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위터를 끊었더니
한때 영화광이었던 아재의 백해무익한 한탄을 털어 놓을 곳이 없군요. 그래서 불경스럽게도, 이 신성한 창작자들의 공간을 잠시 더럽힐 수밖에 없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어제 회사 동료들과 점심을 먹고 함께 카페에 있을 때의 일입니다. 어떤 사람이 류승완의 짝패 이야기를 꺼내더군요. 그래서 속으로 ‘오호라, 그렇게 안 봤는데 의외로 영화 좀 아는 사람인가?’ 하는 순간 그 사람이 짝패를 타란티노 식 비급 영화라고 소개하는 것이 아니겠어요?
아마 저녁 술자리였다면 버럭했을 겁니다. 타란티노도 류승완도 비급 영화를 만든 적이 없고, 그 둘의 영화 사이에도 안드로메다까지는 아니지만 별 하나 정도의 먼 간격은 있으니까요.
지금은 막연히 키치적인 감성을 다 비급이라고 부릅니다만, 원래 비급 영화는 미국 영화의 특수한 산업적 배경에서 나온 개념입니다. 타란티노나 류승완 같은 S 급 감독들이 키치한 감성으로 찍은 영화를 B 급이라고 부르는 게 아니라 진짜 싸고 빠르고 짧게 찍는 영화들을 말하는 거였어요. 배급 방식 부터가 에이급 영화들과는 구분 됐습니다.
물론 이는 기본적으로 저질 영화들을 대량 생산하는 시스템으로 기획 된 것이지만, 대량 생산으로 인해 장르 문법이 고도로 발달하고 저예산 덕분에 창작자들에게 상대적으로 높은 자율성이 보장 되면서 뜻밖의 예술적/영화적 성취들이 나타났습니다.
물론 언어는 살아있는 것이고 낱말의 뜻도 시시각각 변해갑니다. 사람들이 비급 영화라는 개념을 원래 뜻대로 쓰지 않고 마음대로 바꿔 부른다는 것 자체에 큰 불만은 없습니다. 문제는 자기가 영화 좀 안다고 폼잡는 사람들이 하나같이 비급이란 말을 키치라는 뜻으로 쓰면서 영화사에서 정말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원래의 비급 영화들이 자신의 이름을 잃고 잊힌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타란티노와 류승완으로 말하자면, 적어도 제 관점에서 류승환은 한번도 타란티노 만큼 고도로 메타적인 영화를 만든 적이 없습니다. 짝패는 말할 것도 없고, 흔히 거의 100% 메타 영화처럼 알려진 저 다찌마와리 조차도 바로 그러한 관점 때문에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편입니다. 다찌마와리를 그냥 진지한 독립군 액션 첩보 영화로 보면 새로운 발견을 하실 수 있을 겁니다.
그런데 하물며 짝패라니요.
다만 여기서 공평을 기하기 위해 타란티노 또한 키치와 메타만으로 영화를 만드는 사람은 아니라는 걸 언급해 두어야 하겠습니다.
그럼 다들 알찬 창작 생활과 즐거운 독서/영화감상 생활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