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스믹 호러
지금 편집부 추천작으로 떠 있는 위 작품을 읽고 든 생각입니다.
작품 리뷰는 아니고, 사실 댓글로 달 만한 잡상인데 또 그러기엔 길이가 길어서 자게에 글 써봅니다.
(이하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습니다)
수학자들이 일반적으로 추정하기로는, 규칙없이 무한히 숫자가 배열되는 원주율 안에는 가능한 모든 조합의 유한한 갯수의 숫자 배열이 있을 거라고 해요. 예를 들어 원주율 어딘가에는 123456789도 있고, 같은 식으로 100까지, 1000까지, 10^100까지도 있을 거라는 거죠.
그럼 사실 원주율 안에 바벨의 도서관이 하나 있는 겁니다. 숫자를 글자에 대응하는 방법으로 도서관을 만들 수도 있겟지만, 좀 더 스케일을 키우는 건 아스키아트를 쓰는 거죠. 한 줄에 들어가는 숫자의 갯수, 한 페이지에 들어가는 줄의 갯수를 정해서 한 페이지마다 숫자들이 절묘하게 배열되어 글자 하나를 만들게 하는 거예요.
그럼 한 페이지에 들어가는 수백개의 숫자가 우연히 어떤 글자를 만들 확률이 이미 1/10^100*n이 될 것 같은데, 그런 글자가 다시 수만개가 정확한 순서로 나열돼서 책을 만드는 겁니다. 이쯤 되면 확률의 스케일이 1/10^10^10^10^10^10 하는 식으로 커지지 않을까 싶어요. 하지만 그런 배열도 어쨌든 유한한 숫자의 배열인만큼 원주율 어딘가에 있다는 거죠.
그리고, 그렇게 해서 조정래의 ‘태백산맥’이나 톨킨의 ‘반지의 제왕’, 이영도의 ‘피를 마시는 새’, 박경리의 ‘토지’ 같은 대하 소설이 하나 나왔다고 칩시다. 또 할 수 있는 무시무시한 상상은, 그런 소설이 10^10^10^10^10^10회 연속으로 반복되는 거예요! 물론 그런 무시무시한 배열도, (추정키로는) 원주율 안에 있습니다!
예전에 지구에서 시작해서 점점 여러 천체로 커지는 유튜브 동영상을 보면서 구역질할 뻔 했는데, ‘무한’이라는 개념의 세계가 역시 더 큰 거 같습니다.
한편 원주율이 이렇게 무한히 길고 온갖 조합이 다 있고, 제가 위에서 말한 문학작품 같은 게 원주율의 어느 부분에서 나오는지는 제 짐작으로는 현대의 어떤 컴퓨터로도 계산하지 못할 것 같은데요,
저 Aftermath에 나오는 교수님은 그런 면에서 참 재수가 없었던 거 같기도 합니다. 끽해야 그런 조그만 컴퓨터로 계산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그것도 교수가 우연히 자기 눈으로 읽은 부분에 그런 무서운 명령어가 숨어 있었다니 말이죠. 이쯤 되면 그 무서운 명령어는 우연의 산물로 생긴 게 아니라 누군가의 의도일 성도 싶습니다. 아아, 누군지는 몰라도 무서우신 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