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멘스 소설
만원 버스가 갑자기 끼어든 차량 때문에 비명을 지르듯 덜컹거렸다.
그 반동으로 좌석에 앉아 있던 소년의 어깨 위로 누군가의 몸이 툭, 하고 부딪혔다.
“죄송해요.”
맑고 여린 목소리에 소년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아, 괜찮습니다.”
인근 학교의 교복을 입은 한 소녀였다.
짧은 단발머리 아래 드러난 얼굴은 갸름했고, 창백할 만큼 하얬다. 당황한 듯 뺨을 타고 번지는 옅은 홍조와 멋쩍은 미소.
소녀는 소년에게 가볍게 목례를 건넸다.
그 순간, 소년의 시선은 소녀의 목선에 머물렀다.
유난히 길고 가녀린 목선이었다.
앉아서 올려다보는 각도 때문이었을까. 빳빳한 교복 깃 위로, 귀 아래에서 어깨까지 매끄럽게 떨어지는 그 선이 덜컹거리는 버스의 진동에 맞춰 흔들리는 머릿결 사이로 자꾸만 나타났다 사라졌다.
소년은 살면서 단 한 번도 누군가의 목선이 아름답다고 느껴본 적이 없었다. 누군가의 목선을 관찰해 본 적도 없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하얗고 긴 선이 소년의 눈동자 깊숙이 파고들어, 찰나의 사진처럼 박혀버렸다.
금세 붉어진 소녀의 얼굴.
미안함이 담긴 수줍은 미소.
그리고 만원 버스 특유의 퀴퀴한 냄새를 뚫고 들어오는 듯한 은은한 향기까지.
그 짧은 순간, 버스 안의 소음은 완전히 사라진 것만 같았다. 마치 소년과 소녀 둘만이 단절된 진공 공간에 놓인 것처럼.
소녀의 목선은 이내 흩날리는 머리카락 뒤로 감춰졌고, 아쉽게도 버스는 더 이상 덜컹거리지 않았다.
소년은 민망함에 서둘러 시선을 돌렸다. 너무 오랫동안 바라본 건 아닐까. 창밖을 바라보는 소녀의 옆모습이 마치 의도적으로 자신을 외면하는 것처럼 느껴져 괜히 미안한 마음마저 들었다.
어색한 침묵을 깨기 위해 소년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 가방 받아 드릴게요.”
소년의 말에 소녀는 아까보다 더 작은, 보일 듯 말 듯한 미소를 지었다.
“아니에요. 괜찮아요.”
하지만 소년은 이미 가방 쪽으로 손을 뻗고 있었다. 소녀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못 이기는 척 가방을 건넸다.
소년의 손에 전해진 묵직한 가방의 무게보다 가방을 건네던 소녀의 손이 훨씬 강렬하게 뇌리에 남았다. 어딘지 모르게 가슴 한구석을 찡하게 만드는 손이었다. 너무나 여리고, 희고, 큰 키와 어울리지 않을 만큼 작은 손.
소년의 심장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누군가를 보며 심장이 뛴다는 것. 그전까지 소년에게 그 말은 그저 흔해 빠진 문학적인 수식어에 불과했다. 하지만 지금 그는 알았다. 인간의 심장이 실제로 이렇게까지 세차게 뛸 수 있다는 것을.
그리고 이상하게도, 그 벅찬 설렘의 끝에는 도무지 설명할 수 없는 깊은 슬픔이 묻어 있었다.
그날 이후, 등굣길 버스는 소년에게 치열한 탐색의 공간이 되었다.
소녀가 탔는지, 탔다면 어디쯤 서 있는지, 비좁은 만원 버스 사이를 헤집어 확인하는 것이 소년의 가장 중요한 하루 일과였다.
하굣길은 더 지독했다. 소년은 아예 소녀가 타는 버스 정류장까지 전력 질주해 그녀가 나타날 때까지 우두커니 기다렸다.
혹시 이미 지나갔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혹은 오늘은 다른 정류장을 이용할지도 모른다는 의심. 그럼에도 소년은 막차 시간이 지나서야 텅 빈 거리를 걸어 집으로 향하곤 했다.
매번 야간 자습을 빼먹었다는 이유로 다음 날 아침 학생주임에게 몽둥이찜질을 당해도 상관없었다. 마지막 수업 종이 울리자마자 소녀의 정류장을 향해 미친 듯이 달리는 것만이, 유일한 삶의 목적이 되었다.
더 바라는 것도 없었다. 늦지 않게 소녀가 오는 방향을 향해 목을 길게 빼고 기다리기만 하면 되었다. 그러다 소녀를 보면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좋았다.
똑같은 교복을 입은 수백 명의 학생들 사이에서도, 멀리서 걸어오는 그녀의 실루엣만큼은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소녀가 시야에 들어오고 점점 가까워질수록 소년의 심장은 터질 듯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정작 그녀가 근처까지 다가오면, 혹여 자신의 시선을 눈치챌까 두려워 고개조차 제대로 들지 못하고 바닥만 내려다보았다.
어느 날, 유난히 혼잡한 저녁 하굣길 버스 안이었다.
사람들에게 이리저리 밀리고 끼인 끝에 소녀는 창밖을 등진 채 서 있었고, 소년은 그녀와 비스듬히 비켜 보며 붙어 서게 되었다. 좁은 틈 사이로 소녀의 옅은 향기가 훅 스며들었다.
누군가 열어 둔 차창 사이로, 초여름 바람이 밀려 들어와 소녀의 머릿결을 흔들었다. 그리고 흩날린 머리카락 끝이 소년의 뺨을 살짝 스쳤다.
숨이 막힐 듯한 순간이었다.
소녀 역시 자신의 머리카락이 소년의 얼굴을 스친 것을 깨달았다. 그녀는 황급히 한 손으로 머리를 쓸어 모으며 소년과 눈을 마주쳤다.
그리고 아주 작은 미소를 지었다.
보일 듯 말 듯한, 그러나 분명한 미소였다.
그 가느다란 흰 손이 흩날리는 머리칼을 누르는 모습만 보아도 소년의 마음은 아려 왔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짙은 애틋함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마치, 아주 오래전부터 이 여린 손을 알고 있었던 것처럼.
그리고 아주 오래전, 이 손을 지켜주지 못해 사무치도록 미안했던 것처럼.
—-
겨울바람이 매서웠다.
소년은 정류장에 서서 발을 굴렀다.
저 멀리 소녀가 뛰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가쁜 숨소리가 하얗게 흩어졌다.
야속하게도 막차의 문이 닫히고 있었다. 엔진이 육중한 소리를 내며 으르렁거렸다.
소년은 반사적으로 몸을 던져 양팔을 넓게 벌린 채 버스 앞을 막아섰다.
타이어가 아스팔트를 긁는 날카로운 파열음이 밤공기를 찢었다. 매캐한 고무 타는 냄새가 훅 끼쳤다. 운전석 창문이 거칠게 열렸다.
“야 이 새끼야! 죽으려고 환장했어? 남의 인생 망칠 일 있냐!”
기사의 쌍욕이 쏟아졌다. 소년은 연신 허리를 굽혔다.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그사이 소녀가 버스 문을 두드렸다.
취익, 하는 파찰음과 함께 문이 열렸다. 소녀가 차체에 올랐다.
버스는 이내 매연을 뿜으며 멀어졌다.
소년은 안도했다.
그리고 뒤늦게 깨달았다. 자신도 그 차를 탔어야 했다. 막차였다.
‘아, 탔어야 했는데.’
멀어지는 버스의 뒤창문. 그 너머로 소녀가 보였다.
소녀가 소년을 향해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조용한 목례였다.
소년은 크게 양팔을 흔들었다.
심장이 요동쳤다.
살갗을 베는 겨울바람조차 달게 느껴졌다.
집까지는 아홉 정거장. 걸으면 족히 한 시간 반은 걸릴 거리였다.
소년은 걷기 시작했다.
발걸음이 가벼웠다.
소녀의 작은 목례가 머릿속을 맴돌았다.
고개를 숙일 때 찰랑이던 검은 머릿결. 미세하게 상기되었던 뺨.
두 정거장을 지났다.
마을의 불빛이 끊겼다.
추수가 끝난 들판은 황량했다. 바람을 막아줄 볏짚 하나 남지 않았다.
한기가 옷깃을 파고들었다.
소년은 어깨를 움츠렸다.
듬성듬성 세워진 가로등만이 텅 빈 국도를 희미하게 비추고 있었다.
한참을 걸었다.
다음 정거장의 윤곽이 보였다.
막차가 끊긴 정류장. 그 아래 누군가 서 있었다.
처음에는 같은 학교 학생이려니 했다.
거리가 좁혀지자 실루엣의 선이 점차 또렷해졌다.
너무도 낯익은 형태였다.
소년의 심장 박동이 다시 빨라졌다.
몇 걸음 더 다가갔다.
가로등 불빛이 그녀의 얼굴을 비췄다.
확신했다. 소녀였다.
소녀는 눈을 맞추며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숙였다.
차창 너머로 보냈던 것과 같은 목례였다.
밤바람에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창백하게 드러난 목선이 애처로웠다.
소년은 홀린 듯 다가갔다. 입고 있던 외투를 벗었다.
소녀의 좁은 어깨 위에 조심스레 덮어주었다.
소매 밖으로 빠져나온 소녀의 손이 하얗게 얼어 있었다.
그 손을 쥐고 싶었다.
충동이 일었지만 애써 억눌렀다.
그제야 소년은 자신이 침묵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왜 내렸냐고 물어야 할까. 통성명부터 해야 할까. 머릿속이 엉켰다.
“춥지 않으세요?”
소녀가 먼저 입을 열었다.
소년의 외투를 여미는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추위 탓인지, 볼이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소년은 대답하려 했다.
목이 멘 것처럼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심장 소리가 귓가를 때렸다.
“춥지 않습니다. 덥, 덥습니다.”
어색하게 더듬는 목소리. 평소보다 한 톤 높게 튀어나온 우스꽝스러운 대답이었다.
소녀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두 사람은 나란히 걷기 시작했다.
빈 들판을 가로지르는 도로였다.
주황색 가로등 불빛이 일정한 간격으로 두 사람의 그림자를 길게 늘였다가 지웠다.
처음에는 소년이 반보 앞서 걸었다.
어느새 두 사람은 나란히 걷고 있었다.
어색한 첫인사 이후, 둘은 약속이나 한 듯 입을 다물었다.
하고 싶은 말은 수없이 많았다.
하지만 입 밖으로 내뱉기에는 모든 것이 조심스러웠다.
버스가 사라진 방향을 향해 묵묵히 걸었다.
밤의 감각이 예민하게 살아났다.
마른풀 위로 맺힌 이슬이 달빛에 반짝였다.
도랑가의 억새가 바람에 쓸리며 서걱거렸다.
살얼음이 얼기 시작한 얕은 물소리가 청아하게 울렸다.
들판을 휩쓰는 바람의 결마저 생생했다. 평소라면 인지하지 못했을 풍경이었다.
지금은 모든 것이 선명했다.
한 장의 사진처럼 망막에 깊이 박혔다. 모든 순간이 설레고 눈부셨다.
침묵을 깬 것은 소녀였다.
“그쪽 집, 두 정거장 전에 지나왔어요.”
소녀의 맑은 목소리가 밤공기를 갈랐다. 소년이 멈칫했다.
“저희 집도 바로 앞이에요. 감사했습니다.”
말을 마친 소녀의 뺨이 붉게 달아올랐다.
소녀는 가볍게 목례를 하고 좁은 시골 골목길을 향해 몸을 돌렸다.
소년은 멍하니 서 있었다.
오는 내내 꿀 먹은 벙어리처럼 굴었던 자신이 허탈했다.
멀어지는 소녀의 뒷모습. 점점이 작아지는 실루엣.
소년이 불쑥 소리쳤다.
“은율입니다!”
정적이 깃든 들판에 소년의 외침이 메아리쳤다.
“제 이름이요!”
소녀의 걸음이 멈췄다.
그녀가 뒤를 돌아보았다. 싱그러운 미소가 번졌다.
“알아요!”
소녀가 뒷걸음질을 치며 대답했다.
한결 가벼워진 발걸음이었다.
소년은 골목으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소녀를 향해 팔이 떨어져라 손을 흔들었다.
<신들의농장 – 지와 은율의 이야기>
로멘스를 찾으시길래…
신들의 농장엔 이런 로멘스도 있습니다. 보고 싶죠?
(틈새 발악 광고… 너무 뭐라지 마셔요… 종합 10위 들어보는게 목표라.. 구독자를 모셔야 합니다 ㅠ.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