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게시판

으으, 저는 식견이 짧은 것이 분명합니다.

분류: 수다, 글쓴이: 박짝, 17년 10월, 댓글21, 읽음: 117

<촉발의 순간>을 읽고서 몇 시간째 자꾸 저 생각이 떠나질 않았습니다. 부끄러운 고백을 해야만 마음이 편해질 것 같아 새벽에 뻘글을 씁니다.

저는 저번에 장편 리뷰를 하겠다고 글을 올린 적이 있습니다. 그때 단 댓글엔 진짜 고민했던 문제가 있었습니다.

“이로써 제가 장편 소설에 수준 낮은 리뷰를 써도 그러려니 하시는 분들이 많아질 것 같아 다행입니다. 하하”

수준 낮은 리뷰.
앞으로 계속 장편 리뷰를 계속 쓸테니 이것에 대해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절대 자학이나 겸양의 말이 아닙니다. 주제파악이지요 하하.

아, 다행히 첫 리뷰는, 전체의 절반만 읽고 쓴 비판적 리뷰였음에도 불구하고, 작가님께서 아량 넓게 이해해 주셨습니다. 추가로 뒷부분 리뷰를 의뢰해 주시기도 했고요. 자학이나 겸양에 대한 글이 아니니, 자랑도 좀 하자면, 200골드나 걸렸습니다!(환호!) 그럼에도 여전히 양심고백하듯 제 수준을 밝혀야만 앞으로 마음 편히 리뷰를 쓸 수 있을 것 같아서 부끄러운 고백을 남깁니다.

자랑할 일은 아니지만, 저는 정말로 문학적 식견이 부족합니다. 여태 수학을 도구 언어로 하는 물리를 오랫동안 공부한 습관이 녹아 있어, 문장과 글 전체를 보는 시각도 많이 다릅니다. 더구나 책을 많이 읽지도 않고, 그마저도 편식이 심합니다. 늘 쉽게 구체적으로 떠올릴 수 있는 글을 선호합니다. 학창시절에 잠깐 있었던 난독증 이후 생긴 습관 내지는 취향이기도 합니다. 시도 사변적인 시보단 체감되는 백석 시를 좋아하는 까닭도 이러합니다. 때문에 어떤 글이 좋은 글인지 바라보는 시각도 다수와는 많이 다릅니다. 이런 성향은 의지나 노력으로 쉽게 고쳐지지 않을 겁니다.

‘내 식견이 정말 부족하구나!’ 라고 다시 한번 크게 느낀 것이 몇시간 전, <촉발의 순간>을 읽고 난 뒤입니다. <촉발의 순간>을 읽고 제가 받은 느낌은, 물리학자가 잘 써진 수학 전공서적을 읽는 느낌이었습니다. 아마 다른 분들은 대부분 수학자처럼 읽으신 것 같습니다.

잠시 부연 설명 들어가겠습니다.

물리학자가 사실 수학에 모두 능한 아인슈타인같은 이미지가 있지만, 극소수 분야를 제외한 대부분은 수학을 철저히 언어로서 이용만 하거든요. 자연 현상을 기술하기 위한 도구로서 수학적 결론들을 이용합니다.

반면 수학자는 정의, 증명, 정리를 통해 특정 이론을 기초부터 생성시켜보고, 다르게 이해할 수 없는지 이리저리 뜯어보고 더 세련되고 깔끔한 증명을 찾아내고, 더 아름다운 언어로 기술하려고 노력합니다. 참신하고 새로운 정의와 정리로 복잡다단한 문제를 명쾌하고 아름답게 풀어내기도 하지요.

다른 것을 위한 도구로 보느냐, 혹은 그 자체의 아름다움을 찾느냐. 수학을 보는 관점이 완전히 다른 거지요.

“자연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수학을 사용한다.”는 자연과학적인 사고에 대응시켜 보자면, 서사가 자연현상이고, 문장이 수학이라 생각하면 비슷할 겁니다.

“서사를 설명하기 위해 문장을 사용한다.”

저는 문장 자체보다는 늘 서사에 관심이 큽니다. 문장이 서사를 따라가는데 큰 영향을 주는 것은 부인할 수 없으나, 일단은 늘 서사를 중심으로 봐요.

문장은 그래서 늘 그 다음입니다. 소리 내어 읽어 보고, 쉽고 재미있다. 서사 구조에서 어긋나지 않다. 작품 속 시대상과 사회윤리적 기준에서 부합한다. 개연성이 있다. 이런 간단한 기준에서만 문장을 판단합니다. 더 나은 단어, 더 나은 문장은 언제나 좋지요. 그러나, 도구로서 제 기능을 한다면 일단 충분하다고 여깁니다. 그 뒤에 판단이 “도구로서 충분하다” 까지인 것이지요.

물론 선호하는 문체는 있습니다만, 제겐 그 중요도가 서사나 장르적 특성에 앞서진 않습니다.
예컨대, 제가 즐겨 읽는 글은 하드보일드 문체로 쓰여진 글이지만, 제가 쓰는 군상극엔 수많은 인물들이 등장할 텐데, 그때마다 모조리 그런 문체로 쓰자면 묘사가 너무 방대해지고 늘어질 거란 판단에 감정이나 생각을 직접 던져 놓을 때가 많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제가 명문을 꼽는다면. 문장 자체보다도 앞뒤 서사로 비추어 봤을 때 이런 맥락에서 이 문장이 좋다! 이런 얘기만 할수 있을 겁니다.

제가 왜 이런 말을 하냐면,
여기 계신 작가님들은 대부분 문장 구성에 대한 미적 감각이 풍부하신 것 같아요. 문장에 대한 감수성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장편 소설을 쓰시는 분들 중에도 분명 그런 감수성으로 문장을 적어 두신 분들이 있을 겁니다. 근데 그런 작품을 제가 리뷰하면 문장에 대한 섬세한 느낌은 잘 모르고 지나갈 가능성이 굉장히 높습니다. 오히려 기분나쁜 소릴 할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미리 이렇게 까놓고 고백을 하려는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렸듯, 저는 이런 문장에 대한 감수성이 굉장히 메말라 있거든요.

<촉발의 순간>을 읽고서 ‘한 문장에서 단순한 단어로 저렇게 풍부한 감정을 느낀다니, 신기하다!’ ‘저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네!’ 라고 따라가볼 수는 있었지만, 풍부하게 공감하지 못한 까닭은 오로지 부족한 제 식견에 있습니다. 하하. 솔직히 혼자서 읽었다면, 절대 저런 생각은 못했을 거예요. 맥락을 이해는 했지만, 제가 부족한 탓에 공감까지는 어렵더라고요.

식견이 짧다는 고백을 길게도 썼네요!

결국은, 이 이야길 하고 싶었습니다.

장편 전문 리뷰어,
최선은 다하겠습니다만, 식견이 짧아 품질은 보장하지 못합니다.

이쁘게 봐주세요(찡긋)

하여튼, 이렇게 리뷰를 쓰기에 앞서 든든한 방패도 세우고, 기대치도 낮춰놓고 나니 마음이 한결 편합니다.
모자라는 부분에 대해 고백을 하고 나니 개운하네요.

흐흐… 이제 의뢰받은 리뷰를 쓰러 가야겠습니다.
즐거운 주말 보내시길!

박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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