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티븐 킹, 듀마키 – 살아남은 사람은 살아가야 하니까.
오래 전에 혼자 쓴 글이지만… 나누고 싶어서 혹은 스티븐 킹 님 소설 뽐뿌 주간이라서(저혼자 만든) 올려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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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하게도 킹 아저씨는 내가 우울증에 빠져있을 때 신작을 내주시고, (<리시 이야기> 때도 그랬다)
난 그의 소설을 읽으면 조금 살아갈 기운을 얻거나
그것까진 아니라도 오랜만에 비교적 기분좋은 몇 시간을 보내게 된다.
밤에서 새벽까지.
그의 소설을 읽으며 나는 이곳에 아닌 다른 세계에 가게 되는 것이다. 어쩌면 부야문일지도 모를.
<듀마키>는 <리시 이야기> 만큼은 아니지만 내게 그런 시간을 선물해주었다.
남은 페이지수가 점점 없어지는 것이 초초해지는…
극히 드문 특별한 부류의 책만이 우리에게 선사할 수 있는 그런 느낌말이다.
스티븐 킹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저마다 다양한 이유 때문에 그의 소설을 좋아할 것이다.
거칠게 나누면 그의 숨막히는 공포와 흥미진진한 이야기성을 좋아하는 사람,
그속에 들어있는 세상에 대한-어떤 혼탁한 흙탕물을 정수했을 때 나오는 한 방울의 정수같은 ‘감정의 반짝임’을 좋아하는 사람,
아니면 그 둘 다를 좋아하는 사람.
나는 굳이 말하자면 두번째 부류의 사람이다.
재미있는 이야기는 나도 싫어하는 편은 아니지만
내겐 그것보다 수조 안에서 소용돌이치는 검은 흙 속에 숨어있는,
맑은 물방울을 순간순간 느끼는 기분이 좋아
그래서 내가 좋아하는 그의 소설들은 그런 느낌을 많이 불러일으키는
애절함과 슬픔, 학대, 고통, 심리묘사 등의 요소가 많은 것들이다.
듀마키도 내겐 그런 부류에 속했다.
물론 공포스런 분위기도 재미는 있었다. (뒤에는 스포일러 있음)
작은 인형 하나로 그렇게 큰 공포의 분위기를 불러일으키는 그의 재능에는 감탄을 표한다.
하지만 내겐 그 공포 장치가 그리 크게 보이지는 않았고,
어찌보면 공포 장치 자체는 <리시 이야기>나 <안개> <뗏목> 같은 것에 비해 조금 아래랄까 그런 느낌도 들었다.
수긍이 조금 안 간다는 느낌.
교통사고라는 첫번째 이야기 촉발의 사건, 깊은 고통과 감정과 정조, 그림이라는 아이디어가 먼저 있었고
공포의 주체는 나중에 이야기를 맞추며 상상된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그래도 그것은 그냥 지나갈 수 있다. 왜냐면 다른 것들이 훌륭했기 때문에.
이 복잡한 이야기 속에서 내게 중요하게 다가왔던 것은…
예술로 삶의 고통을 이겨내는 것,(스티븐 킹 자신이 교통사고를 글쓰기로 이겨냈듯이 주인공은 그림으로 다시 살아난다)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애절한 정(일자와 에드거의 관계에서 보여지듯)
많은 것을 잃고 만나 더욱 절실하게 느껴진 인강의 정(에드거와 와이어먼의 우정)
하지만 그것은 잃을 수 있고, 되찾았다가도 끝내는 영원히 잃게 될 수도 있는 삶의 비정함과 안타까움,
(에드거와 부인의 이혼-잠깐의 화해-영원한 단절, 그리고 일자의 죽음 등)
– 하지만 살아남은 사람은 살아가야 한다는 것.
이것이겠다.
아, 설명이 되려나.
어쨌든 이것은 서평이라기보다는 진짜 개인적인 감상이겠다.
책을 읽은 사람만이 이해할 수 있는.
인형을 잠재우는 것이 ‘맑은 물’이라는 것이 지금의 내게는 무척 의미심장하게 느껴진다.
내가 <듀마키>의 마지막장을 덮으면서 머릿속에 떠올린 이미지가 바로 그것이었다.
수조 속의 지독한 흙탕물. 하지만 그것들이 서서히 가라앉으면 위에는 맑은 물의 층이 생긴다.
고통이나 삶의 어디에도 맑은 물은 숨어있고
고통을 잠재우거나 조금이라도 살아갈 이유를 주는 것은 그런 맑은 물이다.
사람에 따라 그 맑은 물은 다 다른 것이겠지.
스티븐 킹에게는 그것이 어쩌면 글쓰기와 그의 아내 태비사로 대표되는 가족일 것이다.
내게는 그것이 무엇일지. 찾아낼 수 있으면 좋겠다. 아직은 좀 요원하지만.
여러분들도.
살아남은 사람은 살아가야 하니까.
아, 그래도 유머 한 조각 정도는 잊지 말구. 커트 보네커트도 이에는 찬성하겠지? 어쨌든 스티븐 킹 아저씨 쌩스~ 정말 사랑해요!
요새는 정말 아무것도 안하고 책만 읽고 있다. 인터넷도 정말 오랜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