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게시판

까는 건 쉽습니다

분류: 수다, 글쓴이: 하늘, 17년 12월, 댓글22, 읽음: 204

몇 년 전에 영화 리뷰 블로그를 운영한 적이 있어요. 한 넉 달 정도인데, 열심히 써서 리뷰가 한 5~60개 정도 쌓였던 것 같아요. 리뷰의 내용은 보잘것 없었지만 당시에는 영화를 꽤 많이 보기도 했고, 인터넷에 뭐라도 남겨놓고 싶어서 나름 성의있게 운영했어요. 매일 보는 영화들을 정리해서 올리고. 별점을 매기고. 그것도 나름 몇 달 모이니까 그럴싸하더라고요. 몇 개는 네이버에서 추천 리뷰로 선정도 되고 (금색 트로피 같은걸 리뷰 옆에 붙여 줍니다) 어차피 잉여의 삶인 건 마찬가지라 지금까지 계속됐으면 수백 편이 됐을테니 꽤나 좋았을 터인데.

블로그를 중단하게 된 계기가 있어요. 저는 그 때 최신 영화와 예전 영화를 구별해서 리뷰를 하고 특히 그 중에서 고전 취급을 받거나 엄청나게 오래 된 영화들은 따로 페이지를 분류해서 기록해 두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거든요. 블로그를 한다는 건 당시의 저에게 특별한 일이었으니까. 거창하게 이것저것 하고 싶었어요. 예전에 아카데미상 받은 영화들도 보고, 옛날 한국 영화들라든가, 블로그를 하지 않았다면 보지 않았을 그런 영화들을 보고 소감을 남기면서 상식의 저변을 넓히려고 했거든요.

그리고 예전 한국 영화들을 하나씩 봤는데, 의외로 재밌더라고요. 내가 태어나기도 전 영화들. 당시에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어떤 게 인기 비결이었는지, 지금 와서는 얼마나 낡아 있는지 확인하고 글로 쓰는 게 생각보다 즐거운 과정이라고 생각하면서 블로그를 계속 하는 원동력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싶었어요. 그 때는 그게 블로그를 접는 계기가 될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는데.

지금 와서 돌아보면 그걸 그만둔 건 영화 한 편 때문이었어요. 예전에는 유명했지만 지금은 아시는 분이 별로 없을 것 같은데요. 90년대 초반에 개봉했던 장선우 감독의 ‘경마장 가는 길’이라는 영화에요. 그걸 제가 아는 분이 추천하더라고요. 예전 한국 영화 중에서는 그게 괜찮다면서요. 저는 그 영화의 제목은 알고 있었거든요. 제가 어릴 때, 한창 인기였던 강수연이 나오던 엄청 야한 영화 정도로. 한데 어려서 당시에는 그 영화를 볼 기회가 없었고 나이가 들고 나서는 당연히 볼 일이 없으니 저에게는 제목과 포스터만 존재하는 구시대 유물 정도였어요. 이걸 혹시나 하고 검색해 보니 영상자료원 계정을 통해서 유튜브에서 공짜로 볼 수 있더라고요. 지금 봐도 좀 야한 영화인데;

그래서 그 영화를 볼 계획을 세우고 이런저런 검색을 했죠. 이 작품은 원작 소설이 있어요. 영화 개봉하기 몇 년 전에 쓰여진 하일지 작가의 장편이요. 혹시나 하고 시립 도서관 페이지를 찾아보니 저희 지역에도 그 책이 있더라고요. 당시 저는 원작이 있는 영화는 소설을 읽고 비교를 하는 걸 감상의 기준으로 삼고 있어서 그 때도 그렇게 하기로 마음먹고 도서관에서 그 책을 빌렸어요. 빽빽한 작은 글씨로 600페이지를 넘게 채워놓은 대단히 두꺼운 책이었는데, 그걸 보니 뭔가 도전 의식이 샘솟더라고요.

짬나는 대로 며칠을 쉬지 않고 읽었어요. 그 떄 저는 한 번도 글을 읽으면서 겪지 못했던 충격을 받았어요. 하일지의 ‘경마장 가는 길’은 압도적인 소설이었어요. 취향에 맞는 작품이 많이 없어서, 저는 우리나라 문학을 별로 읽지 않는 편이거든요. 순문학 쪽은 특히 그렇고요. 게다가 성적인 욕망을 적나라하게 다룬 글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그러니까 그 글은 저의 평소 독서 성향과 엄청나게 동떨어진 작품이었는데 읽으면서 숨을 쉴 수가 없더라고요. 세상 모든 지저분한 감정 다 그려놓은 것 같은, 어떻게 보면 추잡스럽고 구차한 내용의 극치였는데 그 감정의 단면들을 가감없이 세세히 펼쳐낸 작가의 집요한 필치가 너무 강력했어요. 마지막 장을 덮고 나니까 눈물이 멈추지 않더라고요. 저에게는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던 세계였어요.

그리고 영화를 봤는데, 영화도 꽤 완성도 있는 작품이더라고요. 영화로 옮기기가 쉽지 않은 스타일의 원작인데, 그런 것 치고는 수준급의 영상화라고 생각을 했어요. 옛날 작품이라는 걸 감안하면 더욱. 한데, 그렇게 영화와 소설을 세트로 보고 영화의 감상을 남기려니까.

글이 나오지 않는 거에요.

나는 이 영화를 분명 좋게 봤는데 스스로 어떤 면을 좋게 봤는지 알 수가 없었어요. 구체적인 장점을 전혀 짚어낼 수가 없는 거에요. 이야기가 가진 장점을 얘기해야 하는데 그게 뭔지도 모르겠고. 그렇다고 마냥 칭찬만 하는 건 불가능해요. 왜냐면 이건 심각할 정도로 바람직하지 못한 내용이고 비판받을 여지가 가득하니까. 그러니 이야기가 갖고 있는 장점을 이야기하려면 그 만큼의 단점을 말해야 해요. 그리고 그런 단점에도 불구하고 어떤 면이 뛰어난지를 짚어내야 하는데 그건 당시 저의 해석 능력으로는 불가능한 범위였어요. 아예 감조차 잡히지 않는 영화였으니까. 그렇다고 리뷰를 쓰는 걸 포기할 수는 없었거든요. 나는 이 영화의 감상을 위해 상당한 시간을 투자했고 엄청난 감정을 소모했으니까요.

그래서 쓰다 날리고 쓰다 날리고, 한 절반쯤 쓰다 보면 내가 왠지 거짓 소감을 말하고 있는 거에요. 그러면 또 지우고. 그렇게 슬럼프 아닌 슬럼프에 빠져 있다 제가 블로그에 몇 달간 쓴 글들을 보았어요.

죄다 영화들의 단점을 지적하고, 불평하고, 비판하는 글들밖에 없더라고요. 칭찬을 한 글들이 있긴 했으나 극소수였어요. 80퍼센트 이상이 영화를 까는 내용이었어요. 그리고 깨달았어요. 아, 내가 그동안 영화 리뷰하기가 쉬웠던 이유가 있구나. 그저 깎아내리고, 까는 데만 집중했으니까. 튀어나온 부분을 찾는 건 쉽거든요. 특히나 영화처럼 특정한 시간 안에 기승전결이 있는 이야기를 조리있게 만들어야 하는 경우에는.

왠지 회의가 몰려오더라고요. 좋은 점은 찾아내지 못하면서 안좋은 점만 집어내는데, 이렇게 남의 창작물 깎아내리기 급급한 블로그가 의미가 있을까. 그러면서 그 다음부터 글을 올리지 않게 되었어요. 처음에는 영화를 볼 때 장점 위주로 보고, 내가 감동한 영화들이 어떤 부분이 좋았는지를 파악하고 정리하는 식으로 시각을 바꾸어서 글을 올리면 해결되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갑자기 그렇게 사람이 달라지지가 않더라고요. 그리고 그렇게 영화를 보는 건 의외로 피곤한 일이었어요. 영화를 까는 글을 쓸 때가 훨씬 신나고 재미있었으니까.

몇 년 전 기억인데, 아래에 링크해 주신 비평에 관한 글을 보면서 생각이 났어요. 여전히 저에게는 어떤 대상의 단점이 잘 보이고, 그걸 찾는 건 쉬운 것처럼 느껴져요. 하지만 장점을 찾고 그걸 조리있게 말하는 건 어려운 일이에요. 해당 창작물의 당사자가 본다고 생각하면서 수위를 조절해 적절한 조언을 곁들인 글을 쓰는 건 더욱 어렵고요. 저는 이게 저만의 문제가 아닐거라고 생각을 해요.

그리고 항상 그런 유혹에 시달리고요. 어디서도 말할 일이 없는 얘기인데요. 저는 브릿G에서 어떤 작가님의 글을 읽고 한글로 한 너댓페이지 정도 되는 분량의 리뷰를 쓴 적이 있어요. 처음에 호기심에 읽다가 할 말이 생겨서, 이거 리뷰를 써야겠다 하고 시작을 하니까 아쉬운 부분들이 점점 늘어나다가 나중에는 분량이 넘치더라고요. 건설적인 비평을 쓴답시고 조목조목 단점을 지적하다 보니 끝도 없었어요.

한참 그렇게 글을 써놓고 등록하기 직전에 글을 다시 한 번 읽어보았는데요.

악담의 연속이었어요. 저는 그게 리뷰가 아니었던 것 같아요.; 제 글은 그 작가님의 근본적인 부분까지 헤집어 놓고 있었거든요. 그게 생산적인 것도 아닌 게, 내가 그런 글을 쓴다고 그 분이 지적받은 부분을 고칠 수 있는 것도 아니었거든요. 그 부분은 작가님의 개성 중 하나이고, 그걸 바꾸면 그건 그분의 글이 아닌 게 되니까요. 제가 하려던 건 그냥 무례한 행동이며 월권이었어요.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드는 거에요. 아, 이건 보여주면 안 되는 글이구나. 그리고 바로 그 글을 지웠어요. 아마 해당 리뷰의 대상이 된 작가님이 그 글을 보셨으면 크게 상처를 받았을 거에요. 그 리뷰를 올리지 않은 건 제가 브릿G에 들어와서 한 것들 중 가장 잘한 일이었어요.

저는 브릿G에 열 편 가량의 리뷰를 남겼는데요. 부족한 글들이지만 감사하게도 모두 추천 리뷰가 되었어요. 그 중에서는 제가 지금 쓰면 더 잘 쓰겠다 싶은 글도 있고, 올리지 말았어야 했다 싶은 리뷰도 있고, 아, 이건 내가 정말 잘했다(!) 싶은 리뷰도 있어요. 내리고 싶은 글들도 있지만 그러지 않을 생각이에요. 여기 쓰는 글들은 블로그의 영화 리뷰랑은 또 다르니까.

이런 글을 자게에 남기는 이유는 제 스스로 남의 창작물을 말할 때는 좀 어려운 길을 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에요. 물론 지키기는 쉽지 않겠지만요. 여전히 제 자게의 영화 감상 글들은 불평 불만으로 가득하고 저에게는 보다 그게 손쉬우니까. 한 발만 들이면 쉽게 걸어갈 수 있는 길이니까.

한편으로는 브릿G에서 제가 받은 리뷰들에 대해서 새삼 감사하게 돼요. 리뷰를 올려주신 분들은 대부분 제게 칭찬을 해주셨거든요. 내 글에 단점이 없을 리가 없는데. 형편없는 부분들이 내 눈으로도 보이는데. 저는 제 글을 유일하게 읽어주는 친구에게 공모전 제출 용으로 쓴 글을 보여줬다 한 시간동안 까이고 ‘세상에 이런 지루한 글을 읽을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까지 들었어요. 며칠간 나름 감정을 쏟아붓고 몸을 깎아가며 쓴 글에 대해 그런 말을 들어서 너무 큰 타격이었거든요. 다른 분들이라고 그런 마음이 없었을 리가 없어요. 미처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어요.

하여간 리뷰 게시판에서 활동하시는 분들에게 정말 수고하신다는 얘기를 하고 싶어요. 이런저런 선을 다 맞춰가며 글을 쓴다는 건 굉장한 심력을 소모하는 일인데 그걸 기꺼이 해내시니까요. 언제나 감사하고, 응원합니다. 저는 브릿G에 올라오는 대부분의 단편들을 한 번씩은 다 클릭해보는데요. 눈팅만 하지 말고, 다시 또 리뷰에 도전해야겠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아, 그리고 한가지 덧붙이자면요. 이까지 글을 읽으신 분 중에 혹시나 ‘경마장 가는 길’이 궁금하신 분이 있을까봐 드리는 말씀인데, 영화와 소설 모두 추천하지 않습니다. 딱히 보편적으로 공감을 일으킬만한 내용도 아니고 굉장히 노골적이고 불쾌한 글에 가까워요. 특히나 이 작품에서 다루는 감성은 지금 와서 보면 더욱 낡아 있어서 어떤 방식으로도 포장이 되지 않아요. 저는 제 평생 가장 인상적인 독서 경험 중 하나였는데도 이 책을 두 번 읽지 않았고 하일지 작가의 글을 찾지 않았어요. 앞으로도 볼 일이 없을 테고요. 이런 경험은 한 번으로 충분하거든요.

하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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