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삐딱한 서평_GRRM

분류: 수다, 글쓴이: 조나단, 17년 9월, 댓글10, 읽음: 148

브릿G에는 SF나 판타지, 호러를 쓰시는 분들이 많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당연하잖아, 여긴 장르문학 플랫폼이라고!) 또 장르물 잘 쓰기를 고민하는 한 사람으로써, 좋은 글을 쓰려면 일단 눈높이를 높여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지요. 

해서 제가 요즘 틈틈이 읽고 있는, SF/판타지/호러 장르를 아우르면서도 눈높이를 높여주는 단편집이 있어 소개해 보려고 합니다. <GRRM: A RRetrospective, 조지 R. R. 마틴 걸작선>이라는 거창한 제목의 (무려) 네 권짜리 작가선집이에요. 제가 소개하려는 것은 작가의 초기작들이 실린 1,2권인데. 근데 좀 삐딱합니다.

 

삐딱한 선입견

우선 먼저, 저는 편협한 사람입니다. 선입견으로 가득하지요. 조지 마틴도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삐뚤어진 첫인상 때문입니다. 얼불로, <얼음과 불의 노래> 때문이죠. 미드에 감동받고선 원작을 찾아 읽었지만! 별 매력을 느끼지 못하겠고, 제대로 읽히지도 않고, 책 진도도 나가지도 않더군요. (이후 조급한 번역에 문제가 있었다는 소문을 들었지만) 어쨌든 저는 조지 마틴에 대한 인상이 좋지 않습니다. 

이 단편집의 첫인상도 별로였지요. 소개 글에는 <왕좌의 게임>이 히트한 뒤 ‘작가가 손수 기획한’ 하드커버 작품집이라고 해요. 완판을 자랑하면서(쳇!) ‘자신의 작품 세계를 관통하는 액기스 중단편을 모았다’느니 하면서 자화자찬을 늘어놓지요… 그럼 저처럼 삐딱한 사람은 그런 작가의 의도를 대번에 간파합니다. 아하, 그러니까. 미드 하나가 뜨니까 그걸 이용해 이참에 책 좀 팔아보겠다 이거지? 어디, 얼마나 재미있는지 봐 주겠어! 하는 심뽀로 읽기 시작했습니다.

 

SF: 머나먼 별빛의 노래들

저는 조지 마틴을 판타지 작가로만 알았는데, 그는 SF단편인 <영웅>으로 등단했다고 하네요. 이후 미국 내 SF계에서도 나름 입지를 구축한 작가랍니다. (우주)전쟁 영웅과 체제 안에서 소모될 수 밖에 없는 개인의 아이러니를 보여주는 데뷰작은 체제 반발적인(?) 설정으로 당시 신인이었던 조지 마틴의 재기를 보여주지만

제가 흥미로웠던 것은, 이후 작품들에서 조지 마틴이 구축한 SF 세계관이에요. 이른바 <천 개의 세계>. SF 작가가 자신의 세계관을 갖는 것은 특별할 게 없지만, 작품들을 읽으면서 저는 조지 마틴이란 작가가 아주 ‘영리하게’ 세계관을 구축했다는 걸 눈치챘어요.

<천 개의 세계> 연작은 ‘외우주로 진출한 인간들이 여러 행성에 나뉘어 정착하지만, 이후 각자의 행성 환경에 맞는 진화/퇴화를 거친 세계들’을 위에서 이야기가 펼쳐져요. 이 세계관이 얼마나 영리한가 하면

각자 진화하거나 퇴화한 세계에서 독립된 이야기들이 여러 장르에 발을 걸친 채 다양하게 시도되지요. <십자가와 용의 길>은 언뜻 중세판타지처럼 보이지만, 다 읽고나면 이 작품이 SF일 수밖에 없음을 알게 됩니다.

<비터블룸> 같은 작품은 흡혈귀와 마법으로 밑밥을 놓는 서정적인 문체가 마치 한편의 서사시를 읽는 느낌이에요. 하지만 역시나 SF지요. 과학이 어떤 이들에게는 마법으로 보일 수 있음을 여실히 보여줘요. 그리고 그 안에는 우리가 공감할 수 있는 인간이 있지요.

다른 SF <일곱 번 말하노니, 살인하지 말라>는 당시 제3세계 침탈하는 강대국들에 대한 은유로도 읽힐 수 있을 듯합니다. 그 은유는 지금 시대에 이입해도 충분히 여운이 있고요.

이런 식으로, 조지 마틴은 자신의 SF 세계관에 다양성이 들어갈 공간을 열어놓은 다음, SF에 판타지/호러 등을 집어넣어요. <천 개의 세계>는 서로 다른 하이브리드 이야기가 천 개는 나올 수 있는 세계관인 거예요(실연당한 후에 썼다는 질투에 관한 SF <재로 된 탑> 같은 작품도 있는데, 그것도 흥미롭지요).

이쯤 되면 삐딱한 저는 놀라움을 감추고는, (입을 씰룩대면서) 마지못해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쳇, 이 작가 제법인데?

 

SF소설을 쓰기는 쉬울 수 있지만 SF작가가 되기는 쉽지 않지요. 자신만의 세계관을 창조해야 하는 작업이니까요. 그 창조의 기준이 무작정 개인적/상업적 재미만을 추구해서는 나올 수 없고, 나름의 정체성과 세상을 보는 안목도 묻어나야 할 테니까요.

브릿G에 단순히 SF 작품을 써보자는 시도를 넘어 SF작가가 되려는 분이 계시다면(분명 계시다고 믿고), 조지 마틴의 SF 세계관 <천 개의 세계>를 구경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분명 시야를 확장시켜줄 거라 믿어요.

 

호러: 하이브리드 호러

작가의 서문에 의하면, 조지 마틴은 호러에 관심이 없었다고 해요. 몇 편 쓰기는 했지만 그건 단지 돈 때문이었다지요… 그러다 작가였던 여자친구가 <현대 도시 호러>를 쓰는 걸 보고는, 재미있겠는데? 나도 한번 써볼까? 해서 몇 편을 시도했답니다. 그것들이 이 작품집에 들어있어요. 대중적으로 성공했고, 수많은 상을 휩쓸었기 때문이죠.

그중에서도 개인적으론 <멜로디의 추억>이 압권이었어요. 어느 날 느닷없이 찾아온 대학 시절 여자 동기 ‘멜로디’를 집에 들인 남자의 회상들이 펼쳐지다가… 어느 순간 갑자기 호러로 전환되는데. 상당히 충격적이면서도 그 정서가 동양적입니다. 짧은 임팩트 속에 긴 여운을 주는 작품이지요.

<원숭이 다이어트>는 스티븐 킹 식의 독특한 호러 설정이 재미있고.

<서양배처럼 생긴 사내>는 전형적인 미국식 호러인데. 번역자는(믿고 읽는 김상훈님) ‘환상특급’ 같은 작품이라지만, 제게는 이토 준지의 기괴한 이미지로 느껴졌습니다. 이질적이고 섬뜩한 한 순간.

그 외에도 <샌드킹>이나 <나이트플라이어> 같은 SF호러도 상당히 재미있어요. 한 편의 SF호러 영화를 보는 듯한 느낌이랄까. 어떤 소재/장르의 호러이든 그 안에 인간이 있음을 보여주지요.

이쯤되면 삐딱한 저는 화가 납니다. 아니, 호러에 관심 없다면서! 나도 한번 써볼까 해서 썼다면서! 이렇게 잘 써도 되는 거야?! (이 영감탱이, 미친 것 아냐?) …저는 아직 조지 마틴을 인정하기 싫습니다.

 

하지만 삐딱한 저와 달리, 브릿G에서 호러를 쓰시는 분들에게는 좋은 참고 작품이 될 것 같습니다. 호러 소재는 많이 있겠지만, 그것을 어떻게 소화해 ‘작품으로’ 풀어내는지에 대한… 좋은 선례들인 듯해요.

 

판타지: 거북이 성의 후예

사실, 저는 판타지의 매력을 잘 몰라요. ‘중간계’와 ‘어스시’는 감동적이었지만, 이후 읽었던 판타지 작품들에서 톨킨의 아우라를 느낀 뒤로는 판타지를 쓸 생각 같은 건 아예 품지도 않지요. 올라가지 못할 나무는 쳐다보지 않는 게 상책이니까요.

조지 마틴도 같은 이야기를 해요. 톨킨에 대한 존경을 표하면서 자신은 절대 판타지는 못 쓸 거라고… 그러면서 다른 종류의 판타지를 써요. 이른바 ‘히로익 판타지’라더군요. 그리고 그것들이 상당히 재미있습니다. 제가 기존에 알던 판타지와 차별적이면서도 독특한 개성과 매력을 보여주지요. ‘판타지 작가’ 조지 마틴 본연의 모습이 드러난다고나 할까요?

‘세계들’을 오가는 여인과 고독한 남자의 만남을 서정적으로 그린 <라렌 도르의 외로운 노래>는 잔혹동화 분위기지만 아름다우면서도 어떤 정서와 여운이 찐하게 남고요.

불 대신 얼음을 내뿜는 <아이스 드레곤>은 짧은 단편인데도 판타지 소설의 진수(?)를 보여줍니다. 서사와 정서가 분명하고 연약한 주인공이 등장하지요. <왕좌의 게임>에서 용을 부리는 여주인공의 이미지가 떠오르기도 해요.

제게 가장 혹했던 건 <잃어버린 땅에서>라는 작품이에요. 중세적이고 동화적인(또는 전설적인) 여주인공이 등장하는데. 아, 이런 게 히로익 판타지구나… 멋진 걸? 이런 이야기 써보고 싶다. 하는 욕구까지 불러일으키더군요. (그런 기분 정말 오랜만입니다)

저는 판타지를 잘 모르기에 조지 마틴의 판타지를 뭐라 표현해야 할지 모르지만, 독자 입장에서 그냥 ‘아름답다’라는 말 밖에 나오지 않아요. 어떤 소재를 풀던, 그 정서와 여운이… 정말 아름다운 판타지들입니다. 저는 그렇게 밖게 표현을 못하겠네요.

이쯤 되면 삐딱한 저도 두 손 들고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홍보 문구겠지만) 왜 조지 마틴을 ‘미국에 사는 톨킨’이라고 하는지 말이죠. 톨킨과는 분명히 다르지만, 그만큼의 아우라를 가진 작가인 듯합니다. (얼불로를 다시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물론 새로 나온 이수현 작가 버전으로 말이죠)

 

브릿G에는 판타지 작가와 팬들이 많다는 걸 알고, 그분들이 보신다면 제가 미처 알아보지 못한 조지 마틴의 정수를 읽어내실 수 있지 않을까요? 판타지를 쓰시는 분들에게는 분명 또 다른 자극이 될 거라 믿습니다.

 

기타… 마무리

작가선집 답게 각 장르 챕터마다 작가가 직접 쓴 ‘서문’이 붙어 있어요. 예전에 스티븐 킹의 서문들을 즐겁게 읽은 기억이 있는데, 조지 마틴의 서문도 재미있어요. 주절주절이 자기 이야기를 편히 들려주지요. 특히 1,2권 초창기 작품들에 대해 떠드는 걸 보면, 생활고에 쫓기면서도 글쓰기에 대한 동경을 멈추지 않는 젊은 조지 마틴에게서 어떤 동질감(?) 같은 것도 느껴지고요. (나도 30년 후에는…^^?)

아무튼 그렇습니다. 호기심이 생기신다면 한번 읽어보셨으면 하는 작가선집이에요. 분명 후회하지 않으실…

라고 쓰다보니, 불현듯 여기가 브릿G 자게라는 걸 인식하게 되네요. 황금가지 책이 아닌데 이렇게 떠들어도 되나? 하는. 안 되지야 않겠지만, 만약 기분 나쁘셨다면… 음… 한번만 봐주세요. 지우기에는 (임시저장 기능까지 활용하면서) 품이 많이 들었네요. 다음부턴 조심할게요!

덧. 제딴엔 삐딱하니 쓰려고 했는데… 전혀 삐딱하지 않게 됐네요.

 

다음은… 그냥 여백이 남아서 쓰는 수다입니다. (정말입니다… 단지 여백이 남아서)

절찬리에(?) 연재중이던 <사냥꾼들>이란 작품이 부랴부랴 완결됐습니다. 다음 주면 공모도 마감이라서요.

에필로그를 고민 중이라 ‘완결’을 찍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이야기 하나가 완성되어 있습니다. 이참을 이용해 읽어준 분들, 천천히 읽고 계시는 분들께 감사드리면서! 혹여, “완결되면 읽기 시작해야지!” 하시는 분들이 계실까봐. 언급합니다. 이제… 한번쯤 읽기 시작하셔도 될 것 같아요. ^^!!

결국, 이런 식으로 삐딱한 글이 됐네요. 그래도 가을 주말 쾌청하게 보네셔요~

조나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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