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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 인간의 존엄성은 왜 이리 조악한가. 그렇기에 그것이 왜 부서져서는 안 되는가.

분류: 책, 글쓴이: 구름사탕, 18년 8월, 댓글1, 읽음: 124

이 글을 쓰는 이유는 첫째, 제가 한 작가의 모든 소설책을 읽는 이른바 작가 마스터를 최근에 세 번째로 달성했기 때문이고, 둘째, 제가 좋아하는 작가들을 많은 사람들이 읽어 저와 문학 담소를 나눌 수 있음 좋겠다는 소박한 염원 때문이며, 셋째, 제가 지금 당장 지지리도 할 게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소개해드릴 작가님들은 한강 작가님입니다. 제가 정말 정말 아끼는 작가님이에요. 그럼 차근차근 소개를 시작해보도록 하겠습니다.

한강 작가님은 2016년에 『채식주의자』로 맨부커상을 수상해서 많이 유명한 작가입니다. 한강은 작품 하나하나마다 감정의 결이 굉장히 다른 사람이지만, 그럼에도 그녀의 소설관을 일축하자면, ‘인간의 존엄성은 왜 이리도 조악하고 연약한가, 하지만 그렇기에 왜 그것이 부서져서는 안 되는가’가 아닐까 생각해요.

저는 『채식주의자』도 좋지만, 그보다 『소년이 온다』를 더 좋아합니다. 『소년이 온다』는 80년 5월 광주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강렬하고 아름다운 표지가 나를 사로잡았고, 다 읽은 뒤에는 저 수많은 흰 꽃들이 수많은 결백한 영혼들을 애도하는 것 같아서 마음 한편이 측은해졌습니다. 한강 작가님의 책은 어쩔 때는 몽환적이면서도 어쩔 때는 목이 시리도록 현실적인데, 『소년이 온다』는 처절할 정도로 현실적인 책입니다. 이 소설은 그날에 대해 이야기하고, 허망히 죽은 영혼들과, 그리고 그날이 지나도 그날을 잊지 못하는, 살아남은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해. 살아도 언제나 결백한 죽음에 대해 생각을 멈추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해.

“당신이 죽은 뒤 장례식을 치르지 못해, 내 삶이 장례식이 되었습니다.” 이 책을 관통하는 한 문장이라고 생각합니다. 정당한 애도를 받지 못하고 스러져간 결백한 영혼들. 책 속 인물들은 끈질기게 애도하고 끈질기게 슬퍼합니다. 불과 38년 전에 우리나라에서 이런 끔찍한 학살이 이루어졌다는 게, 정말 마음이 아팠습니다. 모두 한번쯤 읽어봐야 할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책이 빛을 발하는 지점은, 80년 5월 광주를 섬뜩할 정도로 섬세하게 재현해냄과 동시에, 거대한 폭력을 겪고 난 뒤의 사람이 그 이후의 삶을 어떻게 견디는 지에 대해, 정당한 애도를 치르지 못한 사람이 장례식이 되어버린 자신의 삶을 어떻게 이어나가는 지에 대해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살아남은 자와, 살아남지 못한 자. 살아났으나, 마음의 어느 부분이 살아남지 못한 사람들.

책에서 저를 찔렀던 구절들을 옮겨봅니다.

 

그 과정에서 네가 이해할 수 없었던 한 가지 일은, 입관을 마친 뒤 약식으로 치르는 짧은 추도식에서 육족들이 애국가를 부른다는 것이었다. 관 위에 태극기를 반듯이 펴고 친친 끈으로 묶어놓는 것도 이상했다. 군인들이 죽인 사람들에게 왜 애국가를 불러주는 걸까. 왜 태극기로 관을 감싸는 걸까. 마치 나라가 그들을 죽인 게 아니라는 듯이.

조심스럽게 네가 물었을 때, 은숙 누나는 동그란 눈을 더 크게 뜨며 대답했다.

군인들이 반란을 일으킨 거잖아, 권력을 잡으려고. 너도 봤을 거 아냐. 한낮에 사람들을 때리고 찌르고, 그래도 안 되니까 총을 쐈잖아. 그렇게 하라고 그들이 명령한 거야. 그 사람들을 어떻게 나라라고 부를 수 있어. l 한강, 『소년이 온다』

 

그러니까 형, 영혼이란 건 아무것도 아닌 건가.

아니, 그건 무슨 유리 같은 건가.

유리는 투명하고 깨지기 쉽지. 그게 유리의 본성이지. 그러니까 유리로 만든 물건은 조심해서 다뤄야 하는 거지. 금이 가거나 부서지면 못쓰게 되니까, 버려야 하니까.

예전에 우린 깨지지 않은 유리를 갖고 있었지. 그게 유린지 뭔지 확인도 안 해본, 단단하고 투명한 진짜였지. 그러니까 우린, 부서지면서 우리가 영혼을 갖고 있었단 걸 보여준 거지. 진짜 유리로 만들어진 인간이었단 걸 증명한 거야.ㅣ한강, 『소년이 온다』

 

그러니까 인간은, 근본적으로 잔인한 존재인 것입니까? 우리들은 단지 보편적인 경험을 한 것뿐입니까? 우리는 존엄하다는 착각 속에 살고 있을 뿐, 언제든 아무것도 아닌 것, 벌레, 짐승, 고름과 진물의 덩어리로 변할 수 있는 겁니까? 굴욕당하고 훼손되고 살해되는 것, 그것이 역사 속에서 증명된 인간의 본질입니까?ㅣ한강, 『소년이 온다』

순간 깨달았습니다. 그들이 원한 게 무엇이었는지. 우리를 굶기고 고문하면서 그들이 하고 싶었던 말이 무엇이었는지. 너희들이 태극기를 흔들고 애국가를 부른 게 얼마나 웃기는 일이었는지, 우리가 깨닫게 해주겠다. 냄새를 풍기는 더러운 몸, 상처가 문드러지는 몸, 굶주린 짐승 같은 몸뚱어리들이 너희들이란 걸, 우리가 증명해주겠다.ㅣ한강, 『소년이 온다』

 

왜 태극기로 시신을 감싸느냐고, 애국가는 왜 부르는 거냐고 동호는 물었다. 은숙이 어떻게 대답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지금이라면 당신은 어떻게 대답할까. 태극기로, 고작 그걸로 감싸보려던 거야. 우린 도륙된 고깃덩어리들이 아니어야 하니까, 필사적으로 묵념을 하고 애국가를 부른 거야.ㅣ한강, 『소년이 온다』

한강은 말했듯이 몽환적인 이야기와 현실적인 이야기 사이를 마음껏 부유하는 작가인데, 현실적인 작품을 하나 소개했으니, 몽환적인 작품도 하나 소개해드리고 싶습니다. 한강의 『흰』입니다. 하얗다, 할 때 그 ‘흰’이에요. 이 작품은 제가 너무 좋아해서 제 단편에 한 구절을 인용하기도 했는데요, 읽을 때마다 마음 속 깊이 힐링받는 느낌이에요.

 

얼어붙은 거리를 걷던 그녀가 한 건물의 이층을 올려다본다. 성근 레이스 커튼이 창을 가리고 있다. 더럽혀지지 않는 어떤 흰 것이 우리 안에 어른어른 너울거리고 있기 때문에, 저렇게 정갈한 사물을 대할 때마다 우리 마음은 움직이는 것일까?

새로 빨아 바싹 말린 흰 베갯잇과 이불보가 무엇인가를 말하는 것 같다고 느껴질 때가 있다. 거기 그녀의 맨살이 닿을 때, 순면의 흰 천이 무슨 말을 건네는 것 같다. 당신은 귀한 사람이라고. 당신의 잠은 깨끗하고 당신이 살아 있다는 건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고. 잠과 생시 사이에서 바스락거리는 순면의 침대보에 맨살이 닿을 때 그녀는 그렇게 이상한 위로를 받는다. ㅣ한강, 『흰』

 

문장이 정말 아름답지 않나요? 『흰』은 정말 독특한 책이에요. 분명 소설인데, 에세이인 것 같기도 하고, 시인 것 같기도 합니다. 한강은 사라질ㅡ사라지고 있는ㅡ아름다움을 조용히 응시합니다. 흰 것. 결백한 것. 너무나도 쉽게 더럽혀지는, 그렇기에 더럽혀져서는 안 되는 그 순수함. 존엄. 이런 것들을 한강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읊조립니다. 이 책을 읽고 있으면 내 몸에 붙어있던 더러움들이 조용히 씻겨 깨끗해지는 기분이 들어요.

한강은 장편소설도 무척 좋지만 단편소설도 훌륭합니다. 제가 제일 좋아하는 한강의 단편은 소설집 『노랑무늬영원』에 수록된 「에우로파」에요. 「에우로파」는 남자의 신체를 가지고 태어났으나, 여자가 되고 싶어 하는 한 남자가, 화장을 하고 원피스를 입고 높은 구두를 신은 채 여자인 친구와 함께 같이 밤거리를 산책하는 이야기에요. 네. 퀴어 소설입니다. 저는 트랜스젠더(성전환 수술을 받지 않더라도 몸의 성별과 젠더의 성별이 불일치하는 사람을 트랜스젠더라고 합니다.)인 이 단편의 화자의 이야기에도 몰입했지만, 화자의 비밀을 공유하는 인아라는 여자의 캐릭터가 너무 맘에 들었습니다. 인아는 소설에서 어떤 상처를 받았는지 구체적으로 보여주진 않지만, 큰 상처를 겪은 뒤 다시 일어나, 마치 다시 태어나듯이 삶을 이어나가는 사람입니다. 이러한 인아와 ‘나’가 존재 자체로 서로를 위안합니다. 그 상처받은, 상처받고 있는 자의 연대가 다 읽은 뒤에도 마음 속 깊이 남았습니다.

 

(그동안 나는 언제나 너를 특별하게 생각했어. 지금 이 순간도 특별하게 생각하고 있어. 하지만 그건 내가 너를 사랑해서가 아니야. 나는 너처럼 되고 싶어.) 인아의 얼굴이 어떤 마비의 상태를 드러내는 것을 나는 보았다. 본래 인아는 퍽 영특한 눈매를 지니고 있었는데, 내 대답에 귀를 기울이던 그 순간만은 거의 백치처럼 멍해보였다. (너 같은 목소리를 갖고 싶고, 너 같은 몸을 갖고 싶어. 어떤 밤에는, 그 갈망 때문에 미칠 것 같을 때도 있어.) 좀 전의 흥분 때문에 눈시울과 속눈썹이 조금 젖은 채 인아는 내 얼굴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더 견딜 수 없는 건, 이렇게 내 삶이 지나가고 있다는 거야. 벌써 꽤 많이 지나가버렸다는 거야. 내가 얼마나 비겁한지 너는 모를 거야. 비겁한 사람의 인생이란 긴 형벌과 다름없는 거야.) ㅣ한강, 「에우로파」

(내 안에서는 가볼 수 있는 데까지 가봤어. 밖으로 나가는 것 말고는 길이 없었어. 그걸 깨달은 순간 장례식이 끝났다는 걸 알았어. 더 이상 장례식을 치르듯 살 수 없다는 걸 알았어.물론 난 여전히 사람을 믿지 않고 이 세계를 믿지 않아. 하지만 나 자신을 믿지 않는 것에 비하면, 그런 환멸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할 수 있어.) ㅣ한강, 「에우로파」

 

아름다운 문장을 원하나요? 이 세계에 넘처 흐르는 폭력을 직시하고 싶나요? 그런 당신에게 한강을 권해드립니다! 한강은 어떤 상처도 지나치지 않고, 따뜻한 문장으로 어루만져줍니다. “당신의 잠은 깨끗하고, 당신이 살아 있다는 건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고” 말해줍니다. 한강을 읽는 동안 자신이 마음 한 구석에 버려둔 더럽혀지지 않는 어떤 흰 것을 손끝으로 조심스럽게 매만지는 느낌을 얻을 수 있을 거예요. 한강 소설 중 제가 좋아하는 구절을 하나 인용하며 한강 작가님 소개를 마칩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러지 마, 라고 그때 말했어야 했다. 그러지 마. 우리 잘못이 있다면 처음부터 결함투성이로 태어난 것뿐인걸.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게 설계된 것뿐인걸. 존재하지 않는 괴물 같은 죄 위로 얇은 천을 씌워놓고, 목숨처럼 껴안고 살아가지 마. 잠 못 이루지마. 악몽을 꾸지 마. 누구의 비난도 믿지 마.ㅣ한강, 「밝아지기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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