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최고의 책 10권 (주관적)
안녕하세요? 아도치입니다.
서기 2025년이네요. 저는 어느 인터넷 서점의 이벤트 페이지에서 ’21세기 최고의 책’을 소개한 것을 보고, 아마도 뒷북인 거 같지만, 제가 생각하는 21세기 최고의 책 10권(※첫 사반세기 기준)을 꼽아 보고 싶어 뛰어왔습니다.
아래의 리스트는 제가 읽은 책들 중 특별히 뛰어난, 아니 ‘뛰어난’ 수준을 넘어 ‘걸작’, ‘명작’이라는 찬사가 아깝지 않은 책들을 꼽은 것입니다. 관심이 있는 분야만 들입다 파는 편이기 때문에 취향이 넓지 않아서 제가 못 읽은 책들이 읽은 책들보다 많습니다만…
그리고 시대가 시대이니만큼, 종이로 된 hard copy 형태의 물성을 띤 책뿐만 아니라 웹콘텐츠도 포함했습니다. 2천년 전의 죽간이 책인 것처럼 웹툰과 웹소설도 (매체의 형태만 다를 뿐) 충분히 책이라고 호명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21세기 이전에 다른 언어, 다른 버전으로 출간된 적이 있는 책은 목록에 넣지 않았습니다. (가령 <두 도시 이야기>는 좋은 책이지만 19세기에 나왔으니까, 저는 21세기의 책이 아닌 것으로 카운트했습니다)
이 목록을 공유하는 이유는, 마치 엄청나게 좋은 음식을 먹어본 사람이 “이거 진짜 맛있어요! 제발 한 입 먹어보세요!”라고 권하고 다니듯, 제게 엄청나게 좋은 영향을 준 책들을 널리널리 알리고 싶다는 단순한… 이유 하나뿐입니다. 그러니까… 그러니까, 다른 분들께서도 자신의 ‘좋은 책’ 리스트를 공유해주셔도 좋겠지요.
지금 당장 읽고 싶어지지 않으시더라도, 언젠가 세상이 사막처럼 느껴질 때 이 책들을 읽으시면 오아시스를 만난 기분이 드실 것입니다.
그럼 시작합니다!
1. 삼체 / 류츠신 / 허유영·이현아 譯 / SF
“태양이 사라졌는데 당신의 아이는 어째서 두려워하지 않는가?”
“내일 다시 태양이 떠오를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으니까요.”
우주 SF, 로맨스, 무협.
이 세 가지 장르에 동시에 해당할 수 있나? 싶으실 텐데 정말로 그렇습니다. 삼체는 SF 로맨스 무협입니다. 외계문명과 전쟁을 하고, 몇백 년에 걸친 사랑이 나오며, ‘무’도 있고 그 ‘무’를 통해 실현하고자 하는 ‘협’도 나오죠.
지난해, 다나카 요시키의 <은하 영웅 전설>을 읽고 감동에 몸부림치던 도중 ‘이런 거 또 뭐 없나’ 하며 찾아 헤매다가 어디서였는지 ‘<삼체>에 양 웬리(은영전 주인공)의 명대사 인용이 나온다더라’라는 말을 주워듣고 통 크게 삼체 번역본 3권 전집 세트를 샀습니다. 그리고 그후 약 5일간은 아무것도 못한 채 삼체만 읽고 삼체 생각만 하면서 보냈습니다.
주로 지인들한테 영업할 때 말하는 포인트로는 “완전 대박 미쳤고 천재인 매드사이언티스트 여캐가 유년기부터 노년기까지 등장한다” 등이 있습니다만, 그 외에도 반드시 하고 싶은 말이라면, 삼체는 중국이라는 나라의 문화와 중국어라는 언어의 아름다움을 한계까지 끌어올린 극상의 진미입니다.
중국은 오래된 나라이고 엄청난 저력을 품은 나라입니다. 요즘 많은 사람들이 과소평가하는 것 같아 저로서는 마음이 아픕니다만, 중국은 세계 4대 문명 중 하나의 발상지이고 화약·종이 같은 발명품들이 처음 나온 곳이죠. 그리고 이제는 <삼체>를 배출한 나라가 되었습니다.
<삼체>는 정말 중국적인 SF입니다. 1부의 첫 주인공 예원제(미친 천재 매드사이언티스트 여캐)가 미친 이유는 문화대혁명 때 가족을 잃은 트라우마 때문입니다. 한 중국인 여성의 트라우마가 전 지구, 그리고 은하계의 운명 향방을 바꾸는 걸 보면서 저는 생각했습니다. 아 이건 정말 중국인만, 중국어로만 쓸 수 있는 이야기다. 이런 이야기를 갖고 있는 중국이라는 나라는 정말 대단한 나라다…
저자는 중국의 역사적 사건, 중국의 인물, 중국인이 바라보는 세계관에 의거해 스토리를 전개했는데 이야기는 모든 인류, 우리 은하를 넘어서 저 멀리 있는 삼체 세계에까지 확장될 정도로 무한하게 발산합니다. 이 엄청난 마술이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2. 부서진 대지 3부작 / N. K. 제미신 / 박슬라 譯 / SF
첫장에 있는 저자의 말 때문에 펼친 소설입니다. “살아남은 사람들에게”. 그렇습니다, 이 책은 ‘사는(live)’ 사람들이 아니라 ‘살아남은(survive)’ 사람들을 위한 이야기입니다. 자신의 삶이 그저 살아있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온힘을 다해 발버둥치고 괴로워해야만 겨우 목숨을 부지할 수 있는 수렁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 하루하루 죽지 못해 살고 계신 동지 분들이라면 꼭 읽어보셔야 할 책이 되겠습니다.
땅과 흙을 다루는 이능력을 가진 사람들이, 그 어마어마하게 강력한 능력에도 불구하고 차별과 통제의 대상이 되는 현실은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사회의 소수자·약자에 대한 차별을 연상시킵니다. 읽다 보면 그 지층처럼 켜켜이 쌓여 있던 억압과 슬픔과 분노가 짜릿하게 분출되는 지점이 있습니다. 이건 분명히 혁명 서사입니다. 그것도, 모녀가 나오는 혁명 서사요.
제가 부서진 대지 3부작을 특별히 더 좋아하는 이유는, 이 책은 땅과 흙에 관련된 이능력(“조산력”)을 다루는 특성상, 촉각적 심상을 상당히 많이 활용하는데, 그래서 더 생생하고 아름답게 느껴진다는 점입니다. 이 이야기는 활자로 된 책으로 나왔기에 빛을 발하는 이야기입니다. 만화나 영화 형태였으면 이야기의 재미와 전달력이 반감되었을 거예요. 저자도 그걸 아주 잘 알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자기 글을 잘 다루는 사람이 글을 갖고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 무엇까지 할 수 있는지 보여주는 걸 보면 정말 황홀경이 따로 없습니다…
3. 전지적 독자 시점 / 싱숑 / 판타지(웹소설)
“오직 나만이 이 세계의 결말을 알고 있다.”
28세 남성, 비정규직 사원 김독자. 학벌도 재산도 변변찮고 아버지는 돌아가셨으며 어머니는 살인 혐의로 교도소에 수감되어 계십니다. 중학교 때부터 학교폭력을 당했지만 오직 인터넷에 연재되는 소설 ‘멸망한 세계에서 살아남는 세 가지 방법’을 보기 위해 살아서 어른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3천 화나 넘는 ‘멸살법’이 완결되던 어느 날, 이 세계가 멸망하고 ‘멸살법’이 되어버립니다.
인간은 ‘성좌’들을 위한 유희거리를 제공하는 일종의 등장인물로 전락하고, ‘성좌’들의 관심을 끌어 인터넷 방송처럼 재밌는 컨텐츠를 만들기 위해 서로를 죽여야 합니다. 남을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습니다- 그리고 이 세계의 결말을 알고 있는 것은 소설을 끝까지 읽은 주인공 김독자 한 명뿐입니다.
처음에는 언더독형 주인공을 내세워 활약하는 걸 보여주는 사이다물일 거라 생각했는데, 읽으면 읽을수록 이 소설은 더욱 다층적인 이야기로 직조되어 있음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가령 더 이상 성좌들의 유희거리로 소비당하지 않겠다고 다짐한 김독자와 그 주변 인물들이 모든 ‘시나리오’를 돌파하고 결말으로, 그리고 결말 이후의 세계로 나아가는 과정은 가슴이 뭉클합니다. 그 과정에서 그리스 로마 신화·한국 역사 등의 풍부한 레퍼런스가 적재적소에 배치되는 것은 덤입니다.
‘멸살법’의 강력하고 독보적인 주인공 유중혁이 중학교 시절 학교폭력을 당하면서 소설을 읽으며 버텼던 김독자를 구했습니다. 그렇게 살아 어른이 된 김독자가 세계를 구하는 선순환.
싱숑 작가님께서는 전독시를 “사람이 사람을 사랑해서 세계가 다 좋아진 이야기”라고 요약하신 적이 있죠. 그 말씀이 참으로 맞습니다. 이야기, 특히 판타지 문학이나 장르문학에 사람이 구원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계신 분이라면 꼭 읽어보시길 바랍니다.
4. 실버 트리 / 윤소리 / 로맨스 판타지(웹소설)
사랑이란 무엇인가? 인간이란 무엇인가? 신은 무엇인가?
신이 인간을 사랑한다면, 왜 사랑하는가? 어떻게 사랑하는가?
이 모든 질문을 던지고 서사 내에서 완결성을 이루며 답까지 제시하는 로판 소설입니다. 아주 러프하게 요약하자면 메소포타미아 신화를 기반으로 한 로판인데, 십자군 전쟁과 성전 기사단과 성유물이 주 소재입니다. 아니, 정말로 그렇습니다. 말이 안 되는 것 같지만 진짜입니다.
주인공 레아는 예루살렘 왕국의 수도 아크레에서 살고 있는 은 세공사입니다. 이슬람 왕국의 침략으로 인해 아크레가 함락되던 날, 레아는 아버지의 명령대로 성전기사단 단장님께 아버지가 수리한 검을 가져다 드리려다가 그만 전투에 휘말려 심한 부상을 입고 단장의 죽음을 목격합니다. 어찌저찌 검을 성전기사단에 인계한 후 잘생긴 에퀴에르(견습 기사) 발타 님의 호위를 받아 집에 돌아갔더니 가족들이 전부 죽어 있었습니다…
여기서 시작되는 레아의 장엄하고도 처절한 ‘운명의 돌밭’ 이야기. 끝까지 다 읽었을 때, 저는 저 자신이 14세기 우트르메르의 아크레, 프랑스 리옹, 프랑스 파리, 그리고 21세기 대한민국에 동시에 존재하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마치 저 자신이 무한한 시간과 공간에 확장되어 존재하는 것만 같았습니다. 어떤 인간성을 초월한 위대함과 장엄함이 깃든 이야기… 그런데 이게 결국 ‘사랑’에 대한 이야기라는 게 정말 너무나 마음에 들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결국에는 다 사랑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전 유물론자에 무신론자, 반신론자인데도 이 이야기의 ‘신’이 상당히 마음에 들었습니다. 이것도 어쩌면 이 이야기가 가진 마술적 힘 같습니다)
5. 눈물을 마시는 새 / 이영도 / 판타지
여기서… 길게… 말하는 게 오히려 이 작품에 누를 끼치는 것 같아서 이 항목에서는 말을 짧게 줄이겠습니다.
6. 룬의 아이들 1부 윈터러 / 전민희 / 판타지
여기서도… 제가 감히 중언부언을 하면 안 될 것 같아서 말을 줄이겠습니다.
7. Self-Made Man / 노라 빈센트 / 비문학(르포)
한국어 번역서가 있긴 한데 절판이라서 아마존 킨들로 사서 읽었습니다. 원제 Self-Made Man은 ‘자수성가한 남자’를 뜻하는 영어 단어인데 여기서는 뜻이 좀 다릅니다.
이 책은 레즈비언이자 페미니스트인 저자 노라 빈센트가 약 1년간 남자 ‘네드 빈센트’로 살면서 남성들의 사회 생활과 사고방식을 관찰하고 쓴, 일종의 참여관찰기입니다. 이 참여관찰을 위해 저자는 남성들만으로 이루어진 볼링 클럽은 물론이고 남자 수사들만 사는 수도원에까지 잠입했습니다.
처음에 저자는 남성들은 가부장제 사회에서 혜택을 누리고 있으니 아주 편하게 살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하는데, 남성으로서 사회생활을 하면서 남성들이 겪는 감정 호소의 어려움이나 고독감을 처음으로 직면한 이야기를 가감 없이 솔직하게 풀어놓습니다. 가령 여성은 힘든 일이 있을 때 울거나, 다른 사람에게 감정을 호소하고 상담하는 일이 허용되지만 (이 저자가 2000년대 초반 미국에서 겪은) 남성들의 사회에서는 상상도 못할 일입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이 저자가 남자인 친구와 함께 술집에 가서 (남자로서) 여성에게 작업을 시도하면서, 그 남자인 친구에게 “자 지금부터 내가 (남자인 척하고 여자에게) 헌팅을 해볼 건데 혹시 내 태도가 뭔가 이상하면 내 발을 밟아줘.”라고 부탁하는 장면이 되게 재밌었습니다(이런 걸 흔쾌히 도와주는 친구는 어디 가면 사귈 수 있을까요?). 그리고 그날 저녁 내내 저자는 친구에게 발을 밟혔다는 이야기도…
자신과 다른 젠더의 사고방식과 생활양식, 그들이 사회화된 방식 등을 알아보기 위해 이 정도로 끈기 있게, 진심으로, 열심히 참여관찰한 기록은 정말 동서고금 어디에서도 찾기 어렵지 않나 싶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책을 높게 평가합니다.
8. 당선, 합격, 계급 / 장강명 / 비문학(르포)
문학에 대한 이야기…인 줄 알았는데 주제가 어마무시하게 확장되어 한국 사회 전반을 다룹니다. 한국에서 사는 외국인 지인이 “한국에서는 왜 ~~~(사회문제)가 있어?”라고 물을 때, 십중팔구는 이 책에서 그걸 다루고 있으니 이걸 읽어보라는 한 마디로 대답하고 싶은데 다른 언어로 된 번역본이 나오지 않아서 결국 길게 길게 설명을 늘어놓게 되는 게 정말 통탄할 노릇이에요.
한국에서 살아가고 있는 청년(2030) 세대라면 내용에 공감할 수도, 공감하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한 번쯤 읽어보면 좋을 책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9. 아픔이 길이 되려면 / 김승섭 / 비문학(르포)
트랜스젠더, 수감자(재소자), 해고노동자 등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들의 건강권을 다루며 ‘소수자들도 건강하게 이 세상에서 살아갈 권리가 있다’는 사실을 조곤조곤한 팩트로 풀어놓습니다.
분명히 논픽션이고 소설도 아닌데 읽다 보면 감동하게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10. 카산드라 / 이하진 / 대체역사(웹툰)
마지막은 만화 장르에서도 하나 꼽아야 할 것 같아서 카카오웹툰의 ‘카산드라’를 가져왔습니다. 황금 사과 때문에 일어난 전쟁이라고 알려져 있던 트로이 전쟁, ‘신화’라고만 알려져 있던 그것을 오로지 필멸자 인간의 것으로 가져온 대단한 역작입니다. 기존의 트로이 전쟁을 다룬 컨텐츠가 서유럽 중심이었던 것에 비해, 히타이트 등 고대 근동 문명의 비중이 높게 등장하는 것도 더욱 인상적입니다.
무엇보다도 재미있는 것은 저주받은 예언자라고 알려져 있던(‘미친 여자’라는 인물상 스테레오타입에 꼭 부합하지요) 카산드라 공주를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내세워, 시대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가족과 나라를 지키기 위해 분투하는 그녀의 용기와 지혜와 의지를 풀어냈다는 점일 것입니다. 그녀의 대척점에 서 있는 반동인물이 헬레네인 것도, 정말로, ‘느좋’입니다.
이 만화를 처음 다음 만화속세상의 베스트란에서 보았을 때만 해도 고등학생이었는데 이제 30대가 되어 카카오페이지에서 완결까지 다 봤네요. 신과 영웅들의 이야기였던 일리아스를 오직 인간만의 이야기로, 남성들만의 이야기였던 전쟁사를 여성의 이야기로 전유했다는 점은 짜릿하기까지 합니다. 그 과정에서 인간의 열등감, 자만심, 사랑, 소유욕, 집착, 죄책감 등의 감정을 섬세하게 그려낸 감정 묘사는 그 어떤 작품에도 비하지 못할 만큼 훌륭합니다.
트로이 유적을 발굴한 사람이 하인리히 슐레만이라면, 트로이 전쟁사에서 ‘인간애’와 ‘여성’을 발굴해 낸 것은 이하진 작가님이시라고 생각합니다.
이상 오타쿠 필리버스터가 끝났습니다. 이 글을 읽으시고 혹시라도 읽고 싶다는 생각을 하시고 츄라이해보신다면 제게는 큰 영광이 되겠습니다.
좋은 책을 읽고 나면 아, 나는 이 이야기를 읽기 위해 태어났구나, 라는 생각이 들면서 ‘살아있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곤 하는데요. 올해는 그런 순간이 조금 더 많이 찾아왔으면 좋겠습니다.
브릿G언 분들께서도 행복하고 즐거운 독서 되시기를 빌며 글을 마무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