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게시판

어떻게 SF 소설이 미래의 희망을 이야기할 수 있는가

분류: 책, 글쓴이: OneTiger, 18년 7월, 읽음: 109

아랫글 ‘<도전! 웹소설 쓰기>의 SF 소설 왜곡’에서 저는 <도전! 웹소설 쓰기>가 SF 소설을 왜곡한다고 지적했습니다. 이 책에서 어떤 작가는 장르 소설이 독자에게 현실 도피적인 위안을 준다고 말합니다. 어쩌면 수많은 사람들은 SF 소설 같은 장르 소설이 현실 도피적이라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심지어 <톨킨: 인간과 신화>를 지은 조지프 피어스 같은 작자는 정말 그렇다고 주장하죠. 이는 SF 소설을 왜곡하는 주장입니다. SF 소설은 사람들에게 암울하고 폭력적인 현실에 맞서라고 선동하고 투쟁적인 희망을 선사할 수 있습니다. 저는 엘리너 아나슨이 쓴 어떤 사설이 그걸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Strange Horizons이라는 사변 소설 잡지에서 엘리너 아나슨은 Hwarhath 시리즈와 기후 변화를 이야기한 적이 있습니다. 엘리너 아나슨은 친척들에게 자신이 기후 변화와 맞서는 미래 인류를 그린 SF 소설을 쓴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소설 속에서 미래 인류는 바다에 철분들을 뿌리고, 거대 궤도 우산을 띄우고, 자연 생태계를 대규모로 보존합니다. 하지만 친척들은 그런 소설이 현실적이지 않다고 지적했고, 인류가 기후 변화에 대처하지 못한다고 회의적인 시선을 보냈어요.

그때 엘리너 아나슨은 사람들이 너무 쉽게 포기하고 절망한다고 느꼈습니다. 기후 변화가 아주 심각한 대재난이 될 수 있음에도, 친척들은 그걸 적극적으로 막고 싶어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그저 절망하고 대안이 없다고 말할 뿐이었습니다. 마치 마가렛 대처가 대안이 없다(TINA, There Is No Alternative)고 말한 것처럼. 엘리너 아나슨은 상황이 꽤나 비관적이나 사람들이 포기하지 말고 행동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아나슨 자신이 SF 작가이기 때문에 SF 소설이 무엇을 표현할 수 있는지 고민했습니다. 기후 변화가 대재난이 될 수 있는 상황에서 SF 소설이 무엇을 이야기해야 할까요? 치명적인 경고?

 

SF 소설은 세상을 향해 경고하는 매체입니다. 19세기에 본격적인 사이언티픽 로망스가 나타난 이후, SF 소설은 언제나 세상을 향해 경고했습니다. SF 작가들은 뭔가 논리적이고 거대한 변화를 구상하고, 어떻게 그것이 인류 사회와 인간의 관념을 강타할 수 있는지 씁니다. 인류 사회와 인간의 관념이 충격을 받을 때, 엄청난 아수라장이 펼쳐지고, SF 작가는 그런 장면들을 포착합니다.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 사람들은 고민하고, 울부짖고, 흐느끼고, 서로 싸우고, 맹렬하게 비난하고, 열정적으로 토론합니다. SF 독자들이 소설을 읽는 이유는 그런 것들 때문일 겁니다. 어떻게 사람들이 고민하고, 울부짖고, 이야기하는지 읽기 위해 SF 독자들은 소설을 펼치겠죠. SF 만화나 SF 영화나 SF 게임 역시 이런 것들을 표현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텍스트 매체이기 때문에 SF 소설은 사람들의 사념 속으로 깊게 들어갈 수 있습니다. 텍스트 매체이기 때문에 SF 소설은 추상적인 사상을 구체적으로 탐구할 수 있습니다. 만화나 영화나 게임은 그렇게 하지 못하고, 각종 그림 및 영상 매체들이 엄청나게 발달했음에도, 이는 여전히 SF 독자들이 소설을 읽는 이유입니다. 소설은 사상과 사념을 가장 잘 표현하는 매체입니다. 감동적이고 깊이가 있는 만화나 영화, 게임은 많습니다. 하지만 똑같이 감동적이라고 해도, 소설과 다른 매체들은 서로 다른 방법들로 감동을 선사합니다.

 

만약 SF 소설이 세상을 향해 경고한다면, 그게 전부일까요? 경고가 SF 소설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일까요? SF 작가가 환경 아포칼립스 소설을 쓴다면, 마음을 훌훌 털어낼 수 있을까요? 엘리너 아나슨은 SF 작가들에게 뭔가 특별한 임무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엘리너 아나슨은 SF 작가들이 무엇을 해야 한다고 강요하지 않으나, SF 소설이 본보기를 선사하면 좋겠다고 느끼는 것 같습니다. 환경 아포칼립스 소설들은 중요합니다. 저는 비단 소설만 아니라 만화, 영화, 게임 역시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환경 아포칼립스들을 읽고, 보고, 플레이하는 동안 독자들, 관객들, 게임 플레이어들은 세상이 멀쩡하게 굴러가지 않는다고 느낄지 모릅니다. 행동하기 전에 사람들은 무엇이 문제인지 알아야 합니다. 환경 아포칼립스들은 무엇이 문제인지 말해야 합니다. 기후 변화가 위험한 재앙이 될지 모름에도, 수많은 사람들은 미래를 염려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과학자들이 경고하고 떠든다고 해도, 수많은 사람들은 코 앞에 있는 쾌락과 소비와 일자리를 찾느라 바쁩니다. 당장 가까운 쾌락과 소비와 일자리를 찾느라 바쁘기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은 미래를 전망하지 못합니다. 과학자들의 이야기를 듣는다고 해도, 그들은 그저 잠시 고민할 뿐이고, 또 다시 쾌락과 일자리를 찾습니다.

 

따라서 뭔가 다른 방법이 필요합니다. 기후 변화가 위험하다고 경고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이 필요합니다. 어쩌면 환경 아포칼립스 소설들은 그런 방법이 될 수 있을지 모릅니다. 환경 아포칼립스들은 어떻게 사람들이 악조건과 싸우는지 생생하게 보여줍니다. 아무도 미래를 예측하지 못하기 때문에 과학자들은 막연하게 경고합니다. 반면, 환경 아포칼립스 소설 속에서 독자들은 등장인물들이 고생하는 장면들을 뚜렷하게 볼 수 있습니다. 독자들은 등장인물들이 느끼는 고통을 따라갈 수 있습니다. 등장인물이 뭐라고 생각하거나 뭐라고 대화할 때, 독자들은 거기에 동참할 수 있습니다.

아마 누군가는 아무리 SF 작가가 비극적인 소설을 써도 그게 그저 소설일 뿐이라고 비아냥거릴지 모릅니다. 맞아요. 소설은 그저 소설이죠. 아무리 환경 아포칼립스가 비극적인 이야기라고 해도, 그건 허구적이고 존재하지 않는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환경 아포칼립스는 그저 SF 작가가 순수하게 창작한 허구가 아닙니다. 그건 어느 정도 논리적인 상상력입니다. 지금까지 숱한 SF 소설들은 몇몇 현실을 예측했습니다. 이는 SF 작가들이 점쟁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마음껏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기 때문에 SF 작가들은 그저 우연히 미래를 때려맞췄을 뿐입니다. 뒷걸음질하는 소가 우연히 쥐를 밟는 것처럼.

 

아무도 미래를 예측하지 못하고, SF 작가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게다가 SF 작가들은 과학자가 아닙니다. 어떤 하드 SF 작가들은 과학자 출신이거나 과학자와 비슷한 위상을 자랑합니다. SF 작가는 자연 과학적인 논문을 쓸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환경 아포칼립스 소설은 과학 논문이 아닙니다. 환경 아포칼립스 소설은 그저 이야기일 뿐이고, 작가는 마음대로 거기에 허구적인 것들을 집어넣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환경 아포칼립스 소설은 미래를 완전히 예측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여러 SF 소설들이 (우연히) 미래를 예측한 것처럼, 어떤 환경 아포칼립스들은 미래를 예측할지 모릅니다. 환경 아포칼립스들이 떠드는 미래들 중 일부는 우리가 정말 직면해야 하는 상황이 될지 모릅니다.

설사 이 모든 상상 과학이 허구라고 해도, SF 소설은 사람들이 고민하고 저항하고 실천하는 상황을 강조할 수 있어요. 따라서 SF 소설들을 이용해 독자들은 무엇이 문제이고 어떻게 사람들이 살아가야 하는지 고민할 수 있습니다. 엘리너 아나슨은 환경 아포칼립스 소설들이 사람들을 향해 경고하기 원하는 것 같습니다. 환경 아포칼립스 소설을 읽은 이후, 독자들은 현실을 직시할 수 있을 겁니다. 세상은 더 이상 안전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계속 쾌락과 소비와 일자리를 쫓고 다른 것들을 외면한다면, 세상은 더욱 커다란 파국에 부딪힐지 모릅니다. 나중에 우리가 쫓는 쾌락은 무시무시한 후환을 돌려줄지 모릅니다.

 

하지만 경고는 최선의 방법이 아닐 겁니다. 엘리너 아나슨은 SF 소설이 경고하는 동시에 희망을 전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나슨은 어떻게 사람들이 현실을 바꿀 수 있는지 SF 소설이 이야기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문제는 SF 소설들조차 희망을 전달하지 않고 계속 암울한 상황을 경고한다는 사실입니다. 엘리너 아나슨은 어떤 친구에게 물었으나, 그 친구는 희망을 전달하는 SF 소설이 별로 없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저는 엘리너 아나슨이 무슨 기분을 느끼는지 어느 정도 이해합니다. 저 역시 환경 아포칼립스 소설보다 희망을 전달하는 생태적인 유토피아 소설이 보고 싶습니다. 2015년에 유명한 생태 문학으로서 평론가들은 <골드 페임 시트러스>와 <워터 나이프>를 꼽았습니다. 하지만 이런 소설들은 디스토피아나 포스트 아포칼립스에 가깝죠.

저는 생태적인 유토피아 소설들이 늘어났으면 좋겠습니다. 이미 현실이 포스트 아포칼립스이기 때문에 저는 이걸 다시 소설에서 보고 싶지 않습니다. 엘리너 아나슨이 잡지에 글을 실은 이후, 생태적인 유토피아 소설들은 늘어났는지 모릅니다. 아마 누군가는 생태적인 유토피아 소설이 허망한 청사진을 제시한다고 비판할지 모릅니다. 저 역시 인류가 자세한 미래 청사진을 그리지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런 유토피아 소설은 어느 정도 사기를 끌어올릴 수 있겠죠. 정말 중요한 소임은 그것일지 모릅니다.

 

엘리너 아나슨이 티나를 언급한 것처럼, 사람들은 아예 대안을 생각조차 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그저 절망하거나 포기하거나 외면합니다. 슬라보예 지젝이 말한 냉소는 이런 절망이나 포기를 뜻할 겁니다. 지배 계급이 너무 강력하기 때문에, 지배적인 체계가 너무 압도적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뭔가를 바꾸기 원하지 않습니다. 강력하고 압도적인 체계 앞에서 사람들은 그저 포기합니다. 그들은 작은 노력조차 시도하지 않습니다. 설사 다른 사람들이 노력한다고 해도, 냉소적인 사람들은 그런 노력을 비웃습니다. 의미는 다소 다르나, 슬라보예 지젝은 사람들이 너무 많이 알기 때문에 너무 쉽게 포기한다고 지적했습니다.

저는 정말 그런지 잘 모르겠습니다. 이 세상에는 자본주의가 뭔지 모르는 사람들이 수두룩하죠. 그래서 구조주의는 자신들이 무엇을 하는지 사람들이 모른다고 말하고요. 하지만 냉소적인 사람들은 분명히 존재하고, 그들은 지배적인 체계에 덤벼드는 시도들이 낭만적이고 유치하고 어리석다고 비웃습니다. 남한 역시 예외가 아닙니다. 민주당 지지자들은 정의당이나 민중당이나 녹색당을 비웃고, 이런 작은 진보 정당들이 유치하다고 비아냥거립니다. 그런 사람들은 민주당이 하늘에서 뚝 떨어졌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민주당은 하늘에서 뚝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인류 문명은 꾸준히 바뀌었고, 앞으로 계속 바뀔 겁니다. 비록 속도는 느리겠으나, 인류 문명은 계속 바뀔 겁니다. 어쩌면 인류 문명은 암울하게 바뀔지 모릅니다. 하지만 인류 문명이 바뀐다면, 진보 정당들이 힘을 얻을 수 있을지 모릅니다. 따라서 진보 정당들은 유치하거나 어리석지 않습니다. 오히려 어리석은 쪽은 세상이 바뀌지 않는다고 비아냥거리는 사람들입니다. 세상이 계속 바뀌었기 때문에 민주당 같은 거대 부르주아 정당 역시 나타날 수 있었어요.

우리는 무엇이 언제 세상을 바꿀지 모릅니다. 세상이 바뀐다고 해도, 무엇이 바꿀지 우리는 정확히 알지 못합니다. 기후 변화가 지배적인 체계를 끝장낼 수 있을까요? 아니면 기술적 특이점이나 슈퍼 바이러스가 지배 계급들을 몰아낼까요? 아무도 장담하지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준비해야 합니다. 기회가 왔을 때, 우리는 그 기회를 잡아야 합니다. 우리가 준비하지 않는다면, 아무리 황금 같은 기회가 온다고 해도, 우리는 기회를 놓칠 겁니다. 미래를 준비하고 싶다면, 우리는 뭔가 희망을 품어야 합니다. 암울한 경고는 사람들을 더욱 큰 절망의 수렁으로 밀어넣을지 모릅니다.

 

왕년에 카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공상적인 사회주의를 비판했습니다. 영어권에서 공상적인 사회주의는 유토피아 사회주의라고 불립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사람들이 미래 청사진을 그려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무도 미래를 정확히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파악하고, 그저 그것들에 저항할 수 있을 뿐입니다. 마르스크와 엥겔스가 강조한 과학적 사회주의, 공산주의 정신은 이런 겁니다. 저는 근본적으로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옳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우리가 미래 청사진을 그린다면, 우리는 맹목적으로 청사진을 숭배할지 모릅니다. 미래 청사진은 우상이 될지 모릅니다. 인간은 쉽게 우상에 빠질지 모르고, 그래서 우리는 우상 숭배를 경계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해도 우리가 아무 희망을 품지 말아야 할까요? 청사진은 위험하겠으나, 간단한 나침반은 괜찮을지 모릅니다. 생태적인 유토피아 소설들은 작은 희망, 간단한 나침반이 될 수 있겠죠. 저는 SF 소설들이 미래 청사진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생태적인 유토피아 소설들조차 그저 현실을 반영할 뿐입니다. 하지만 생태적인 유토피아 소설들은 사람들을 격려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이런 관점에서 저는 <인간 종말 리포트>보다 <홍수>가 더 낫다고 생각합니다. 마가렛 앳우드는 좋은 소설들을 썼으나, <인간 종말 리포트>는 너무 암울하게 보입니다. 반면, <홍수>는 뭔가 희망을 제시하고, 대안 공동체를 보여줍니다. 저는 이런 대안 공동체가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사람들이 어느 정도 대안을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차이나 미에빌이 쓴 스팀펑크 판타지 <페르디도 거리의 기차역>을 읽었을 때, 저는 이런 점이 아쉬웠습니다. <페르디도 기차역>은 자본주의 도시를 열심히 풍자합니다. 비참한 빈민가들, 폭력적인 정부와 파업 분쇄자들, 연약한 노동 조합, 더러운 산업 폐기물들, 지옥 같은 기후 변화, 소수자 차별, 기타 등등. 하지만 차이나 미에빌은 그저 열심히 자본주의 도시를 풍자할 뿐이고, 대안을 제시하지 않습니다. 평등을 강조하는 사막 가루다 사회는 대안 사회가 될 수 있을지 모르나, 가루다 사회는 커다란 비중을 차지하지 않아요.

어쩌면 차이나 미에빌은 자신이 함부로 대안을 제시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아무도 미래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미에빌은 그저 자신이 현실을 경고할 수 있을 뿐이라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에릭 블랑과 <옥토버>를 이용해 대담할 때, 미에빌은 그런 시각을 드러내더군요. 진부한 낙관론은 위험해요. 그렇다고 해도 저는 <페르디도 기차역>이 대안 공동체를 보여줬으면 좋았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현실 속에서 우리는 암울한 상황을 얼마든지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대안 공동체를 쉽게 볼 수 없어요. (이는 현실 속에 대안 공동체들이 아예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래서 엘리너 아나슨은 킴 스탠리 로빈슨을 언급합니다. 킴 스탠리 로빈슨은 <퍼시픽 엣지>, <푸른 화성>, <2312> 같은 생태적인 유토피아 소설들을 썼습니다. <2312>에서 인류는 비극적인 시대를 떨치고, 다른 행성들을 지구화하거나 우주 인공 생태계를 만듭니다. 심지어 우주 인공 생태계는 생물 다양성을 보존하는 장소가 됩니다. 예전부터 킴 스탠리 로빈슨은 유토피아 소설이 중요하다고 강조했습니다. 킴 로빈슨은 사람들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보여주기 원했습니다. 결국 아무도 대신 세상을 바꾸지 않습니다. 뭔가가 세상을 바꾼다면, 그것은 우리여야 합니다.

그래서 킴 로빈슨은 포스트 아포칼립스보다 생태적인 유토피아를 씁니다. 사실 이런 유토피아 역시 포스트 아포칼립스를 품었습니다. 킴 로빈슨이 쓴 <와일드 쇼어> 같은 소설은 정말 포스트 아포칼립스이고, <비의 마흔 징표들> 같은 소설은 포스트 아포칼립스와 비슷하죠. 비록 <와일드 쇼어>와 <비의 마흔 징표들>과 <퍼시픽 엣지>와 <푸른 화성>과 <2312>가 순차적으로 이어지지 않는다고 해도, SF 독자들은 이런 소설들이 일종의 연대기라고 간주합니다. 킴 로빈슨 역시 포스트 아포칼립스를 썼습니다. 하지만 킴 로빈슨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고, 훨씬 멀리 나갔습니다. 희망을 품고.

 

게다가 엘리너 아나슨은 킴 스탠리 로빈슨이 정치와 경제 문제를 고민한다고 말합니다. 네, 맞아요. 진짜 문제는 정치 경제학이죠. 기술적인 부분은 부차적인 문제입니다. 기술적인 부분 역시 중요하나, 핵심은 정치 경제학입니다. 엘리너 아나슨은 인류에게 기후 변화를 막을 수 있는 기술력이 있다고 믿습니다. (아나슨이 잡지에 글을 실은 2013년에는 이런 믿음이 틀리지 않았을지 모르나, 2018년은 이미 늦었죠.) 문제는 기술력을 구현할 수 있는 상당한 자원이 금융 권력들과 소비 문화에 얽혔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엘리너 아나슨은 금융 권력들을 비판합니다. 상당한 자원과 자금은 금융, 보험, 부동산 권력에 얽혔습니다. (2013년에) 미국에서 이것들은 국가 경제의 65%를 차지했습니다. 이런 자금은 투기로 흘러가고, 결국 2008년 금융 대란 같은 경제 공황을 터뜨립니다.

만약 현대 문명이 이런 막대한 자금을 이용할 수 있다면, 기후 변화에 좀 더 적극적으로 대처할 수 있을 겁니다. (엘리너 아나슨이 잡지에 기고한 2013년에 현대 문명이 막대한 자금을 이용할 수 있었다면, 기후 변화를 막을 수 있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금융, 보험, 부동산 권력은 그런 자금을 다시 투기에 쏟아부을 겁니다.

 

엘리너 아나슨은 제임스 핸슨과 빌 매키븐 같은 과학자들과 환경 운동가들을 언급합니다. 제임스 핸슨은 대기업들이 더 이상 원유, 석탄, 천연 가스, 셰일 가스, 타르샌드를 퍼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합니다. 대기업들이 그것들을 퍼낸다면, 기후 변화는 훨씬 지독해질 겁니다. (하지만 결국 환경 운동은 이런 착취들을 제대로 막지 못했죠. 그래서 미래 세대는 기후 변화가 몰려오는 꼬락서니를 봐야 합니다.) 수압 파쇄 시추와 콜타르 채굴은 많은 물을 오염시킵니다. 수압 파쇄 시추는 강력한 온실 가스인 메탄을 방출하고 물을 오염시킵니다. 엘리너 아나슨은 수압 파쇄 시추지 주변에 사는 사람들이 무엇을 마시고 있는지 정확히 알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맥주를 만들기 위해 깨끗한 물이 필요하기 때문에 미국 양조장들은 수압 파쇄 시추를 걱정합니다. 엘리너 아나슨은 묻습니다. 우리가 무슨 세상을 원할까요? 기후 변화가 몰려오고 맛있는 맥주가 없는 세상? 생물 다양성이 풍부하고 맥주가 맛있는 세상? 당연히 대부분 사람들은 후자를 선택할 겁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행동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뭐가 문제인지 모릅니다. 문제를 안다고 해도, 그들은 대안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티나(TINA)는 정말 악독합니다.

 

기후 변화에 대처하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은 행동에 나서야 합니다. 하지만 대안이 없다고 절망한다면, 그들은 행동에 나서지 못할 겁니다. 그래서 엘리너 아나슨은 유토피아 소설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엘리너 아나슨이라는 SF 작가를 제대로 알지 못합니다. 저는 그저 <오늘의 SF 걸작선>에 실린 <방랑자의 시>를 읽었을 뿐입니다. 엘리너 아나슨이 자본주의 시장 경제를 제대로 분석할까요? 경제 공황이 터지는 진짜 이유는 과잉 생산이 금융 거품과 맞물리기 때문입니다. 금융 권력은 진짜 문제가 아닙니다. 누군가가 금융 권력이 2008년 경제 공황을 터뜨렸다고 말한다면, 그건 반쪽짜리 분석입니다. 엘리너 아나슨은 그런 반쪽짜리 분석을 믿을지 모릅니다. 그래서 저는 뭐라고 자세히 말하지 못하겠군요. 기후 변화에 대처하기 위한 핵심적인 해결책은 생산 수단의 사회적인 공유입니다. 엘리너 아나슨은 여기에 동의하지 않을지 모릅니다. 아나슨은 그게 악독한 빨갱이 짓거리라고 생각할지 모르죠.

하지만 엘리너 아나슨은 유토피아 소설이 필요하다고 주장했고, 그런 주장은 타당합니다. SF 유토피아 소설이 자본주의를 비판하고 생산 수단의 사회적인 공유를 주장한다면, 훨씬 좋을 겁니다.

 

※ 이 글은 개인 블로그의 비평문을 편집 및 수정한 글입니다.

OneTiger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