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이타닉 현실주의를 뛰어넘어: 야생 조립체에 바치는 찬가 리뷰
“인류가 해냈다” SF 콘텐츠들을 접하다보면 종종 듣게 되는 탄성이다. 이 같은 탄성은 인간의 기술력을 바탕으로 인류를 파괴시키려는 그 무언가의 위기를 극복해냈을 때 극적인 효과를 가진다. 대개 이 같은 서사에서는 최첨단 기술을 바탕으로, 극한의 환경에서도 버텨낼 능력을 바탕 삼아 일부 영웅적 존재들이 지구를 구해낸다. 그러므로 인류가 전지구적 위기를 극복해내는 서사에서는 인류가 달성해낸 것으로 귀결되지 않는다. 오히려 기술을 창조해낸 엔지니어와 기업들의 승리를 자축할 뿐이다. (어쩌면 인류의 대표성을 엔지니어들과 초인들에게 전가하고 싶은 걸지도 모른다.)
지난 수년간 범람한 콘텐츠들은 인류가 무언가를 해낸다는 카타르시스를 안겨주면서, 현실의 지속적 체제 유지에 기여한다. 빅테크 주도의 기술 발전(기술사회학적인 관점을 비롯한 시선이 제거된)이 결국에는 세계를 구원할 거라는 서사, 능력주의로 점철된 앨리트들이 인류라는 종의 생존을 가능하게 만든 영웅으로 추앙되는 서사. 그렇게 “인류가 해냈다”는 서사는, 빙산으로 곧장 돌격하고 있음에도 엔진의 화력을 배가시키는 타이타닉 속에 사람들을 말 그대로 구겨 넣는다. 기후위기라는 빙산을 피하고 싶은가? 그럼 빅테크의 기술에 투자해라, 노동해방을 꿈꾸고 싶은가? AI 기술에 투자하라… 하지만 “인류가 해냈다” 부류의 서사와 달리, 우리는 빅테크 주도의 기술 발달이 각종 수탈을 증대시킨 세계에 살고 있을 뿐이다, 인류라는 타이타닉은 빙산으로 돌격하고 있다.
그러므로 『야생 조립체에 바치는 찬가』는 우리가 변화해야함을 내재한다. 이 소설에서 “인류가 해냈다”는 건 없다. 기업 주도적 전략으로 가득했던 세계는 이미 공장 시대라는 야만으로 취급되며, 유토피아적 전망은 그 공장 시대의 사고를 버림으로써 성립됐다. 모두가 올라탄 조타의 방향을 바꿔야함을, 세계의 설계로 구현한다. 환경과의 융합을 고려한 그 모든 시설 설계, 공동체적 노동, 자율적이기로 결심한 뒤 숲으로 떠난 로봇들, 그리고 치열한 삶의 방식이 아닌 여유 있는 삶의 방식…. 공장 시대의 야만이 가져온 자기보존의 역설을 뼈저리게 인지하고, 자연 세계와 문명의 이분법을 지양하는 동시에 문영으로 이름붙여진 파괴적 세계의 제한을 두고자 한다.
그렇다면 단순히 어떠한 풍경을 보여주고 전망하는 것에서 그치는가. 그동안 유토피아적 전망을 제시하는 소설들은 거대 담론을 통해 체제들을 기계적으로 비교하는 형식으로 함정에 빠지고는 한다. 『야생 조립체에 바치는 찬가』의 특장점은 여기서 온다. 이런 세계에서 성취는 어디서 찾아야 하는가, 라는 물음. 개인의 욕망을 증대시키는 사회가 아닌 사회에서 개인은 무엇을 성취하고 실현할 수 있는가. 덱스의 여정은 결국에는 삶의 목적성으로 묻는 방향으로 귀결되는데, 덱스는 이러한 사회에서 금지시키고 권유하지 않은 방식으로 찾고자 나선다. 하지만 이 사회가 권유하는 방식이 억압적이거나 덱스가 체제 반항적인 존재라는 함의를 담지는 않는다. 단지 어떤 사람은 보지 못한 것을 봐야하고, 이 자리에서는 채울 수 없는 성취를 찾는 모험을 감내해야 한다.
『수관 기피를 위한 기도』에서를 살펴봐야 알겠지만, 이 소설이 가닿아 있는 담론은 그대로의 사물들이 지닌 생동성에 대한 것이다. 로봇 모스캡은 있는 그대로의 사물의 생태를 긍정하는 신유물론적 견지를 고수한다. 재밌게도 모스캡의 ‘목적성 없이도 아름답다’는 결론에 가닿으려면 인류는 변화해야 함을, 우리는 이 소설에서 뼈저리게 인지할 수 있다. 무엇이 되지 않음으로서 존중받는 일이라는 것. 그것은 자연 세계와 문명을 분리시킨 채, 바깥으로 규정된 자연 세계를 수탈로 일상화시킨 인류의 시스템의 역학에서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