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기사와 백장미
요즈음에는 유독 까치가 많이 보여 종종 넋을 놓고 바라보게 된다. 허공에 꼬리를 휘저을 때면 오색 파문이 일다가도, 나무 그늘 아래로 숨어버리면 검은색으로 되돌아가는 깃털의 구조색이 자못 고아하다. 추운 계절이 되면 흰 깃을 부풀린 모양새가 귀엽기도 하고, 돌이나 가지 따위를 물고 나름의 꾀를 자아내는 모습 또한 앙증맞기 그지없다. 땅과 나무의 사용권을 두고 청서와 다툴 때는 사납고 야박하기도 하지만, 인간이 남긴 작은 터전에서 치열하게 살아가는 이들에게 프란치스코의 가르침을 새기라고 요구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인간의 관점에서는 그저 영민하고 호기심 많은 아이에 가까울 테니, 그들을 보는 눈의 높이도 이에 맞춰야 하지 않을까 필자는 감히 주장해본다.
옛말에 까치가 울면 중요한 손님이나 좋은 소식이 온다고 하였는데, 요즘은 까치가 그렇게 우는데도 길한 소식 한 번이 없다. 스탠더드 오일의 자식들은 가이아나 유전 사업권을 공격적으로 매수하며 탄소중립의 퇴행을 알렸고, 베네수엘라와 가이아나의 영유권 분쟁은 남이 던진 성냥불에 불탄 꼴이 되었다. 일본에서는 다핵종제거설비를 청소하던 도쿄전력 협력업체 노동자가 오염수를 뒤집어쓰는 사고가 일어났고, 이런 추태를 보인 뒤로 오염수 방류에 관한 소식은 거의 갱신되지 않고 있다. 가자 지구는 집단 학살의 현장으로 변모했고, 월스트리트는 그들의 자본이 요구하는 대로 편향된 어조를 유지하고 있다.
바깥소식이 이러하지만, 그렇다고 집안이라고 덜 시끄러운 것은 아니다. 10‧29 참사 유가족은 언 땅 위에 오체를 던져가며 특별법 제정을 위해 싸우고 있고, 휠체어를 탄 사람은 여전히 서울 지하철을 자유롭게 이용할 수 없다. 또, 학교 측이 실수를 덮으려고 어학연수생을 납치하고 강제 출국시키는 일도 있었다. 그리고 하도급업체를 상대로 한 원청의 ‘갑질’도 있었다. 한국은 겨울이 오면 사무치게 춥고, 봄이 와도 좀처럼 따듯해지지를 않는다. 단언컨대, 지금은 분명히 겨울이다.
한국의 계절은 이제 두 가지만 존재하는 것 같다. 하나는 뜨겁고 축축하고 악취가 나는 계절이고, 다른 하나는 냉랭하고 시리고 마비가 오는 계절이다. 의기가 드높은 푸른 하늘을 고독한 흰 구름이 떠도는 날이 오면, 필자는 청기사Blaue Reiter, 그리고 백장미Weiße Rose를 떠올리고는 한다. 요즘 필자에게 있어, 이 추운 계절은 그야말로 “청기사와 백장미”의 계절이다. 그 의미를 풀어 쓰고자 칸딘스키와 숄 남매의 이야기를 잠시 해볼까 한다.
청기사파Der Blaue Reiter를 대표하는 푸른색은 프란츠 마르크Franz Marc와 바실리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의 철학과 열정을 상징하는 색이다. 칸딘스키는 푸른색을 영속Spirituality의 색으로 보았고, 짙어질수록 안식repose의 요소를 드러내는 색이라고 논문 〈On the Spiritual in Art〉에 적었다. 지상의 고통과 의문, 그리고 인간 그 자체로부터 멀리 있는 하늘의 색을 칸딘스키는 몹시도 사랑했던 것 같다. 대상-중심적인 회화를 거부하고 시원과 추상의 영역으로 발을 들인 선구자다운 취향이라 말할 수도 있지만, 이런 종류의 설명은 그가 살았던 시대를 반영론적 관점으로 검토할 기회를 놓치는 것이기도 하다.
바실리 칸딘스키가 법학 강사의 길을 버리고 화가로 전향한 이유를 설명하고자 한다면, 대부분은 클로드 모네Claude Monet의 「건초 더미」 연작을 전환점으로써 인용한다. 그러나 그의 결정은 단순히 “지금 아니면 없다Now or Never” 식의 즉흥으로만 구성된 것은 아니며, 당시 교수직을 제안해 온 도르파트Dorpat 대학(현 타르투Tartu 대학)의 상황도 적지 않은 비중을 차지한다. 제안이 온 1896년, 에스토니아는 러시아의 지배를 받고 있었으나, 한편으로는 에스토니아 민족주의가 막 기지개를 켜고 있었다. 러시아 제국 치하 발트국가에서는 ‘러시아인 강사’가 발트 민족을 가르쳐야 한다는 제국주의적 정책이 만연했고, 도르파트 대학의 초빙 또한 이러한 맥락에서 온 것이었다. 즉, 뮌헨으로 도약한 칸딘스키의 행보는 ‘꿈을 향한 기투’인 동시에 ‘제국주의에 대한 저항’이라고도 볼 수 있다.
칸딘스키는 전위화가로 명성을 얻은 이후로 세 번의 도피를 해야 했는데, 첫 번째는 1차 세계대전이라 일컫는, 한 사람의 힘으로 감당할 수 없는 거대한 전쟁의 불길이었다. 그는 처음으로 ‘효과적으로 인명을 살상하는’ 끔찍한 전쟁을 피해 러시아로 거처를 옮겼고, 그곳에서 문화예술연구소를 발족하고 박물관 건립과 교육 활동에 전념했다. 그러나 그의 예술관이 “부르주아적인 사치”라는 비판을 받자, 칸딘스키는 급진적이고 공격적인 러시아 학회를 뒤로하고 독일로 향했다. 칸딘스키의 마지막 도피처는 프랑스였는데, 그 원인은 ―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과거 활동지 뮌헨으로부터 출현한 ― 나치즘에 있었다. 바우하우스Bauhaus가 나치에 의해 폐쇄되면서 강단을 잃은 칸딘스키는 자신의 작품을 “퇴폐 예술” 취급하는 독일을 떠나 파리로 향했다. 안타깝게도 후일 파리는 나치 독일에 점령당했고, 칸딘스키는 해방의 빛을 보지 못하고 1944년 12월 13일에 눈을 감았다.
〈백장미통신Flugblätter der Weißen Rose〉은 1942년 6월부터 43년 2월까지 독일 남부에서 배포된 팸플릿으로, 뮌헨 대학 학생이었던 한스 숄Hans Scholl과 조피 숄Sophie Scholl의 주도로 제작‧배포되었다. 의학을 전공 중이던 한스 숄은 1940년 소집된 학생중대에서 크리스토프 프롭스트Christoph Probst와 알렉산더 슈모렐Alexander Schmorell과 친해지게 되고, 1942년에 같은 학교에서 철학과 생물학을 배우던 조피 숄도 자연스럽게 이들과 친분을 맺게 되었다. 철학과 교수 쿠르트 후버Kurt Huber까지 참여하면서 이들 모임은 ‘백장미단’이라는 반反나치 저항 집단으로 발전하고, 42년 6월 대학생들에게 전단지를 배포하는 것으로 활동을 시작했다.
〈백장미통신〉 제1호는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시작된다.
무책임하고 어두운 충동에 빠진 지배자 도당에게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고 “지배”를 허용하는 것만큼 문화민족에게 치욕스러운 일은 없다.
후반부에서는 프리드리히 쉴러의 《리쿠르고스와 솔론의 입법Die Gesetzgebung des Lykurgus und Solon》을 인용, 스파르타의 상황을 들어 나치 체제를 비판하고, 괴테의 〈에피메니데스의 각성Des Epimenides Erwachen〉을 통해 자유를 외칠 용기를 독려하며 끝을 맺는다. 백장미단은 2호에서 폴란드의 유대인 학살을 비난하고, 3호에서는 보다 직접적으로 나치즘에 저항할 것을 주문하면서 나름의 방법과 고찰을 전개했다. 4호에 이르러서는 히틀러를 사탄이자 적그리스도에 비유하며 기독교적 투쟁의 색채를 드러내고, 5호는 히틀러가 전쟁을 연장할 뿐 이기지 못할 것이라고 강하게 비판하고 있다.
1943년 2월 18일, 숄 남매는 위장도 없이 대학 본관에서 〈백장미통신〉의 마지막 호를 뿌렸다. 이전호와는 달리, 〈백장미통신〉 제6호에는 “더 많은 이들에게 배포해달라”는 당부가 빠져 있었다. 백장미의 저항은 그것이 마지막이었고 숄 남매도 이를 잘 알고 있었다. 숄 남매는 신고를 받고 온 게슈타포에 의해 연행되었고, 나흘 뒤에는 민족재판소로부터 사형을 선고받았다. 집행은 선고 당일 시행되었다. 2월 22일이었다.
함께 수감되어 있었던 엘제 게벨Else Gebel에 따르면, 조피 숄은 마지막 순간 이처럼 말했다고 한다.
“이렇게 아름답고 멋진 햇살이 비치는 날에 이제 난 떠나가야만 해. 내겐 죽음 따윈 아무것도 아니야. 우리의 행동이 수천 명의 마음을 흔들어 깨울 테니까. 분명 학생들이 저항하며 일어날 거야.”
이에 엘제 게벨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고 한다.
“조피, 넌 아직 몰라. 인간이 얼마나 겁 많은 짐승인지를.”
숄 남매가 기대한 뮌헨 대학 학생들의 저항은 일어나지 않았다. 뮌헨의 학생들은 제6호에 적힌 내용처럼 동지를 옹호하지도, 나치의 선전에 대응하지도 않았다. 그들은 백장미를 매도하는 학생지도자의 연설에 열성적인 환호를 보낼 뿐이었다.
백장미단의 이야기는 숄 남매의 큰누이 잉게 숄Inge Scholl의 저서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원제 Die Weiße Rose)》를 통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한국에는 1970년대 말 군사독재 시절에 번역되어 읽혔다고 하며, 반정부 페인트 낙서와 같은 저항 방식이 이 책에서 착안한 것이라고도 한다. 과연 백장미단의 일화가 한국에서 다시 읽힐 때의 깊이와 공감대는 자못 남다르다 할 수 있겠다. (필자는 서경식 교수의 《사라지지 않는 사람들》을 통해 이야기를 접하게 되었다. 위의 서술 중 일부는 해당 서적의 도움을 받았다.)
20세기의 격동 속에 있었던 이들이 21세기를 사는 사람들에게 자꾸만 회자되는 건, 아마도 그 시대의 업보와 빚이 다 청산되지 않은 채로 넘어왔기 때문일 것이다. 아라비아의 불완전한 독립이 어떤 혼란을 불러왔는지, 유럽이 포용하지 못한 유대 민족이 지금의 이스라엘을 어디로 이끌고 있는지, 과거 냉전 구도가 전 세계에 어떤 악업의 씨를 뿌렸는지……. 이 모든 질문의 대답이 바로 우리 자신이고 우리가 사는 세상이다. 그래서일까, 20세기를 살았던 의인들의 사상과 행보는 오늘날의 혼돈 속에 더욱 빛나 보인다.
그러나 시대를 넘어선 동질감과 존경심에 더해, 20세기 사람들이 겪었던 문제와 21세기 사람들의 현안 간에 얼마나 큰 간극이 있는가도 우리의 관심을 끈다. 가령, 백장미가 ‘자유Freiheit’를 부르짖은 그 시절에 비해, 우리가 ‘자유’라는 단어를 오해‧오용 없이 사용하기가 얼마나 어려워졌는가? 또, 한 이념에 다른 이념으로 맞설 수 있었던 과거와 달리, 반지성주의와 밈의 확산이란 얼마나 대항하기 어려운 것들인가? 서경식 교수는 팔레스타인 영화감독 미셸 클레이피Michel Khleifi의 발언을 인용하여 “노스탤지어는 하나의 무기”라고 말했다. 그런데 노스탤지어가 무기라면, 일견 버터 같아 보이는 작금의 부조리를 앞에 두고도 날이 무뎌 보이는 것은 어째서인가? 하늘에서 푸른 말을 달리고 가슴에 백장미를 단 현대인은 21세기의 난국을 어떻게 타개해야 하는가?
어쩌면 우리가 20세기로부터 배우는 것은, 파국으로 치닫지 않고 올바른 미래로 나아가게 해줄 이정표 같은 게 아니라, 우리도 ‘그들과 같은’ 운명을 겪게 될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일지도 모르겠다. 전쟁과 사상적 탄압으로부터 피신해야 했던 칸딘스키처럼, 독재 속에 자유를 빼앗기고 “지하실의 이끼처럼” 되어버린 뮌헨의 학생들처럼, 그저 한 인간에게 허락된 힘을 다하여 살아가는 것 말이다. 정면을 응시한 지난 세기의 초상들이 속삭이는 것 같다. “지금의 우리가 너희의 미래다Quod sumus hoc eritis.”
언젠가 밤늦게 거리를 거닌 적이 있었는데, 웬 사람이 풀빵 장사를 마치고 포장마차의 비닐을 묶고 있었다. ‘풀빵’이라 하면, 배곯은 여공들에게 풀빵을 사서 먹였던 평화시장의 어느 재단사 얘기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요즘은 밀가루의 시세도 많이 오르고 식비가 상당히 늘었는데, 임금은 물가 반영 없이 거의 동결 상태나 마찬가지다. 그 재단사가 지금의 사회를 봤더라면 무어라 생각했을까, 그런 상상을 하니 금세 서글퍼지는 것이다. “아직도 기업은 대체생산으로 파업을 무마하려 하고, 경찰은 여전히 노동자를 폭력으로 대합니다.”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다니, 이 얼마나 민망한 일인가. 참으로 춥고 힘든 계절이다.
어제는 크리스마스 이브를 핑계로 이곳저곳 바쁘게 인사를 전하러 다녔다. 기분 좋게 안부를 나누고 돌아오는데, 뜻밖의 광경을 보게 되어 마음이 몹시 불편했다. 한 사람이 아직 오성이 다 발달하지 않은 아이들을 데리고 함부로 천국과 지옥을 논하고 있었다. 성축일 전야에 들으리라곤 상상도 못 한 내용이었는데, 이때의 불편한 감정이 남아 있었는지 어느새 잡설을 잔뜩 쓰고 말았다. 바그너의 『로엔그린Lohengrin』이 다 끝날 때가 되니 피곤한 눈으로 이 단락을 마무리하고 있다. 참으로 안녕하지 못한 크리스마스다. 눈이 많이 온다는데, 이번에 길이 얼면 해빙은 언제쯤 올는지.
오랜만에 크리스마스에 근황이나마 남겨 봅니다. 피곤한 상태에서 급하게 썼더니 글이 두서가 없습니다. 그저 너그러운 마음으로 봐주시기를 바랄 뿐입니다.
올해 안으로 작품 하나를 올리고 싶었는데, 글재주가 없어 그것도 뜻대로 되지 않는 모양입니다. 내년 1월에라도 공개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크리스마스 잘 보내시고 건강히 지내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