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마지막 날의 근황입니다.
뭔가 정기적으로 브릿G에 잘 살고 있다고 보고하는 게 일상이 되었네요. 오늘도 브금 하나 깔고 가겠습니다. 평소엔 잔잔한 노래를 트는데, 오늘은 Muse의 Knights of Cydonia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G_sBOsh-vyI
원래는 12월에 뭔가 하나를 연재를 시작할 생각이었습니다. 저번에 업로드했던 ‘실전 민속학 사무소 사건일지’의 파일럿편… 을 다듬는 게 아니라, 그냥 빈 집과 기타등등의 설정만 남겨서 인어와 탐정, 그리고 용궁을 소재로 한 기묘한 괴이 로맨스 같은 걸 쓰고 있었어요.
콜센터에 취직하고 나니까 오히려 글이 잘 써진다 싶었던 면이 있어서 잘 쓰다가, 갑자기 턱 막혔습니다. 1막이 끝났고, 이제 슬슬 악당의 움직임이 들어가야 하는데… 갑자기 막혀서 쓰기가 싫더라구요. 이게 내가 쓰고 싶었던 거였나? 하는 생각도 들었구요.
거기다가 퇴근 후에 소설 집필 + 그림 연습 + 작품 감상… 이렇게 세 가지 씩이나 하는데 밸런스를 잡는 게 너무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2주 가량 집필을 쉬었어요. 그냥 막연하게 쉬다 보면 쓰고 싶은 욕구가 돌아오지 않을까? 싶었거든요.
그러다가 그림 공부를 위해 구독한 유튜브 채널에서 올라온 고민 상담 영상을 하나 봤습니다. ‘쉬었다는 착각이 어떻게 프리랜서를 망가뜨리는가’ 같은 내용이었어요. 꽤 생각을 많이 하게 만드는 영상이었습니다. 그리고 진지하게 되물어봤습니다.
작년 11월 <청춘 환상 검무곡> 완결 이후부터, 내가 정말로 쉰 적이 있는가?
아는 사람들에게 물어봤더니 ‘애초에 쉬었다 안 쉬었다를 흑백논리로 나누려는 시도 자체가 안 쉬었다는 증거다’라던가, ‘님 쉬는 거 진짜 본 적 없어요’ 같은 말도 들었습니다. ‘완결을 내고 나서, 내가 나에게 완결에 대한 보상을 준 적이 없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맛있는 걸 사먹자니 돈이 없었고, 휴식을 하자니 12월에 계엄 터지고 나서 바로 편의점을 잘렸고… 그 뒤로 쭉 마음 편한 적이 없었으니까요.
결정적으로 작품을 업로드한 구간을 살펴봤습니다. 그랬더니 글커미션 올린 달을 포함해서 거의 한 달도 빠짐없어 뭔가를 쓰고 있었더라구요. 아마 제대로 완성 못한 원고 포함하면 아예 쉰 달이 없을 겁니다. 심지어 작년 12월도 ‘크리스마스 소일장 내겠다’고 뭐 쓰려다가 제대로 완성 못했으니까요.
그래서 창작 자체를 쉬기로 했습니다. 적어도 3월이나 6월, 날이 따뜻해지기 전까지는요. ‘창작을 위해 자료나 작품을 읽는 행위’도 안 하거나 최소한으로 줄이기로 했습니다. 최근엔 아예 음악을 듣는 것도 줄이기로 했어요. 보통 음악을 들을 때 음반 트랙리스트를 순차적으로 듣는데, 이게 생각보다 집중력을 많이 소모하는 일인 줄 최근에 깨달았어요.
그때까지는 최대한 하고 싶은 일이나 보고 싶은 작품만 보고, 최소한의 그림 연습만 하고 그 외에는 최대한 콜센터 일에 전념하기로 했습니다. 그래야 생각이 비워질 것 같아서요. 사람을 (상당히) 많이 대하는 일이라 그런지, 생각보다 콜센터 일이 생각을 비우기 좋더라구요. 하고 나면 사람 얼굴은 한동안 보기가 싫어지고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고 싶어져요. (의외로 긍정적인 의미)





이미지 폭탄과 함께 사실 중요한 소식 하나 더, 진로가 바뀌었습니다. 내년 3월~6월에 창작을 다시 준비하더라도, 소설은 아닐 것 같아요.
아직 번아웃을 앓으며 ‘이번 작품 계속 써야 하나?’하고 고민을 하던 때, 친구와 상담을 한 적이 있습니다. 흔히들 번아웃이 찾아오면 하는 질문인 ‘내가 이거 계속 하고 싶은가?’에 대한 질문이죠. 물론 ‘창작을 하고 싶으냐’에 대한 질문은 정해져 있습니다. 다만 ‘어떤 형태의 창작이냐?’라는 거죠.
이를테면 이런 류의 질문도 있었습니다. ‘네가 (종이책) 작가로 데뷔를 하고 싶으면 공모전이나 투고를 하면 되고, 충분히 그럴 능력이 없는 것 같지도 않은데 뭘 망설이는 거냐’ 같은 것도 있었습니다. ‘아니면 아예 비등단 작가로 하고 싶은 창작을 하는 방법도 있다. 아니, 심지어 투고하고 싶은 건 투고하고 개인작 하고 싶은 건 개인작 하고 싶다. 방법은 많다.’ 하고 여러가지 상담을 했죠. 물론 번아웃 상태였으니 들릴까 말까였지만.
그러나 그 중에서도 뭔가 ‘너 정말 핵심을 찔렀어’ 싶었던 건 이거였습니다. ‘소설을 하고 싶으냐, 만화를 하고 싶으냐?’ 물론 이것도 열린 질문입니다. 소설을 쓰면서 만화도 그릴 수 있죠. 이미 세계적으로 많은 사람이 그러고 있구요. 특히 스튜디오제로 글작가와 그림작가가 분리된 영미권은 그런 경향이 더 강하구요.
그런데도 둘 다는 커녕 둘 중 하나도 못 고르고 있으니까 ‘그럼 소설을 쓴 네가 행복할 것 같아, 아니면 만화를 그린 네가 행복할 것 같아?’하고 변화구가 들어왔습니다. 그때도 대답을 못했어요. 왜냐면 한참 번아웃이 극심했거든요.
그리고 조금 무서웠던 것도 있습니다. 이제와서 ‘만화를 하고 싶다’고 하면, 뭐랄까 너무 늦은 것처럼 느껴졌거든요.
그리고 번아웃 치료를 위해 최대한 작품 보는 것도 줄이고, 음악 듣는 것도 줄이고, 그림 연습 정도만 하고 최대한 생업에 집중하며 한 일주일 쯤을 보냈습니다. 그러다 <블레임!>으로 유명한 니헤이 츠토무의 <타워 던전>을 봤어요. 보다가 뭔가 불현듯 깨달았습니다.
사실 저는 <블레임!>도 보다 말았기 때문에 니헤이 츠토무에 대해서는 잘 모릅니다. 그냥 공간감과 건축, 그리고 기계 묘사에 뛰어난 하드 SF 만화 작가이며 최근에 캐릭터 화풍이 (이전에 비해 상대적으로) 모에 데포르메 느낌으로 바뀌었다는 사실만 압니다. 그런 작가가 최대한 대중성을 강화해서 낸 작품이 <타워 던전>인 것 같아서 읽어보기로 한 거구요.
간결하면서도 러프한 선과 최대한의 단순화를 통해서 묘사를 줄인 먹칠. <블레임!>을 본 적이 있는 저로선 ‘프로 작가가 상당한 노련함을 가지고 새로운 스타일을 시도했다’는 걸 알 것 같았지만, 역설적으로 그래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거라면 나도 할 수 있겠다’고. 실제로 듣자하니 어시스턴트 없이 혼자 틀어박혀서 월간 연재로 그리는 작가라고 하는 것 같더라구요.


그러면서 생각했습니다. (소설 플랫폼에서 하기에는 꽤 불편할 수도 있는 발언이지만) 이거 미친듯이 연습하면서 즐겁지 않았냐고. 물론 연습 도중 회사 사내 교육 영상을 틀어놓았기 때문에 (저거 한참 연습하는데도 끝이 나질 않더군요) 저거라도 하면서 지루함을 해소한 것이지만요.
그 외에도, 네가 감탄했던 건 <호크아이>의 다비드 아하가 보여준 컷 배치나, <Absolute Martian Manhunter>의 싸이키델릭한 연출, <카구라바치>가 보여준 명암의 대조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액션 장면이 아니었나. 네가 예술을 보고 처음 울었던 건 <체인소맨>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랬더니 천천히 생각이 좁혀지더라구요. 자만심 가득한 발언이지만, 소설을 쓰면 어딘가에 낼 순 있을 겁니다. 반면에 만화는 솔직히 어디 내기는 커녕 단편 한 편을 제대로 완결낼 수 있을지 걱정부터 되어요. 그래도 ‘소설을 쓰는 네가 행복할까, 만화를 그리는 네가 행복할까?’ 굳이 거기에 대답을 한다면, ‘만화를 그리려고 시도조차 안한 나’에 대해 후회할 겁니다.
그래서 그렇게 되었습니다. 3~6월까지 만화를 그린다는 결정과는 별개로 딱히 뭔가 창작을 준비하지는 않을 거에요. 최소한의 보고 싶은 작품만 보고, 그림 연습만 하기로 했어요. 아마 고민 끝에 ‘만화를 그린다’는 판단을 번복할 지도 모르죠. 하지만 당장 중요한 건 번아웃에서 벗어나는 거니까요. 당분간은 일에 집중할 겁니다.
12월만 지나면 올해도 끝이네요. 올해 12월은 별 일이 없었으면 좋겠네요. 다들 무탈하시고, 날 따뜻해질 쯤… 에 근황 쓰러 오면 늦을 것 같고, 가끔 들르겠습니다. 그럼 그동안 무강하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