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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사과] 하지만 두고 보자. 결국 다 똑같아질 거야. 결국엔 모두 다 똑같이 좆같아진다.

분류: 책, 글쓴이: 구름사탕, 18년 8월, 읽음: 146

하지만 두고 보자. 결국 다 똑같아질 거야. 결국엔 모두 다 똑같이 좆같아진다. 노력해도 소용없어. 너도 알잖아. 그러니까 너도 노력하지 마. 일도 하지 마. 아무것도 하지 마. 씨발 우리 다같이 본드나 불자. l 김사과, 「나와 b」

 

이번에 소개해드릴 작가는 김사과에요. 제가 무지막지하게 좋아하는 작가입니다. 김사과가 쓴, 좋은 작품들이 많이 있지만 저는 그중에서도 특히 김사과의 첫 장편소설인 『미나』와 첫 단편집인 『영이』를 매우 좋아합니다. 그래서 이 두 책을 중심으로 김사과를 소개해보려 합니다.

무엇이 그들을 이토록 분노하게 만들었는가. 김사과의 등장 이후로 지속적으로 제기되는 문제이다. 무엇이 이토록 부당하기에 김사과의 인물들이 이토록 폭력적인 행태를 보이는 것일까.

김사과의 세계는 독특하다. 일단 현실과 환상의 경계가 없다. 엄마가 커다란 삽으로 아빠를 개처럼 때리면 아빠가 진짜 개가 된다. 식사 시간에 누나가 “내가 돼지가 되어가는 게 불쌍하지도 않아!”라고 외치면 누나가 진짜 돼지가 된다. 카프카의 『변신』을 연상시키는 이러한 김사과의 인물들의 모습은 너무나도 처참하다. 그리고 이는 동시에 분노하는 데 현실과 환상을 구분할 필요가 뭐가 있냐는 김사과의 도발적인 질문으로도 읽힌다. 아빠가 진짜 개로 변신하기 전에, 이미 오래전부터 아빠는 개새끼였고, 누나가 진짜 돼지로 변신하기 한참 전에 누나는 진짜 돼지인 상태로 살아왔다는 것이다.

김사과의 『미나』는 이러한 시각으로 절망과 살인충동으로 가득한 10대 소녀들을 풀어낸 작품이다. 『미나』는 주로 수정과 미나, 이 두 인물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일단 수정은 학교 시스템 그 자체이다. 수정은 모든 것에서 완벽하고, 모든 것을 이해한다고 생각하고, 모든 것을 다 가지지 못하면 불안해하는 현대인의 모습을 그대로 가져온 인물이다. 그러한 수정에게 미나는 이해할 수 없는 존재이다. 소설 초반에 미나의 친구인 박지예가 유서 한 장 없이 자살한다. 미나는 박지예의 자살 사건 이후로 큰 충격에 빠지고, 미나는 슬픔이라는 관념 그 자체가 된다.

 

‘박지예는 시험을 못 봐서 죽었다고 하니까 그건 나랑은 상관이 없는 문제인 것 같고, 사실 나는 잘 모르겠고, 뭐 굳이 뭔가 알고 싶지도 않고, 사실 나는 박지예가 어디 사는지도 모른다.’

마침내 수정은 이렇게 자신의 생각을 간단하게 정리한 다음 요점정리 노트를 훑어보려다 말고 마지막으로 한번 더 미나를 훔쳐본다. 그러자 거기, 친구의 자살소식을 전해들은 여학생의 완벽한 상징이 앉아 있다. 그녀에게서는 정교하게 짜인 수학식 같은 아름다움이 풍겨나온다. 수정은 노트를 펼쳐놓고 그 식을 풀고 싶다는 욕망을 느낀다. 그것은 경이로우며 거의 질식할 정도로 압도적인 아름다움이다. 머리에서 십오 센티미터 뒤에 세 겹으로 된 후광이 비치고 있으며 그것은 보헤미아산 스테인드글라스로 되어 있다. 금빛으로 빛나는 크고 정교한 태엽장치들이 소리도 없이 바쁘게 돌아간다. 살짝 숙인 상앗빛 이마로 떨어지는 햇살은 위성시계처럼 한치의 오차도 없지 않은가? 진심어린 태도가 어떻게 저렇게까지 완벽할 수 있을까, 수정은 의심한다. 미나는 마치 지예가 독서실 옥상에서 뛰어내리는 순간을 기다리며, 바로 오늘을 위해 실력을 갈고 닦아온 것처럼 지나치게 완벽해 보인다. 수정은 한참동안 미나의 완벽한 아름다움에서 헤어나지 못하다가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서 지예가 자살하지 않았다면 미나는 얼마나 억울했을까 하는 문제를 연구하기 시작한다. 지예가 죽지 않았다면 미나는 자신의 갈고 닦은 실력을 펼쳐 보일 기회가 없었을 것이고, 그렇다면 수정은 이런 흔치 않은 아름다움을 감상할 기회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좋은 것, 감사한 것, 따라서 미나를 더욱더 사랑해야 하는 이유인가. 아니, 그렇지 않다고 수정은 생각한다. 미나의 특별한 재능이 수정의 가슴을 찌르고 그래서 수정은 숨을 쉴 수가 없다. 가지고 싶다고, 수정은 생각한다. 좀 더 가지고 싶다. 가지고 싶다. 가지고 싶다. 가지고 싶다. 오직 그 문장이 수정의 머릿속에서 무한반복된다. 다른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다. 이룰 수 없는 목표는 분노로 바뀐다. 수정은 미나를 뚫어지게 노려보며 가까이 있지만 닿을 수 없는 슬픔을 더욱 강조하여 느낀다. 그렇게 수정은 미나의 지예가 아니라 미나의 슬픔을 질투하기 시작한다. 수정은 필사적으로 시험지를 바라본다. 거기에 완벽한 침묵과 평화의 차원이 있다. 그것은 완벽하며 영원하다. 갑자기 시험지에 대한 사랑이 넘쳐흐르기 시작한다. 수정은 미나를 완전히 구겨버리기 위해 시험지를 바로 편다. 다음 장에도 그리고 그 다음 장에도 평화는 유지된다. 수정은 시험지에 적힌 모든 문장을 이해하고 그 앞과 뒤에 놓인 모든 것을 잘 알고 느낄 수 있다. 수정은 자신이 모든 것을 완벽하게 통제하고 있는 세계 안에서 평화를 느낀다. 따라서 지금 수정은 평화 안에 있다. 문제를 풀어나가는 동안 미나가 저 멀리 밀려난다. 밀려가고 또 밀려가고 수정은 그것이 영원히 돌아오지 않기를 바란다. l 김사과, 『미나』

 

위에 인용했듯이, 수정은 “미나의 슬픔”을 질투한다. 왜냐하면 수정은 다 가져야 하기 때문이다. 수정은 10대 청소년의 특권을 모두 누려야 하고, 그 특권에는 물론 미나의 슬픔도 포함된다. 무한경쟁시대에 필요없는 “미나의 슬픔”을 수정은 가지고 싶어하고, 또 동시에 그것을 가지고 싶어하는 자신과 미나를 경멸한다. 그래서 수정은 시험지로 눈을 돌린다. 시험지에는 “완벽한 침묵과 평화의 차원이 있다.” 그것은 미나의 슬픔처럼 비생산적이지 않고, 성과주의 사회에 완벽하게 부응하는, 수정이 완전히 수용하고 지배할 수 있는 영역의 것이다.

수정의 이러한 행각은 소설 전체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다. 미나는 자주 절망에 빠지고, 수정은 그 절망을 이해해주지 못한다. 아니, 이해하기를 거부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비생산적이니까. 슬픔은 아무것도 해결해주지 못하니까. 슬퍼하는 인간은 이 사회에서 뒤쳐질 거니까. 성공적인 사람은 감정에 쉽사리 휩쓸리지 않고 자신에게 부여된 의무와 권리를 마음껏 누려야 하니까.

그러한 수정에게 미나는 이해할 수 없고, 이해하기도 싫지만, 자꾸 눈에 거슬리는 불가해 한 존재이다. 미나는 박지예의 자살 이후 슬픔에 빠져 시험 날 모든 답안지를 백지로 제출한다. 그러한 미나를, 미나의 슬픔을, 수정은 가지고 싶어 하는 동시에 가지고 싶어 하지 않는다. 수정은 혼돈에 빠진다. 나는 모든 것을 가져야 하는데 왜 너는 나의 것이 되지 않지? 너는 왜 비생산적인 슬픔에 빠져서 인생을 낭비하고 있지?

소설은 미나와 수정의 광기를 여과 없이 긴 시간을 들여 보여준다. 그것은 적나라하고, 거침이 없다. 한 문장의 고통은 미나와 수정의 시선을 거쳐 백 문장의 고통으로 변모해 독자들을 덮친다. 작가는 왜 이렇게 그들의 고통에 끈질기게 달라붙어 길게 길게 묘사해 나가는 것일까. 그 이유는 김사과의 단편인 「영이」의 한 구절을 통해 알 수 있다.

 

아빠가 술을 마시면 엄마는 욕을 하고 아빠는 엄마를 때리고 둘은 싸운다. 한 문장으로 쓰면 될 것을 나는 왜 이렇게 많은 문장을 쓰고 있나. 왜냐하면 백 문장에는 백 문장의 진실이 있고 한 문장에는 한 문장의 진실이 있기 때문이다. 당신의 고통과 나의 고통이 다른 것처럼, 열 시 간의 고통과 십분의 고통이 다른 것처럼, 백 문장의 진실과 한 문장의 진실은 다르다. 이것은 아주 고통스러운 광경이기 때문에, 한 문장ㅡ삼초간의 고통이 아니라 천 문장ㅡ삼천초의 고통 을 안겨줘야 한다. 그래야만 당신도 느낄 수가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읽는 당신을 원하지 않는 다. 느끼는 당신을 원한다. 아주 오래 느끼는 당신을 원한다. 당신은 아주 오래 느껴야 한다. 한 번 더 사는 것처럼 느껴질 만큼 오랫동안 말이다. 그래야 영이가 당신 마음속에 오래도록, 영이가 죽고 내가 죽은 뒤에도, ‘영원히’ 살아남을 것이기 때문이다. l 김사과, 「영이」

 

『미나』의 10대들은 노래방에서 숨을 못 쉬겠다고 한탄하고, 담배 피우고 폐암 걸려 죽어버리겠다고 소리치고, 무한 경쟁시대에 내동댕이쳐진 힘없고 무력한 존재들이다. 인용한 부분에서 알 수 있듯이, 김사과는 『미나』의 10대들의 고통을 가급적이면 더 오랫동안 느끼게 할 수 있도록 분노하지만, 무엇에 대해 분노하는 지도 파악할 수 없는 10대 아이들의 기괴한 감정들을 길게 길게 묘사해나간다. 그것은 적나라하게 현실적이고, 고통 그 자체이다. 우리는 『미나』를 읽지 않는다. 우리는 『미나』를 느낀다. 아주 오래 느낀다. 그리고 『미나』의 광기를 오랫동안 잊지 못한다.

 

도대체 이 모든 분노는 어디에서 오는 걸까.

안다. 난 지나치게 얄팍하다. 쎌로판지 같다. 하지만 나도 내가 쎌로판지가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안다. 난 쎌로판 재질이 아니다. 어쩌면 그게 문제다. 내가 날 쎌로판지라고 믿게 된다면 행복해질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다. 난 쎌로판지가 아니다. 아니 난 쎌로판지조차 아니다. 난 뭔가다. 쎌로판지가 되기엔 너무 두껍고 또 인간이 되기엔 너무 얇은 뭔가다.ㅣ김사과,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이상한 일이 벌어지는 오늘은 참으로 신기한 날이다」

 

세상을 끝장내기 위해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책을 없애는 일이다. 가장 나중에 해야 할 일도 마찬가지로 책을 없애는 일이다. 아파트와 전자칩, 자동차를 제외한 모든 것은 의미를 잃었다. 의미를 잃은 모든 것을 우리는 없애버릴 것이다. 사람들은 없애는 건 가장 쉽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이제 모두 씰리콘 재질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젠 받아들여야 한다. 세계는 이미 오래전에 사라져버렸고, 일반적 견해와 달리 끝은 오고 있다기보다는 오래전에 지나갔다는 것을 말이다. 끝나지 않은 것은 책, 그리고 인간들뿐이다. l 김사과, 「매장」

 

김사과에게 인간은 어떤 것일까. 김사과에게 인간은 자신의 의지로 사유하고, 선택하고, 행복을 누리는 존재가 절대로 아니다. 김사과에게 인간은 씰리콘으로 되어 있는, 아파트와 전자칩, 자동차와 하등 다를 바가 없는 존재다. 인간들은 공포와 폭력으로 채찍질을 당하며 오로지 앞으로 앞으로 나아가는 경주마들이다. 사회는 그들의 공포를 가라앉혀주지 않는다. 오히려, 부추긴다. 그래야 시스템이 돌아가니까.

이러한 사회 속에서 김사과의 인물들은 적극적으로 폭력을 행사한다. 도움을 청하는 할머니를 목졸라 죽이고 정사각형의 상자에 쑤셔넣고 집으로 돌아와, 침대 위에 버젓이 앉아 있는, 자신이 죽인 할머니의 환영에 시달리기도 하고, 아빠의 머리를 텔레비전에 쑤셔 박기도 한다. 이들은 왜 그럴까. 그들은 무엇이 두려운가.

ㅡ난 프랑스 여자가 무섭거든. 아냐 난 프랑스가 무서워. 아니야, 미국이 더 무섭지. 일본도 무서워. 아니 영국이 더 무서워. 하지만 가장 무서운 건 북한이야. 그렇지 않냐? 북한은 여기서 걸어서도 갈 수 있어. 그런데 거기서 매일매일 우릴 다 죽이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다잖아. 아니야? 아냐, 어릴 때 할아버지가 그랬어. 우릴 다 죽이고 싶어한대. 무섭지 않아? 안 무서워? 어째서? 난 무서워. 너무 무서워. 그런데 북한보다 더 무서운 건 뭔지 알아? 서울이야. 난 서울이 너무너무 무서워. 어떻게 안 무서울 수가 있어. 내가 매일 아침 눈을 뜨는 곳인데 어떻게 안 무서울 수가 있어? 넌 서울이 안 무서워? 난 무서운데? 왜 넌 안 무서워?

난 말을 멈추고 아이를 보았다. 이제 아이의 표정은 공포가 다였다. 그렇다면 됐다. 우리는 같은 표정을 짓고 있는 거니까.

ㅡ왜 그렇게 겁먹은 표정으로 날 보는 거냐? 내가 무서워? 서울은 안 무서운데 내가 무서워? 미국은 안 무서운데 난 무서운 거야? 네 아빠는? 네 엄마는? 학교는 어때? 니 집은 안 무서워? 난 죄다 너무 무서웠어. 학교가 집이 엄마가 아빠가 회사가, 맞아, 누나가 너무 무서웠단 말이야. ㅣ김사과,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이상한 일이 벌어지는 오늘은 참으로 신기한 날이다」

 

한 인물은, 이렇게 자신이 무서워하는 것의 목록을 두서없이 열거하기도 하지만, 그가 열거하는 공포를 듣고 있자면 의문만이 깊어질 뿐이다. 그래서 왜? 왜 그것들이 무서운 건데? 왜?

김사과의 인물은 사람이 아니다. 사람보다는 공포라는 관념에 더 가깝다. 그들은 사회에 산재하고 있지만, 모두가 쉬쉬하며 가시화되기를 거부하는 공포라는 것을 싹싹 긁어모아 그것을 사람 모양으로 빚어놓은 것이다. 그들은 사람이 아니라 공포 그 자체다. 공포와 폭력 그 자체다.

광기란 것이 무엇인지 경험하고 싶은가. 글을 읽지 않고, ‘느끼고’ 싶은가? 오래오래 느끼고 싶은가? 광기와 공포라는 안경을 쓰고 세상을 보면 세상이 어떻게 무너지고 있는지, 아니 이미 무너진 채로 광기라는 증기를 뿜으며 시스템을 간신히 지탱하고 있는지 조금이라도 느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미 저 멀리 세계의 끝을 지나치고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질주하고 있는 이 사회를 느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김사과의 광기는 그것을 제공한다. 우리는 악몽을 입안에 털어놓고 물을 마시듯이 김사과를 느낄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아주 새롭고 낯설며 두려울 것이며, 그것이 이 세계의 또다른 진실일지도 모른다. 외면해온 진실, 공포가 무엇인지를 알고 싶은가? 느끼고 싶은가?

여기에 김사과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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