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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게북클럽] 최근 읽었던 책 중 가장 무서운 책

분류: 책, 글쓴이: 아도치, 7시간 전, 댓글3, 읽음: 19

오늘 소개할 책은 14세기 프랑스 랭스 부근에서 살았던 것으로 추정되는 수도사 장 르 부티에의 저작입니다. 18~19세기 문인인 샤토브리앙, 그보다 더 이르게는 장 라신의 개인적 기록에서 ‘이런 책이 있다더라’ 라는 식으로 몇 번 언급되기는 하지만 한 번도 실물이 발견된 적이 없어 어찌 보면 허위일지도 모른다고 알려져 있던 책인데, 1977년 프랑스 파리 미테랑 국립도서관의 장서고에서 복사본 중 하나가 발견되며 실제 존재함이 확인되었습니다.

제목이 없고 그저 검은 가죽 표지로 장정되어 있을 뿐이라 “블랙 북(The black book)”이라 불리곤 하는 이 책은 ㅡ 희한하게도 프랑스어권에서도 그냥 블랙북이라고 부르더군요 ㅡ 2권의 필사본과 3권의 인쇄본이 존재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중 파리 국립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 것은 필사본입니다. 나머지는 프랑스 혁명 시기 소실된 것으로 파악… 되었으나, 놀랍게도 역시 2001년에 영국의 모 헌책방에서 인쇄본 하나가 발견되었죠.

사실 블랙북의 실체가 확인되기 이전에도 일부 발췌문이나, 블랙북을 언급한 내용은 종종 떠돌아다녔던 모양입니다. 한국에도 소개된 적이 있는데요, 옛신문 데이터베이스를 보면 1918년도 3월 1일자 대한매일신보에 우선 블랙북에 대한 첫 언급이 있습니다.

 

“일찍이 법황 죤=니꼴라웃스 2세가 책을 빼앗아 불태오라 가로되 그 책은 브울랙·붘이라 하얏으니 이는 검은 책을 이르는 말이고 (후략)” – 메이지 시기 일본의 번역가였던 젠부우소 우소다(1851~1937)가 번역한 것을 최남선이 중역

 

그러다가 이 “블랙북”의 실체가 밝혀진 후 당연히 이를 연구하고자 하는 세계의 관심도 뜨거웠는데요. 우리나라에서는 2023년에 드디어 직역, 완역본이 나왔죠. 한국인 고문헌학자 허구(1966~)씨는 원문을 보여주지 않으려는 프랑스 당국과 치열한 밀고 당기기 끝에, 약 1년간 내용을 몰래 베껴 써가며 완역을 해냈습니다.

 

허구 씨에 의하면 블랙북은 언뜻 봐서는 정말 별 것 없는 그냥 책이라고 합니다. 일단 얇고, 오랜 세월 동안 사람 손을 안 타서 그런지 언뜻 보면 그렇게 오래된 것처럼 보이지도 않는다고 하네요. 그런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뭔가 달라집니다.

 

1. 블랙북 표지의 가죽은 1900년대, 혹은 그 이후에 만들어진 것이다.

탄소연대측정법은 워낙 시간의 오차가 기니까 정확성을 담보할 수 없더라도, 가죽이 무두질된 방식은 13세기의 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깔끔하고 현대적입니다. 실제로 약품을 분석해 보니 1990년 이후에야 쓰이기 시작한 마감 용품인 I’msosorry와 ButIloveyou, 그리고 Dageojitmal의 합성물이 사용된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표지는 바꿔 끼운 거라 치고 안의 내용만 진본이면 되지 않을까요?

 

2. 블랙북 필사본은 볼펜으로 쓰여 있다.

근대 이전의 기록물은 대개 깃펜이나 붓펜, 목탄 같은 것으로 쓰여 있습니다. 하지만 최근 프랑스의 모 연구팀은 시료 분석 결과 잉크가 현대에 제조되었을 가능성이 높으며, 펜촉의 형태로 놓고 볼 때 JETSTREAM 사의 볼펜과 가장 흡사하다고 결론지었습니다. 실제로 잉크가 다 떨어져서 볼펜을 꾹꾹 눌러 가며 쓰다가 포기한 부분이 있습니다.

이쯤 되면 위서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지요. 그런데 이 책을 그냥 위서라고 배척할 수 없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이 책이 너무나도 사실적으로 14세기, 흑사병이 휩쓴 마을에서 혼자 살아남은 사람의 일상을 묘사하고 있는… ‘일기’이기 때문입니다.

 

블랙북은 아래와 같은 내용으로 시작합니다.

 

나는 ㅈ됐다. 정말 ㅈ됐다. 천 년 전에 나온 어떤 고전 SF소설이 이런 식으로 시작하던데 정말 내가 딱 그 상황이다. 내 동료들이 나를 버렸다. 내가 흑사병에 감염된 것 같다는 이유였겠지만 핑계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흑사병은 내가 태어나기 2천 년 전에 이미 정복된 질병이니까. 아무래도 내가 마음에 안 들었겠지. 이제 꼼짝없이 이 마을에 갇혀서 사람들이 죽는 꼴을 보고 있는 수밖에 없다. 가장 개 같은 점은, 나는 백신을 맞았으니 나만 죽지 않을 거라는 점이다. 나는 이 모든 것을 지켜보아야 한다. 마음이 바뀐 내 동료들이 나를 데리러 오기 전까지.

 

그리고 나서 장 르 부티에는 자신이 기원후 3천년에서 타임머신을 개발해 시운전하다가 그만 중세 유럽에 표류하고 만 불운한 방랑자라고 주장하며, 14세기 이후 세계에서 일어날 일들을 예언(그의 입장에서는 담담하게 기술?)하기 시작합니다. 현재까지 들어맞은 것들은 지동설의 보편화, 종교 개혁, 제 1차 세계대전과 제 2차 세계대전, 9.11 테러, 미국의 이라크 침략 등이 있더군요.

혹시 궁금하실까봐 첨언하자면, 이 장 르 부티에의 묘지는 랭스의 샤르팡트리에 수도원 지하 묘지에 있습니다. 가묘가 아닌가 하는 의혹 때문에 발굴했는데 사람의 뼈가 있었다고 합니다. 어금니 하나에 세라믹 크라운이 씌워져 있었다는 사실이 이 저자가 어쩌면 정말로 길을 잃은 시간여행자가 아니었을까 하는 추측에 신빙성을 더합니다.

 

제 2차 세계 대전이 끝난 직후 사람들은 방심했다. 다시는 전쟁 같은 게 일어나지 않을 거라 믿었다. 하지만, 제 33차 세계대전까지 일어난다는 걸 알고 있는 내 입장에서는, 옛날 인간들의 무책임한 낙관론 같은 걸 보면 헛웃음밖에 나오지 않는다. 21세기 초반에 80억이나 되었다는 인구는 지금 그 반의 반도 남지 않았다. 남은 사람들조차도 방사능 피폭의 후유증이나, 생화학 테러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다.

 

흑사병이 도는 마을 한가운데서 할 이야기는 아닌 것 같지만 말이야. 솔직히 말하자면 내가 살았던 그 빌어먹을 32세기 때보다 지금이 더 낫지 않은가 싶기는 해. 적어도 여기는 홍수는 안 나잖아. 과거의 인간들은 알면서도 방관했던 것 같지만 지구 평균 온도가 6도 상승하면서 해수면이 상승해서 지구 육지의 10%가 물에 잠겼다. 대피하지 못한 사람들, 돈이 없어서 이사를 못 한 사람들은 자기 집에서 자다가 잠겨 죽었다. 어찌 보면 폼페이의 마지막 날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 그래도 폼페이는 섬 하나뿐이었지, 지난 천 년간 우리 세계는 사방팔방이 폼페이였다.

 

굳이 타임머신 개발팀에 지원한 이유는 옛날에 멸종한 사슴이라는 생물을 보고 싶어서였다. 뿔이 있는 동물이라니, 유니콘 같은 것처럼 옛날 사람들이 지어낸 전설이라고 생각했다. 적어도 여기에는 사슴은 많다. 그 외에도 멸종했던 90%의 생물종이 아직 남아 있으니까, 여기서 조금 돌아다닐 수만 있다면 아마 인공지능 데이터베이스에만 존재하던 동물들을 직접 볼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은 있다.

 

장 르 부티에 씨는 다음과 같은 말로 자신의 기록을 마무리합니다.

 

소설이라고 생각해도 좋다. 이 글을 읽는 당신 말이야. 조심해. 아직 일어나지 않았다면, 이 사건들이 너를 기다리고 있을 거야: 중세 시대가 마녀사냥으로 유명했다면, 21세기부터 31세기까지의 천 년은 ‘솎아내기’로 유명하지. 부족한 물과 식량을 차지할 자격이 있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가려내기 위해서 말이야. 부디 당신이 그 전쟁 속에서 당신과 당신 가족을 지켜낼 수 있기를. 무운을 빌게.

 

글쎄요. 천오백 년 전에 홀로 표류한 자기 자신의 처지부터 생각하는 게 좋았을 텐데… 어쩌면 이 저자는 너무 외로워서 미쳐버린 게 아닐까요?

아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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