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귄 선생을 추억하며..
보통 글자를 몇살때 배우지요?
전 초등학교 2학년때 까지도 글자를 못읽었어요.
그때는 나란 인간이 남이 정규화된 교육과정을 거쳐 가르쳐주는 지식을 절대 못받아 먹는 부류의 사람이란걸 몰랐거든요.
아무튼 아버지가 걱정이 되셔서 세로읽기 판본으로 쓰여진 한자 한가득의 굉장히 야한 무협지를 던져주셨어요. 이러든 저러든 재미난 이야기면 빠져서 읽게 될것이고 그러다 보면 글자도 자연히 익히지 않을까? 란 취지였던거 같고 다행히도 성공했지요.
책 읽는데 재미가 들리니 공부건 애들이랑 노는거건 다 시들하고 그냥 책만 보고 싶은거에요.
강남역에 있는 국립 도서관 까지 걸어서 한 1시간이면 가는 거리에 살았는데 주말되면 어머니가 점심 사먹으라고 몇천원 쥐어주셨어요. 아침에 일어나서 도서관가서 책보다 점심에 빵이랑 우유 사먹고 저녁때 까지 책보다 돌아오곤 했지요.
나중가선 밥 사먹는것도 귀찮아서 그냥 점심 굶고 돌아오는길에 강남역 지하 오락실에서 점심값 다 탕진하고 오곤 했지만.. ㅎㅎ
아무튼 막 새로운 취미를 개척하면 뚜렷한 자기 취향이라 할만한걸 모르잖아요? 그냥 유명하다는 고전부터 닥치는대로 다 봤지요. 대부분 뭐 이딴게 대단한 이야기라고 호들갑 들이람? 싶은 감상이었지만..
그러다 아동 도서중에 지금도 또렷이 제목이 기억나는데 마녀 사냥때 어머니가 불타 죽은 가족의 이야기를 다룬 ‘어머니는 마녀가 아니에요’와 ‘꼬마 바이킹 비키’를 읽고 ‘아 이런건 정말 재미있구나. 일단 제목이 멋있으면(?) 재미난 책일 가능성이 높구나!’라고 생각했더란 말이지요.
그래서 도서관 책장을 뒤지다 그 당시에 ‘암흑의 왼손’ 이라고 나왔던 르귄 선생의 그! 소설을 읽었지요. 제목부터 환상적이잖아요? ‘암흑의 왼손’ 이라니.. 세상에..
왜 ‘인생의 뭐뭐’ 하는걸 접하면 그 순간 바로 딱 감이 오잖아요? 이게 도대체 뭔소리인지 이해는 잘 안가는데 설명하기 힘든 강렬함. 이제껏 내가 생각해본적도 없는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을 보여줬다고나 할까..
바로 이어서 ‘어스시 이야기’를 읽었지요. 지금 까지도 문장이 머리속에 쉴새없이 들어와 박히듯 읽은 책은 그게 유일할 거에요.
게드가 언어를 잃는 과정, 오지언과 지내는 부분, 해리포터 말포이 역의 라이벌과 투닥 거리는 대목들의 빈정거림 하나하나, 마지막 피날레의 게드의 대사 까지도 너무 선명하게 말이지요.
1부만큼은 아니지만 썩 나쁘지 않았던 2,3부를 거쳐서 ‘테하누’를 읽는데 와… 이건 내가 막 뺨을 두들겨 맞는 기분인거에요.
요새 스타워즈 팬들이 ‘라스트 제다이’에서 루크 스카이워커를 다루는 방식에 분노하는데에 한 10배? 진짜 얼마나 화가 났냐면 영어도 하나도 못하던 제가 사전 뒤져서 항의 하는 편지 써서 펭귄 북스? 던가 출판사에 보냈을 정도니…
물론 나이 들어서 ‘테하누’를 다시 읽고는 정반대의 감상을 받았지만요. 세상엔 죽기전까지는 ‘다 이루었다!’하고 장대 꽂고 끝나는 전설 같은 삶이란 없다는걸 알았거든요.
그러니깐 참 여러가지 방식으로 저한테 세상을,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을, 그걸 받아들이는 사유를 가르쳐 준 작가이자 선생님이 르귄이었어요.
좀더 취향에 맞는 작가를 뽑자면 스티븐 킹이나 고룡 이나 미하엘 엔데 같은 작가분들도 있겠지만 르귄 선생은… 이야기로 저란 인간을 형성하는데 영향을 준 유일한 분이지요.
사실 계약한 장편 소설이 나오면 다시 한번 편지를 써보내볼까? 생각 했었거든요. 예전처럼 답장도 못받을테고 어떻게 생각하실지도 모르겠지만 ‘당신 덕분에 나란 인간이 세상 살고 있고, 작가도 되었다’는 내용을 그냥 보내보고 싶었어요.
이제는 늦은것 같지만 여러모로 감사했다고 게시판에라도 남겨봅니다.
PS. 기분이 멜랑꼴리 해서 손에 잡히는대로 르귄 선생의 글을 다시 읽고 있는데 ‘기프트’도 좋고 ‘빼앗긴 자들’도 좋지만 역시 르귄 선생의 최고작은 ‘어스시 이야기’와 ‘테하누’ 그리고 ‘어둠의 왼손’인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