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벤져스: 인피니티 워(2018) [스포일러 포함]
스포일러 주의:
본 글은 영화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2018)”에 대한 강력한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영화를 아직 보지 않으셨고 아직 결말을 알고 싶지 않으신 분들은 그대로 뒤로 가기 버튼을 눌러주시면 되겠습니다.
전날 과음한 후 아침 일찍 친구와 함께 택시 타고 인피니티 워를 보러 갔습니다. 민들레 대포 덕분에 머릿속이 온통 꽃밭 지옥이었지만 그럼에도 인피니티 워를 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언제 어디서 어벤져스 스포일러 당할지 모르는 일상적 공포에서 하루빨리 벗어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영화가 끝났을 때는, 제가 과음 탓에 헛것을 본 게 아닌가 엔딩 크레딧을 바라보면서 심각하게 고민해야 했습니다. 도대체 뭐지? 내가 방금 무엇을 본 거지? 인피니티 워가 이렇게 끝난다고? 정말로?
그제야 인피니티 워의 ‘인’ 자만 나와도 입이 근질거려서 꾹 참으려고 했던 친구들의 표정이 스쳐 지나가더라고요. 이걸 스포일러 안 하고 참았다니, 제가 도대체 얼마나 가혹한 짓을 한 걸까요… (하지만 만약 스포일러 했다면 제가 그 자리에서 소주병으로 더욱 가혹한 짓을 했겠지요.)
아무튼, 그런 영화였습니다. 당장에라도 영화 감상을 어딘가에 털어놓지 못하면 미쳐버릴 것 같은 그런 영화. 아직 영화 못 본 친구들의 얼굴이, 그리고 그들이 영화를 보고나서 지을 표정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영화. 그래서 좋았냐고요?
글쎄요.
우선 영화를 다 보고나서 처음으로 떠오른 건 게임 “뉴 단간론파 V3 -모두의 살인 신학기-(2017)”였습니다. 앗, 아직 “뉴 단간론파 V3 -모두의 살인 신학기-(2017)” 결말을 모르신다면 뒤로 가기 버튼을 눌러주세요…
아시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뉴 단간론파 V3는 그야말로 지금까지의 단간론파 시리즈와 그 팬들을 기만한 작품이었습니다(주관적 감상). 단간론파 시리즈는 사실 허구의 이야기였다… 즉 제가 좋아하는 나나미 치아키의 눈물겨운 두 번의 죽음도, 희망도, 미래도, 전부 없었던 이야기라는 겁니다. 이걸로써 단간론파 시리즈의 후속작 나오는 것은 물론, 그 이후의 이야기를 플레이어끼리 상상하는 것조차 무색하게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뉴 단간론파 V3의 ‘충격적인 반전’을 위해, 츈소프트는 시리즈 전체를 팔아버린 겁니다. (전부 주관적 감상입니다.)
인피니티 워에서 비슷한 감상을 받은 이유는 아마 마지막에 허무하게 사라진 영웅들 때문이겠지요. 명예롭거나 비극적인 죽음도 아닙니다. 그냥 먼지가 되어 사라집니다. 허탈하고 허무합니다. 아마 자기가 좋아하는 영웅이 잿덩이가 되어 사라지는 걸 보면서 본인 스스로도 극장 의자 위에서 파스스 무너져버린 사람들도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인피니티 워는 비극적인 결말을 보여주기 위해서, 지금까지 승승장구 하고 있던 많은 히어로들을 한줌의 재로 만들어버렸습니다. 그야, 무작위로 인류의 절반이 죽는데 영웅들이 전부 살아남는다면 그것 또한 이상하겠습니다만, 그렇다고 이전까지 호평 받던 스파이더맨,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블랙 팬서 같은 영웅들을 죽여버린다? 글쎄요, 그냥 비극적인 결말을 위해서 영웅들과 이전작들을 소모했다는 생각밖에 안 드네요.
물론 인피니티 워와 뉴 단간론파 V3 사이에는 결정적인 차이점이 있습니다. 그건 후자와 달리 전자는 아직 후속편이 남아있다는 점입니다.
추측하건데, 인피니티 워의 결말, 그리고 어벤져스4의 스토리는 이미 MCU 초기 때부터 이미 결정되어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저작권 문제로 갈팡질팡 하던 스파이더 맨을 시빌워에 참여시키는 등, 등장인물을 추가하는 데에 유연한 모습을 보였던 것도 아마 어차피 사라질 영웅이기 때문이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살아남은 히어로를 보면 캡틴 아메리카, 블랙 위도우, 아이언맨, 토르, 헐크… 거의 대부분이 원년 멤버입니다. 어벤져스4는 이미 한참 전부터 구상되어 왔음을 암시하는 게 아닐까요?
그러니까 어벤져스4는 기존의 어벤져스 멤버들이 타노스에게 복수를 하는 내용일 것입니다.. 게다가 스파이더 맨, 닥터 스트레인지 등 후속 영화 제작이 결정된 영웅들이 소멸된 것을 보면, 이들이 승리하는 것은 기정사실인 것으로 봐도 될 것 같습니다. 즉, 뉴 단간론파 V3와 달리 이들에게는 막판 뒤집기가 남아있다는 것입니다. 이전작들과 영웅들을 이대로 날려버리지 않는 방법이 아직 남아있다는 것이죠.
하지만 이렇게 되면 또 다른 문제가 있는데, 그건 소멸된 영웅들의 죽음이 너무 얄팍해진다는 것입니다. 방금 전에도 말했지만, 소멸된 영웅 중에는 후속 영화가 나오는 게 결정된 이들이 많고, 따라서 우리는 그들이 다시 살아날 것이라는 사실을 금방 예상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죽인 거죠? 죽어도 다시 산다는 걸 이미 알고 있다면, 죽이는 게 의미가 있는 걸까요?
비극적으로 다가와야 할 죽음의 의미가 가볍게 느껴질 수밖에 없습니다.
영화의 제목이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이긴 합니다만, 제가 보기에 이 영화의 주인공은 타노스입니다. 타노스의 입장에서 보면 스토리의 기승전결이 확실해지죠. 여섯 스톤을 모아서 세계 정복의 목표를 이룬다는 커다란 뼈대부터, 소중한 딸을 잃어야 하는 슬픔, 아이언맨과 닥터 스트레인지를 상대해야 했던 힘든 전투, 그리고 마지막 고비였던 토르까지… 태양을 바라보며 미소를 짓는 결말에서는 승리한 주인공의 여유까지 느껴집니다.
항상 히어로 영화를 볼 때마다 ‘빌런이 승리하는 히어로 영화가 나오면 꽤 신선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 적도 있었습니다. 어차피 히어로 영화는 영웅이 빌런의 사악한 음모를 제압하고 세계를 구한다는 것을 뻔히 알고 보는 것이긴 합니다만, 솔직히 그것 때문에 좀 뻔해지는 감이 없지 않아 있거든요.
하지만 그건 그것이 독립된 영화일 때의 이야기지, 시리즈 영화에서라면 이야기가 또 달라집니다. 게다가 후속 영화 계획이 어느 정도 밝혀져 있는 MCU 영화의 이야기입니다. 타노스의 승리는, 어째서인지 인피니티 워가 독립된 영화가 아니라, 어벤져스3에서 어벤져스4로 이어지는 커다란 이야기의 전반부처럼 느껴지게 됩니다. 위에서 지적했던 점과도 이어집니다. 히어로의 승리가 예정된 시리즈에서 빌런의 승리는 ‘전부 끝났다’는 인상보다는 ‘아직 안 끝났다’는 느낌이 더 강합니다. (차라리 어벤져스4 부제가 인피니티 워II면 모르겠는데, 그건 또 아니라고 하더군요.)
결국 영화에서, 영웅의 절반을 증발시키고 빌런을 승리시키면서까지 말하고자 한 것은 무엇이었던 걸까요? 소중한 동료를 지키기 위해 자신의 임무를 다하지 못한 이들의 실패? 소중한 사람을 잃으면서까지 대의를 지키고자 한 타노스의 승리? 타노스란 우주 최악의 빌런에게도 부성애가 있었다는 것? 그냥 팬들에게 ‘핫하 죽어라!’를 선사하고 싶었던 마블 제작진의 인성?
조만간 타노스가 승리해야 했던 이유라던가 인피니티 워 결말에 대한 해석 같은 글들이 커뮤니티에 올라가겠지만, 제가 그걸 읽고 과연 납득을 할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네요.
제가 인피니티 워를 보기 전에, 트위터에서 듀나 선생의 인피니티 워 감상 트윗이 잠깐 화제가 됐었던 적이 있습니다. 으음, 누군가는 ‘논란’이라고 말하겠지만, 제가 보기에는 그게 딱히 논란이 될만한 건 아니었던 것 같고.
솔직히 MCU 세계관이 지구 중심적이라는 건 누구나 다 아는 사실 아닌가- 앗 방금 ‘아닌데!’라고 생각하면서 ‘닥터 스트레인지’나 ‘토르,’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를 떠올렸습니까? 진심인가요? 왜냐하면 제가 MCU 세계관이 지구 중심적이라고 느꼈던 이유가 특히 그 셋 때문이니까… 하아, 지구인 너무 강력한 종족이라서 너무 무서운 것이에요.
듀나 선생의 트윗은 인피니티 워를 보고나면 자연스럽게 나오는 감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전반적으로 그 내용에 동의하고요. 인피니티 스톤이 MCU 세계의 자연스러운 일부가 아니라 스토리를 이끌기 위한 편리한 도구라는 점, 굉장한 스케일에 비해 그 무게가 가볍다는 점… 가장 공감하는 건 역시 “중성자별의 에너지를 이용할 수 있는 문화권에서 19세기 맬서스 주의가 왜 나와요” 부분이네요. 그러니까요. 멜서스주의 빌런 설정에 너무 편리하게 사용되는 것 같은데. 이걸 멜서스 본인이 알게되면 어떻게 생각할까요?
아무튼 결론은, 잘 모르고 무식한 사람이 신념을 가지면 무섭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인피니티 워가 무리수를 둔 재미없는 영화였냐고 하면 그건 아닙니다. 영화 전체적으로 깔린 몰입감과 절망감은 대단했어요. 하지만 인피니티 워에 대한 칭찬은 이미 많이 들으셨을 거라고 생각하네요 (심지어 **위키에도 혹평마다 전부 반론이 달려있던데) 저는 개인적으로 아쉬웠던 부분들을 짚고 넘어가고 싶었을 뿐입니다.
출처: http://thousandfall7.tistory.com/146 [천가을(千秋)는 작가의 꿈을 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