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게북클럽] 사야 됐을까요?
안녕하세요. 오랜만에 글 남깁니다.
한동안 전혀 글을 쓰지 못했습니다. 22년 말부터 적어도 소일장은 (엉망진창인 졸작이라도) 꼬박꼬박 참여했는데 지난달엔 그마저도 쓰지를 못했어요. 원인은 간단합니다. 아무 생각이 안 나거든요… 정말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이거다!’ 싶은 게 떠오르질 않습니다.
다들 그럴 땐 어떻게 하시는지 모르겠네요. 저는 막막한 마음에 헌책방에 갔습니다. 헌책방만 여러개가 모여있는 골목이 있거든요. 10대 때 부터 종종 다녔는데 온통 낡은 책들 사이에서 풍기는 오래된 책 냄새가 늘 묘한 위안을 줍니다. 갈수록 헌책방 수가 줄어들고 책들도 더 낡아가고 있어 마음이 아프기도 하지만 그래도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는 고향에 온 듯한 반가움이 들었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장르는 출입구에서 왼편으로 네번째 서가에 모여 있습니다. 그 가장 끝은 다락으로 이어지는데 이제는 쓰지 않아 원서 더미가 길을 막고 있죠. 그래도 사람 몸 하나 들어갈 정도의 공간이 나오는데 그 벽면에 기대서 책을 읽으면 딱이랍니다.
저는 느긋하게 책장을 훝었습니다. 그러다 한 책에 꽂혔어요. 직감적으로 알았죠. 이건 진짜 오래된거다! 아니나 다를까 펼쳐보니 1978년도 판 책이었습니다. 헌책방에서 세월과 먼지의 더께를 품은 책을 만나는 건 흔한 일이었지만 그래도 50여년의 세월을 견딘 녀석을 만날때는 보물찾기에 성공한 꼬마처럼 짜릿한 흥분이 온 몸을 휘감곤 하지요.
世界恐怖怪談(세계공포괴담). 빨간 책등에 금박으로 새겨진 글자는 빛이 바란지 오래였지만 아직 읽을만 했습니다. 일본식으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표지를 젖히자 훅 곰팡내가 끼치며 누런 속지가 드러났어요. 한장을 더 넘기자 세로쓰기에 한자가 병행된 목차가 나타났고요.
목차를 보고 저는 좀 더 흥분했습니다. 불란서(프랑스), 도이칠란드(독일), 일본, 영국 등의 비교적 흔한 나라의 괴담은 물론 비율빈(필리핀), 버마(미얀마), 월남(베트남) 같이 흔치 않은 나라도 보였거든요. 편집자가 나름 정성을 들여 수집한 이야기들 같았어요. 저는 얼른 예의 제 지정석으로 가서 책갈피를 넘기기 시작했지요.
프랑스의 저주 받은 다이아몬드 목걸이, 좀 더 잔혹한 버전의 영국 행운의 편지 및 일본의 갓파 요괴까지는 익숙한 얘기들이었습니다. 독일 돼지 농장 얘기는 좀 으스스했는데, 이주노동자가 목장으로 일하러 가서 자꾸 실종되는 이야기였어요. 그 농장의 돼지는 유난히 맛이 좋기로 유명한데 종종 도축 과정에서 돼지 위에서 머리카락과 손톱이 나온다는 결말이 오싹하기 보단 슬펐습니다. 아마 이 시절 광부 및 간호사로 독일에 갔던 한국인이 많았기에 더 그렇게 느낀 듯 해요.
동남아쪽으로 넘어오자 정서적으로 좀 더 비슷한 느낌의 괴담들이 나왔어요. 특히 베트남 이야기에서 다낭 용다리가 나오자 저는 급격히 흥분하고 말았습니다. 마침 2년전 여행을 다녀왔거든요. 유명하다는 용다리 불쑈를 보러갔는데, 금~일만 되는 걸 모르고 하필 수요일에 찾아갔지 뭐겠습니까. 허탕 치기 딱 좋았으나, 웬걸! 운 좋게도 마침 개통 10주년이라 그 주간에만 일주일 내내 쑈를 해준다는 겁니다. 덕분에 쇼를 볼 수 있었지요.
쑈 자체는 생각만큼 장관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못 볼 뻔 했던걸 봤다는 생각에 만족스러웠어요. 사람이 정말 많았는데 외국인은 물론 오토바이를 멈춰세운 현지인까지 다들 연신 탄성을 내뱉으며 폰으로 찍기 바쁘더군요. 어찌나 붐비고 치대며 폰으로 찍기에만 몰두했는지, 두 돌 쯤 되어보이는 사내 아이가 제 부모를 잃고 머리끝부터 발끝까지(심지어 맨발이었답니다) 흠뻑 젖은 채 울고 소리지르며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지만 다들 본체만체 할 정도였답니다.
베트남 괴담은 그 다리를 배경으로 하고 있었어요. 주인공 남자는 여사친의 소개로 부잣집 딸을 만나 결혼했는데 얼마 후 남자가 부인을 물에 빠트려 죽이죠. 사실 남자는 그 여사친과 사실혼 관계로 이미 둘 사이엔 25개월 된 아들도 있었어요! 부잣집 여자가 남자를 미혼으로 착각하고 호감을 보이자 둘은 돈을 노리고 그런 짓을 한 거죠.
그들은 죽은 여자의 돈으로 호사스런 생활을 즐기며 전국 여행을 다녀요. 그러다 어느 날 용다리 불쇼를 구경가죠. 한편 물귀신이 된 부잣집 딸은 물에서 솟아나 부부가 보는 앞에서 아들을 잡아 끌고 들어갑니다. 부부는 아들의 발을 한쪽씩 잡고 당기며 도와 달라고 주변에 소리치지만 흥분의 도가니인 구경꾼들에겐 들리지 않고, 결국 아이는 물속으로 끌려 들어가요. 부부의 손에는 아들의 신발이 한짝씩만 남아 있죠. 부부는 그만 미쳐버렸고 그 후 불쑈 구경꾼들 사이에 아이 귀신이 돌아다닌다는 이야기였어요.
전형적이지만 그 묘사가 꽤나 생동감있어서 나름 마음에 들었답니다. 이 이야기까지 읽었을 때 마침내 그 책을 사야겠다고 결심했어요. 사실 지금도 집 사방이 책으로 빼곡해서 구입은 되도록 자제 중이지만 이런 매력적인 책을 놓칠 순 없으니까요. 저는 책을 들고 바싹 마른 고목같은 주인 여자에게로 갔습니다.
“얼마인가요?”
“책 바닥면에 가격이 씌여 있어요.”
“네 그건 아는데, 오래전에 적으신 거 같아서요. 설마 지금도 2천원은 아닐거 같은데요.”
주인 여자는 내말에 싱긋 웃더니 제게 손을 내밀었다. 저는 책을 건네주며 말했다.
“78년 책 치고 상태가 아주 좋네요.”
그리고, 저는 무언가 잘못 됐음을 깨달았어요. 그럴수 없는데… 주인 여자는 책을 촤라락 넘겨 상태를 확인하고 말했지요.
“6천원만 주세요.”
“아….아닙니다. 아니에요. 됐어요.”
그리고 저는 도망치듯 서점을 빠져나왔다.
지금도 사실 갈등 중이긴 해요. 78년 책에 어떻게 2013년에 개통한 다리 이야기가 씌여 있는건지…. 역시, 사서 확인하는게 좋았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