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문 10답] 일요일 아침의 넋두리
안녕하세요, 자유게시판에 글을 써 보기는 처음이네요.
다른 분들께서 써주신 글들을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부끄럽지만 저도 한 번 참여해 볼까 싶어 몇 마디를 적어봅니다.
1. 글을 쓰게 된 계기
기억나지 않습니다. 그냥 정신 차려 보니 무언가를 쓰고 있었습니다.
어린 시절, 집에 있는 (거의 모든) 책을 몇 번씩 반복해서 읽었습니다. 친척에게서 물려받은 아동용 동화 전집이나 위인전 같은 건 물론이고 그냥 글자로 되어 있는 건 뭐든지 읽고 봤던 것 같습니다. 책장의 첫 번째 줄과 두 번째 줄에 꽂혀 있던 동화책을 다 여러 번씩 읽은 후에는 책장을 기어올라가서 셋째 줄, 넷째 줄에 있는 책들을 꺼내 읽다가 ‘이러다 책장이 쓰러져 깔리면 어떡하냐’는 걱정 섞인 등짝 스매시(…)를 맞은 기억이 나네요.
미취학 아동 시절 가장 좋아한 책은 ‘사자왕 형제의 모험(아스트리드 린드그렌)’이었고, 초등학교 1학년 때 ‘반지의 제왕: 반지 원정대’ 영화가 개봉해서 그걸 보고 책을 사달라고 조른 덕에 지금도 집에는 황금가지판 ‘반지의 제왕(J R R 톨킨)’ 전권이 있습니다. 초등학교 2학년 때 학교 필독도서 목록에 있던 ‘사자와 마녀와 옷장(C. S. 루이스)’을 읽고 ‘이런 걸 써보고 싶다!’는 생각을 한 나머지 한글(아마 97 버전이었을 겁니다)을 켜고 한국인 초등학생 4명이 나니아 같은 가상의 세계에 가서 모험하는 내용의 소설을 쓴 적이 있습니다(지금은 남아 있지 않아 다행입니다!). 그게 아마 제가 최초로 소설 형태로 쓴 글이었을 겁니다.
초등학교 1학년 때 졸라서 받은 ‘반지의 제왕’ 전집은, 첫 장을 펴자마자 나오는 호빗의 문화와 생활에 대한 기술을 그 나이에 이해할 수 없어 더 이상 읽지 못했습니다. 중학교 시험기간에 처음으로 완독했다고 기억합니다(시험 기간은 공부를 뺀 모든 것의 능률이 오르는 마법의 기간 아닌가 싶습니다).
‘사자왕 형제의 모험’, ‘나니아 나라 이야기’, ‘끝없는 이야기(미하엘 엔데)’ 등을 좋아했던 걸 보면 정말로 어릴 때부터 현실과 다른 세계에서 모험하는 판타지 취향이었네요. 나니아 나라 이야기 시리즈에서 가장 좋아한 건 3권 ‘말과 소년’과 5권 ‘새벽 출정호의 항해’였습니다. 만일 저 자신이 나니아 세계관에 태어난다면 절대 흰 피부를 가진 고귀한 나니아인이 아니라 아마 칼로르멘에서 높은 사람이 행차할 때 엎드려 절하지 않고 얼타고 있었다는 이유로 매질당하는 유색인 소년 노예일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 사실이 자랑스럽다) 라고 생각한 순간이 어른이 된 순간이었다고 생각합니다.
2. 내가 쓰고 싶은 글에 관하여
재미있는 글을 쓰고 싶습니다. 하지만 이게 제 당초 생각보다 (제게는) 더 어렵고 까다로운 목표 같습니다. 그래서 재미까지는 없어도 되니 일단 읽는 사람이 편안하고 즐겁게 읽을 수 있는 글이었으면 좋겠는데 언젠가 달성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제가 어린 시절에는 학교에 판타지 소설책을 가져갔다가 들키면 (곱게 압수당하면 다행이고) 선생님이 다른 학생들 앞에서 책을 찢으며 ‘이런 걸 왜 읽냐’며 망신을 주거나 체벌을 했고 장르문학을 읽는 것 자체를 부끄럽게 여겨야 하는 분위기였습니다(다른 지역에서는 안 그랬기를 바랍니다). “자제분께서 책을 많이 읽으신다는데 좋으시겠습니다”라는 칭찬을 들으면, 제 부모님은 “아닙니다, 이 녀석 판타지밖에 안 읽어서 큰일이에요”라고 대답하셨고요. ‘어른들은 이상하다, 내가 얼마나 재밌고 좋은 걸 읽는지 아무것도 모르면서!’라고 생각하던 저는 판타지를 사랑하는 어른으로 자랐습니다.
앞으로도 뭘 쓰든 장르문학 및 웹소설의 테두리 내에서 글을 쓸 거라는 점 하나만은 확실하다고 생각합니다. (장르문학 또는 웹소설이 아닌 다른 글은 쓰고 싶다고 생각해 본 적이 아직 없는데 앞으로도 가까운 시일 안에는 없을 거 같습니다)
3. 내가 자주 쓰는 장르나, 이야기. 작품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
판타지를 쓰고 있습니다. 그냥 재밌는 이야기를 쓰면 장땡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그리고 ‘재밌는 이야기’를 쓰는 게 아직 어려워 삽질하고 있기 때문에) 딱히 의미부여를 하고 있지는 못합니다만… 제 글을 읽는 이가 사람이라는 존재의 가치를 긍정하고 사랑하자는 생각을 한다면 더할 나위 없이 기쁘겠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현대판타지 웹소설, ‘전지적 독자 시점(싱숑)’이라는 작품의 작가님들께서는 해당 작품이 ‘사람이 사람을 사랑해서 세상이 다 좋아진 이야기’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는 것으로 아는데(만일 제 기억이 틀렸다면 죄송합니다) 제가 글을 그만두지 않고 쓰는 이유도 아마 저 문장 같은 글을 쓰고 싶어서가 아닐까, 라고 생각합니다.
4. 가장 좋아하는 책과 그 이유
한 권을 꼽기는 난감합니다. 활자로 쓰기보다 술잔을 놓고 마주앉아 이야기하고 싶은 주제이므로 패스하겠습니다.
한 장르를 꼽는다면 요즘은 SF에 관심이 생겼는데 뭐부터 읽어야 할지 몰라 우왕좌왕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부서진 대지 3부작(N. K. 제미신)’ 정말 정말 재밌더군요. 글 쓰는 틈틈이 ‘나인폭스 갬빗(이윤하)’을 읽고 있는데 두 번째 권까지 다 읽었습니다.
5. 최근 글을 쓸 때 들었던 생각
‘큰일났네, 오늘은 이렇게 해결됐다 치고 내일은 뭐 쓰지?’
‘그런데 이따가 뭐 먹지?’
(하루치 목표 분량을 다 쓰고) ‘캬! 오늘도 내가 해냄!’
글의 퀄리티에 대해서는 확신하지 못하지만 ‘미래의 나 부탁해!’를 외치고 쿨하게 파일을 닫(았다가 다시 열어서 노려보며 한숨을 쉬)는 편입니다.
6. 글쓰기에 대한 고민, 혹은 글을 쓸 때 이것만은 지키겠다는 나만의 철칙
제 글 속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을 ‘캐릭터’가 아니라 ‘사람’으로 대하려 노력합니다. 세상에서 제일 나쁜 악역이라고 해도 왜 그런 행동을 했으며 그 행동이 왜 나쁜 건지는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더라도 작가 본인만큼은) 고찰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한 줄 나오고 마는 엑스트라라 해도 그 엑스트라 입장에서는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열심히 살았을 거라고 생각해요. 알아주지 않는다면 서운할 겁니다. 소설에는 주인공과 엑스트라가 있지만 현실 세계에는 주인공과 엑스트라가 없으니까요. 저는 제 소설을 자신의 현실 세계로 인식하고 살고 있을 모든 인물들을 사랑합니다. (이렇게 말하면 몇몇 인물들이 눈에 쌍심지를 켜고 쳐다볼 것 같습니다만 사랑하는 것과 굴리는 건 별개니까요, 예. 어쩌겠어요.)
7. 내 글을 한 문장으로 정의한다면
이것은 피와 눈물, 땀과 설사로 쓰는 이야기.
8. 다른 작가님들과 독자님들께 하고 싶은 말
저도 브릿G에서 재미난 글들을 많이 발견한 독자의 입장으로서, 다른 독자님들께서도 읽으면 즐거운 이야기를 많이 발견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작가님들께서는 어떤 글을 쓰시든 항상 즐거우시길 바랍니다.
9, 10번 질문은 부끄러워서 생략하겠습니다.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멋진 일요일 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