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장을 위한 리뷰인가? (장문)
요즘 리뷰 게시판에서 글을 쓰는 Stelo(별)입니다. 저는 글을 쓰시는 작가분들과, 리뷰어분들, 그리고 브릿G를 위해 고생하시는 운영진분들을 위해 키보드를 잡았습니다.
피드백은 자존감을 깎아내리는가?
저는 원래 TRPG를 주로 해왔습니다. TRPG는 사람들이 모여서 이야기를 만드는 게임입니다. 컴퓨터 RPG의 원조지요. 이영도 작가님의 [드래곤 라자]도 TRPG인 [디앤디]의 세계관을 차용해 쓰였습니다. TRPG는 소설 쓰기와 비슷한 면이 있습니다.
TRPG를 하는 사람들은 인터넷 소설가도 있고, 만화가도 있고, 게임 기획자도 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은 평범한 사람입니다. 이야기라고는 만들어 본 적도 없는 사람들이 이야기를 만들어야 합니다.
그런데 TRPG에는 중요한 관례가 있습니다. 플레이가 끝나면 피드백을 해야합니다. TRPG를 더 잘하기 위해서요. 당연히 옆의 존잘과 평범한 사람을 비교하게 됩니다. 종종 비판적인 분위기가 만들어지기도 합니다.
“캐릭터가 너무 수동적이네요.” “묘사가 빈약하네요.” “개성은 없고 클리셰 뿐이네요.”
어디서 많이 들어보신 것 같지 않나요? 마치 소설 습작생에게 달리는 댓글과도 같습니다. 물론 욕을 하진 않았습니다. 흔히 “비난은 물론 잘못이지만, 비판은 필요하다.”고 하죠. 여기에 문제는 없어보입니다.
하지만 제가 관찰해온 바에 따르면… 비판은 사실이라 해도 자존감을 갉아먹습니다. 피드백을 하면 이런 반응이 돌아오거든요.
“제가 초보자라서요.” “제가 실력이 부족해서요.” “제가 룰 북을 안 읽어서요…” “제가 이야기를 만드는 게 어려워서…” “저랑 안맞나봐요.”
이상하지 않나요? 적어도 저는 이상한 대답이라 생각합니다. 왠지 동문서답 같거든요. 당장 이렇게 여백을 채워보면 어떨까요.
A : “b가 말이 없었죠. 이름도 기억이 안나요. 캐릭터가 수동적이었다고 생각해요. (고로 당신은 실력도 없는 쓰레기입니다.)”
B : “(저는 쓰레기가 아니에요. 단지) 초보자라서 아직 어렵네요.”
A가 정말 그런 의도로 말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B가 성장했으면 해서 ‘쓴 약’을 줬을지도 모르죠. 하지만 B는 그 말을 공격적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자기 방어를 하게 되는 거죠.
“졸문이지만…”
물론 사회 분위기가 있으니, 당장은 괜찮다고 말하는 분도 있습니다. “피드백 감사합니다. 앞으로 더 열심히 노력하겠다”는 식이죠.
그런데 제 관찰에 따르면 이 분들도 결국 자존감이 나락으로 떨어집니다. 우울트를 쓰시는 건 기본이고요. 저에게 상담을 해달라고 찾아오시는 분도 있습니다. 저는 그런 분을 수 십 분도 넘게 만났습니다.
기이한 문화도 생겼습니다. 비판을 듣기 전에 예방을 합니다. 미리 자기 비하를 해두는 거죠.
“초보자 노잼 주의.” “자작 시나리오라 많이 부족할 수 있어요” “저 엄청 못해요. 플레이하시면 실망하실 거에요…”
제가 지나치게 걱정을 하는 걸까요? 하지만 잊을만 하면, 플레이어 실력 부족을 탓하는 글이 올라옵니다.
“몇몇 사람들의 실력부족과 이에 대한 게으름은 다른 사람의 시간을 빼았는 것으로 피해를 줍니다.”
이런 이야기는 많은 지지를 받습니다. 물론 이분들은 “재능”이 아니라 “게으름”을 비판하는 거라고 말을 바꿉니다. 적어도 “최소한의 노력도 하지 않는 사람들” 말이죠. 그런데 그 사람들은 얼마나 연습했는지 시간을 재보고 말하는 게 아닙니다. 이 사람이 TRPG를 못하니까 화가 나는 거죠.
TRPG는 놀이입니다. 원래 아마추어들이 하는 거죠. 그런데도 이렇게 압박을 받습니다.
그렇다면 소설은 어떨까요? “졸문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라는 겸손?한 글들을 볼 때마다 생각합니다. 더 심할지도 모르겠다고요.
비평은 작가가 성장하는데 도움이 되는가? 아니면 방해하는가?
매서운 ‘비판’은 흔히 작가를 성장시키기 위해서라고 말합니다. 재미있었다고 좋은 말만 들어서 도움이 되겠느냐? 때로는 죽창이 필요하다고 말이죠.
저도 더 좋은 글을 쓰기 위해서는 ‘피드백’이 필요하다는데 동의합니다. 하지만 평범한 사람들이 생각하는 ‘노력’이나 냉정한 ‘비판’은 오히려 독이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자존감을 갉아먹고 성과를 떨어트리죠.
개인적인 의견이 전부는 아닙니다. 저는 과학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근거들을 가지고 해보겠습니다. 다음은 앤더스 에릭슨 등의 전문성 연구자들과 인지 심리학자들, 비록 비소설을 중심으로 연구되어 왔지만 글쓰기 교육에 대한 연구를 정리한 것입니다. 자세히 알고 싶은 분은 다음 책을 참고하시죠.
대중서 : [1만시간의 재발견] [1등의 습관] [어떻게 공부할 것인가] [인튜이션] [재능은 어떻게 단련되는가] 등
교과서, 연구서 : [학습 이론] [학습 과학] [Road to excellence] [작문 교육 연구의 주제와 방법] 등등
1. 단순한 노력이나 경력은, 실력 향상과 관련이 없습니다.
의사는 경력이 길 수록 실력이 떨어집니다. 초반 1~4년은 실력이 상승하다가 그 후로는 퇴보하는 경향을 보입니다. 이는 프로그래머, 상담사, 소설가(판매량 기준)등에게서 반복적으로 확인됩니다.
최소한의 노력도 하지 않아서 소설을 못 쓰는 게 아닙니다. 그 최소한의 기준이 얼마인지도 저는 모르겠습니다.
2. 그렇다고 재능이 없어서도 아닙니다.
노력vs재능은 가짜 신화입니다. 예를 들어 로맨스 소설 쓰는 유전자를 타고 나는 사람은 없습니다. IQ가 높은 사람들은 학습 속도가 빠르긴 합니다. 그런데 IQ높은 사람들도 로맨스 소설을 잘 쓰진 못합니다. 그랬다면 인기 작가들은 다 서울대를 나와야겠죠.
개방적이고 신경질적인 사람들이 좋은 작가가 되는 ‘경향’이 있긴 합니다. 그런데 이건 경향일 뿐입니다. 신경성인 사람들은 우울증에 걸릴 가능성이 높습니다. 하지만 모든 우울증 환자가 빅토르 위고나 셰익스피어가 되지는 않습니다.
과연 소설을 쓰는 유전자가 있을지? 저도 학자들도 회의적입니다.
3. 유능한 코치에게 피드백을 받아야합니다.
1만 시간을 연습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말이 있죠. 이 연구는 틀렸다는 기사도 보셨을 겁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오해가 있습니다. 1만 시간의 법칙을 주장한 연구자 앤더스 에릭슨은 다르게 말합니다. ‘노력한 시간’보다는 ‘방법’이 더 중요하다고요.
학자들은 피아니스트부터, 체스 마스터, 간호사, 의사,미식축구 선수, 소방관, 수학자, 역사학자, 프로그래머, 심리상담사, 화가에 이르기까지 수 많은 전문가들을 연구했습니다.
그런데 똑같이 하루 3시간씩 연습해도 전문가가 되는 사람과, 아마추어로 남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IQ나(과학자), 신체 능력(운동 선수)등은 비슷했습니다. 재능이 없었다면 시작도 하지 않았겠죠. 어떻게 된 걸까요?
많은 요인이 있지만 전문가들은 연습하는 ‘방법’이 달랐습니다. 앤더스 에릭슨은 이를 ‘의식적인 연습(deliberate practice)’이라고 부르고 체계화했습니다. 자기 주도 학습이 좋다는 편견과 달리, 대부분은 큰 돈을 들여서 유능한 코치에게 피드백을 받았습니다.
이 유능한 코치라고 해서 스티븐 킹 같은 그 분야의 대가는 아닙니다. 연구에 따르면 전문가들은 모든 게 당연해서 설명을 못합니다. “전문가는 할머니도 이해할 수 있게 설명할 수 있다”는 말은 순 거짓말입니다. 외국 유학을 다녀온 엘리트 대학 교수님들이 어떻게 강의를 하시는지 생각해보세요. “이렇게 하면 답이 나옵니다.” “왜 그걸 이해를 못해!”
주입식 교육을 하고 학생에게 관심이 없는 ‘교사’는 쓸모가 없습니다.
유능한 코치는 학생에게 부족한 부분이 어디인지 알고 있고, 알아내려 노력합니다. 1주일에 한 번씩 만나서 학생과 함께 구체적인 목표를 정하고, 과제를 내줍니다.
학생도 떠먹여 주는 걸 받아먹기만 하진 않습니다. 학생은 혼자서 과제를 해결할 방법을 찾아서, 능동적으로 연습합니다. 고민하고 생각하고 집중해서 연습하면서 한 가지 기술을 완벽하게 익힙니다. 다시 코치에게 검사를 받고, 새 과제를 받습니다. 그렇게 반복합니다.
어느 정도 수준을 넘고 나면, 학생 스스로 부족한 부분을 찾을 수 있게 되죠. 직접 과제를 만들어 연습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런 ‘의식적인 연습’이 1만 시간이 쌓이면 전문가가 되는 것입니다.
전문가가 된다고 돈을 많이 벌거나, 성공한다는 보장은 없지만요.
4. 사회적 지지와 심리적 안전감이 필요합니다.
물론 이런 연습은 어렵습니다. 많은 전문가들은 연습이 “어렵고, 재미 없었다”고 말했습니다. 어떻게 그 어려운 과정을 헤쳐나간 걸까요? 물론 성공하면 기쁘지요. 원대한 꿈이 동기가 되어주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아무리 의식적으로 연습한다고 해도, 매번 성공만 할 수는 없습니다. 너무나 자주 우리는 실패합니다. 쓰레기 같은 작품을 쓰기도 합니다. 심하면 “나는 쓰레기 작가야”라는 망상에 사로잡히죠. 감정을 스스로 관리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런 때 좋은 사람들이 있으면 힘이 됩니다. 나를 지지해주고 도와주는 사람들이요. 응원을 해주고, 노력을 인정해주고, 슬럼프에 빠지거나 실패하더라도 지원을 아끼지 않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여담이지만 그래서 가난한 집안보다는 여유있는 부잣집에서 천재가 나옵니다. 돈 걱정을 하지 않으니까요.)
피드백을 주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비판자가 아니라, 동반자여야 합니다. 적이 아니라, 같은 편이라고 느껴야 한다는 뜻입니다. 자기가 그렇게 생각하는 정도로는 부족합니다. 피드백을 받는 사람이 그렇게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학자들은 이를 ‘심리적 안전감’이라고 부르고 연구해왔습니다. 안전감은 “내 생각이나 의견, 질문, 걱정, 혹은 실수가 드러났을 때 처벌받거나 놀림받지 않을거라는 믿음”으로 정의합니다. 좋은 교사,심리상담사들은 학생들이 안전하다고 느낄 수 있게 배려합니다. 심리적 안전감이 높은 팀은 떠 빨리 새로운 기술을 배우고, 성과도 더 높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자기가 쓰레기라고 생각하고 싶은 사람은 없습니다. 심리적으로 불안한 사람들은 잘못을 고치기보다는 숨기려 합니다. 잘못이 아니라고 변명하려 합니다. 때로는 아예 포기해버리기도 합니다. 부정적인 평가가 두려워서 더 이상 글을 쓰지 않는 거죠.
제가 처음에 말했듯이 비판은 독이 되어 작가를 죽입니다.
결론 : 그런데 누가 코치를 자처할 것인가?
이 글에는 제가 리뷰를 쓰면서 고민해온 문제들이 담겨 있습니다.
“내 리뷰가 작가분들의 심리적 안전감을 갉아먹지는 않는가? 나는 좋은 코치인가?”
답부터 말하자면 저는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작가분들에게 도움이 되겠다고 시작한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잊어버리고, 저를 합리화하고 있더군요.
“나름 노력해서 구체적으로 평을 써드렸으니까.”
“나는 비판만 하지 않았어. 대안도 제시했다고”
“이런 글을 읽어주는 것도 고맙게 생각해야지.”
유능한 코치가 되기는 어렵습니다. 누군가 심리적 안전감을 갉아먹는 악평을 쓴다고 해도 잘못은 아닙니다. 돈을 받고 쓴 것도 아니잖아요. 여기는 글을 올리는 사이트일 뿐입니다. 작가와 리뷰어는 친구가 아니죠.
하지만 저는 그게 싫었습니다. 리뷰를 쓰기 시작한 이유를 다시 생각했습니다. 작가분들에게 도움이 되기 위해서였죠. 저는 추리 장르를 좋아합니다. 이 장르가 발전해서 더 좋은 작가분들이 나오면 좋겠습니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고, 강요하지도 않았습니다. 제가 자발적으로 원해서 시간을 냈습니다.
저는 앞으로도 리뷰를 써서 작가님들께 도움이 되고 싶습니다. 저뿐만 아니라 많은 리뷰어분들도 그렇게 생각하시리라 믿습니다. 브릿G를 운영하시는 분들도 고민하고 노력하고 계시겠죠. 알고 있습니다. 긍정적으로 쓰면 추천 리뷰로 올라가기 쉽다던가…
대안도 이미 여러가지 나와 있습니다. 일단 [리뷰 공모]나 [리뷰의뢰]는 리뷰어에게 돈을 줍니다. 최저임금도 안나오는 열정 페이는 안타깝지만, 작가님도 열정 페이로 일하시니까요… 공짜로 보는 작품에 리뷰 쓰고 돈도 받아서 나쁠 게 어디있겠습니까. 준비 중인 [전문가 멘토링]도 기대하고 있습니다.
유능한 코치가 필요하다고 했지만, 같이 습작을 하는 동료 작가도 좋은 코치가 될 수 있습니다. 연구에 따르면 동료 학생이 평가한 점수와, 전문가가 평가한 점수는 크게 차이가 없다고 합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전문가는 ‘지식의 저주’ 때문에 좋은 코치가 되지 못하고요. 코우세라 같은 온라인 교육 사이트는 동료 평가를 전면적으로 확대했습니다. (이 강연을 보시길) 글쓰기는 물론이고 협상, 철학도 가르치고 있습니다.
또 피드백이 아니라도, 가벼운 [단문 응원]도 심리적 안전감에 도움이 됩니다. 모두 열심히 응원을 달아주세요.
제 이야기는 여기까지입니다. 긴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글자 수를 세어보니 6천 자나 됩니다. 왠지 브릿G 운영진 분들에게 공부할 문헌들을 왕창 던져드려서 죄송하군요. 그래도 앞으로 ‘심리적으로 안전한’ 브릿G를 만들어가시는데 도움이 되면 좋겠습니다.
혹시 더 궁금하신 게 있거나, 도움이 필요하시면 연락주세요. 저는 한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