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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부의 수건 돌리기] 내 인생의 문구는?

분류: 수다, 글쓴이: 아이라비, 23년 10월, 댓글21, 읽음: 157

 

안녕하세요, 갑자기 새치기한 아이라비입니다.
다음 수건을 받아야 하는 편집자님은 휴가 일정도 있었고,
마침 제가 쓸 글도 있어서 이렇게 새치기를 했습니다.

오늘 제가 선택한 질문은,
“여러분들, 혹시 내 인생에 영향을 준 문장이나 문구 있으신가요?”
어느 순간 이 문장이 내 머릿속에 파고들어와 강탈자처럼 평생 내 의지를 조종하고 있더라는. 그래서 무슨 일이 있든 그때의 문장이 머릿속에서 퍼뜩 떠오르는 경험 말이죠.

저는 늘 머릿속에 따라오는 문장 셋이 있습니다. (아, 네… 3대 문학상, 3대 덮밥집, 3대…. 뭐든 셋을 맞춰야 되는 한국인의 습성입니다.)

우선,

“세상은 ‘평형’을 이루고 균형 잡혀 있단다.”

어디서 나온 말일까요? 이 작품을 좋아하는 분이라면 단번에 알아맞추겠지요.

 

제 인생의 작품이라 할 수 있는 어슐러 K. 르 귄의 <어스시의 마법사>에 나오는 글귀입니다. 사실 <어스시의 마법사>를 읽기 전까진, 전 판타지란 것은 화수분처럼 뿜어나오는 마법을 자유롭게 사용하는 세계라고만 생각했지요. 하지만 르 귄이 그린 새매의 세상 속 이야기는 전혀 다르더군요.

세상의 모든 것은 나름의 균형추에 중요한 역할이기에, 어느 하나를 얻으면 다른 곳에서 그 균형추를 맞추기 위해 잃게 된다는 거죠. 역설적으로는 그렇기에 잃는 게 있으면 얻는 게 있다고도 할 수 있더군요.

이후론 나쁜 일이 생기면 ‘그래, 그만큼 또 얻는 게 있겠지’라고 자기 위안을 하게 되는 버릇이 생겼어요. 나름 긍정의 문장이랄까요? 뭐 지금 세상 돌아가는 꼴이 참 한심스러운데, 이것도 언젠간 균형을 잡는 이치에 따라 다시 돌아올 거야, 라고 스스로 주문처럼 읊조리고 있답니다.

제게 스스로 위로를 주는 문장이 하나 더 있습니다.

“자신의 처지를 필요 이상으로 비극적으로 생각하고 싶어 하거든요.”

이 문장은 제가 한창 하루키 키즈이던 시절, <흙 속의 그녀의 작은 개>라는 단편에서 읽게 된 문장입니다.

이 작품의 내용은 대충 이렇습니다. 작중 화자는 어느 호텔에서 우연히 한 여성을 만나게 되는데, 그 여성이 자꾸 자기 손의 냄새를 맡아요. 나중에 여성에게 듣기론, 어린 시절 자신의 목숨처럼 애정하던 애완견이 죽고, 자기 집 앞마당에 개를 묻었는데 이때 꽤 거금이 든 통장도 함께 묻었다는 겁니다.

몇 년이 흘러, 학창 시절을 보내던 중 한 불운한 친구를 만나게 되는데, 그 아이는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자기가 학교를 더 다닐 수 없다며 걱정하고 괴로워하는 걸 보고 그 아이를 돕기로 하죠. 여자는 오래 전에 묻어둔 통장이 떠올랐고, 개를 묻었던 자리를 파헤치기 시작합니다.

아, 여기까지 보면 왠지 스티븐 킹의 <애완동물 공동묘지>가 떠오릅니다만, 사실 별 일은 없었습니다. 무사히 통장을 꺼내지만, 결과적으로 그 친구는 돈이 필요하지 않았고, 결국 개의 사체가 묻힌 자리를 파낸 그 냄새가 자기 손에서 떨쳐지지 않아 습관적으로 손 냄새를 맡게 된 거였죠.

이때 자기의 친구에 대해 여자가 하는 말입니다. 대충 “그 시절의 여자 아이들은, 자신의 처지를 필요 이상으로 비극적으로 생각하고 싶어 하거든요.”라는 문장이었습니다.

근데, 전 이걸 그냥 제 자신에게 비유해 보게 되었습니다. 난 혹시 지금 스스로를 너무 비참한 인물로 만들고 있지 않은가. 그 이후로 괜히 혼자 울적해질 땐 마치 마법 주문처럼 저 문장을 떠올리게 됩니다. “너, 또, 비련의 주인공이라도 될 심산이야?” 라며 말이죠.

마지막 문장은 “What to Say, How to Say”입니다.

치기어린 시절, 광고 카피라이터가 되겠다고 몇 년 동안 광고 공부를 한 적이 있습니다. 물론 카피라이터는커녕 근처에도 가지 못했지요. 천재적인 능력치에 비해 일은 너무 힘들고 보상은 적은 일이라는 생각에 결국 포기하고 말았죠. 그런데 이 당시의 여러 경험과 인맥이 제 삶에 큰 영향을 줍니다.(결혼도 주례도 전부 광고 공부하다 뵌 분들이었죠. 핫…)

그중 대표적인 문구가 바로 저 “What to Say, How to Say”입니다. 무엇을 말하느냐보다 어떻게 말하느냐가 중요하다, 즉 광고 카피라는 것은 새로울 것 없는 소재를 새롭게 보이도록 포장해 주는 기술이기에 무엇을 말할지 고민하라-뭐 그런 내용입니다.

한데, 이는 거의 모든 곳에 통용됩니다. 제 편집자 업에서 작품의 선별에도 큰 역할을 하죠. 보통 작가들이 글을 쓸 땐 ‘뭘 쓸까?’를 고민하게 됩니다. 하지만 보는 입장에선 ‘어떻게 썼을까?’를 중요하게 여깁니다.

예전에 선배 편집자에게 제가 어떤 기발한 내용의 소설을 쓰면 좋겠다고 얘기를 했더니, 그건 기발한 생각인 거고, 너무 그 기발한 생각에만 의존해서 글을 쓰면 정작 본 이야기는 재미없어진다라고 충고하더군요. 당시엔 신입이고 어려서 잘 이해를 못 했지만,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면 절대적으로 맞는 말이더군요.

이런 How to Say형의 대표적인 작가가 바로 스티븐 킹이죠. 뻔한 소재를 가지고 완전 흥미진진한 이야기로 만들어버리거든요. 소설이 아니더라도 일상에서도 남들과 다른 방향으로 말하고 생각하려고 노력할 때 이 문장을 머릿속에 떠올립니다. 사실 수많은 천재들에 의해 이제 ‘What’은 다 발굴해낸 듯하고, 그걸 활용할 방법은 ‘How’밖에 없어 보이긴 합니다.

마무리로 광고 배우던 시절 애독했던, 지금도 가끔 꺼내서 보는 <카피 캡슐>이라는 책에서 소설 쓰시려는 분들께 도움이 될 만한 재미난 문구들을 흘리며 마무리합니다.

“쓸데없는 것을 치우면 치울수록 헛소리는 줄어든다.”

“노련한 작가에게 누가 물었다. ‘이야기를 어디에서 시작합니까?’ ‘어린애들이 하듯 책 중간을 펴시오.'”

“어느 풋나기 작가가 J. M. 베리(『피터팬』의 작가)에게 조언을 구했다. 자신의 첫 작품의 제목을 지어달라고, 베리는 방대한 분량의 원고를 들여다볼 생각은 하지 않고 느릿느릿한 목소리로 물었다. ‘젊은이, 이 소설에 드럼이나 트럼펫 같은 것이 들어 있소?’ 그러자 그 젊은이는 볼멘 소리로 대답했다. “선생님, 이 소설은 절대 그런 종류의 소설이 아닙니다!” 그러자 배리는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좋소, 그럼 제목을 <노 드럼, 노 트럼펫>으로 하시오.”

다음 수건은 내향인 편집자님께 예정대로 돌아갑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이라비 -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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