간이야, 아직 끝나지 않았어라 생각하고 우연히 만난 나그네에게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나 들려줬던 게, 소문에 소문이나 사람들이 찾아오게 된 거에요. 이야기꾼은 흥이 나 연실 입을 열어 주절댔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이야기꾼은 원인 모를 두통이 찾아오는 걸 느꼈어요. 용하다는 의원에 가도 좋다는 약을 사먹어도 두통은 사라지지 않았어요. 눈가가 욱신거리고, 눈알이 뻑뻑해서 오는 통증이라고들 하지만, 이야기꾼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어요. 이러다 낫겠지. 하지만 통증은 점점 커졌고, 이야기꾼은 이제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 줄 힘조차 나지 않았어요. 사람들은 계속 찾아왔지만 모두는 헛걸음을 하기 일쑤였죠. 이야기꾼은 자신에 대한 실망에 모든 일을 접어두고 방구석에 움츠려 앉아 멍만 때리기 시작했고, 점점 흐려지는 시야를 두려워하며 통증이 어서 가기만을 빌었어요. 점차 어둠이 가까워졌고, 이야기꾼은 모든 걸 증오하며 그동안 너무 무섭고 잔인하고 흉포해서 내놓지 않았던 이야기들을 미친 듯이 노트에 끼적이기 시작했어요. 왜냐면, 들렸거든요. 이제 거의 앞이 보이지 않았던 이야기꾼의 귓가에, 누군가 계속 속삭였어요. 어둠과 광기, 분노와 증오에 대해서. 그게 누군지는 중요치 않았죠. 하지만 쉽게 설명하라면, 악마의 속삭임이라 할 수 있겠죠.

계속 이야기를 써내려가던 이야기꾼은 가장 무섭고 소름 끼치는 이야기를 모아 하나의 긴 이야기를 완성했어요. 끔찍하고 무섭고 적나라한 이야기를 완성한 이야기꾼은 광기어린 웃음으로 노트를 갈기갈기 찢어댔어요. 아름다움은 이제 보이지 않으니, 알 수 없다 생각했어요. 영원히 그가 아름다움을 볼 수는 없다고 생각하니, 악마 같은 이야기만 떠올리게 된 거죠.

그렇게 지내던 어느 날, 이번에는 처음 듣는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어요. 눈이 아파 보이지 않으니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었죠. 계속 속삭였어요. 그렇게 화만 내다보면 느낄 수 있는 것도 느끼지 못 하게 될 뿐이야. 아름다움은 꼭 볼 수 있어야 느끼는 게 아니야. 이야기꾼은 대답했어요.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난 이제 볼 수 없어. 보이는 건 어둠뿐이야. 그래서 어둠에 관련 된 이야기만 떠오른다고.”

“가장 아름다운 물이 뭐지?”

뜬금없는 질문에 이야기꾼은 당황했지만, 바로 떠오른 건 바로, 그 영롱한 황금색 자태를 자랑하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술인, 미액주(美液酒)였어요.

“넌 그걸 마셔봤니?”

그렇게 아름다운 술을 어떻게 마셔요! 하지만 이미 천사 같은 목소리에 홀린 이야기꾼은, 그를 잊지 않고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부탁해서 한 잔의 미액주를 겨우 얻는 데 성공했어요. 꿀꺽 마셨죠. 그리고 찾아오는, 맛의 아름다움.

“그것 봐. 아름다움은 꼭 보이지 않아도, 어디에서나 느낄 수 있는 거야.”

이야기꾼은 행복했어요. 하나 둘 어디서든 아름다움을 찾아내기 시작했어요. 들려오는 풍경 소리, 향긋한 꽃향기, 아이들의 웃음소리, 고양이의 기댐.

어둡고 절망적인 이야기만 떠올랐던 그의 머릿속에 밝고 맑은 이야기들이 들이차기 시작했어요. 이야기꾼은 새로운 노트를 들어 행복한 이야기들을 쓰기 시작했어요. 물론 처음에는 그동안의 습관 때문에 어두운 색깔이 많이 묻어났지만, 귀여운 이야기가 드디어 완성되고, 이야기꾼은 여전히 듬성듬성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모처럼 모습을 드러내 예전처럼 재롱을 떨며 들려주기 시작했어요. 반응은 폭발적이었어요!

더군다나 모두가 행복한 이야기를 좋아하는 건 아닌지, 이야기꾼이 절망에 빠져 끼적인 어둠의 이야기도 만족해하는 이들이 늘어났어요.

다리를 건너면 재미있는 이야기꾼이 있다네.

[후안]이라는 그 친구는 무시무시한 이야기를 할 때는 [엄성용]이라는 가면을 쓰고, 재밌고 즐거운 이야기를 할 때는 [매도쿠라]라는 가면을 쓰고 연기한다네.

들어 봐. 찾아간 보람이 있을거라구.

 

이야기꾼은 다시 행복해졌어요. 그렇지만 눈가의 통증과 여전히 어둑하기 만한 시야는 고통이었죠. 그런데, 마침 찾아 와 이야기를 듣고 가려던 보라색 다리의 관리관이 귀띔을 해줬어요.

 

“왕궁에서, 신비의 물약 루텐을 상품으로 재미있는 자기소개 대회를 한다하네.”

 

루텐의 명성은 이미 알고 있었어요. 이야기꾼은 다짐했어요. 꼭, 그 신비의 물약을 얻기로.

봇짐을 차려 어깨에 짊어지고, 이야기꾼은 다리를 건너기 시작했어요.

팔 년의 시간동안 숨어있던 자신을 다시 드러낼 수 있게 해준, 황금색으로 빛나는 가지들이 가득한 영롱한 보랏빛 다리의 풍경을 보기 위해서.

 

 

ps. 칠전팔기의 심정으로…

후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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