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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븐 킹, 내겐 너무나 완벽한 작가 – 리시 이야기

분류: 책, 글쓴이: 조제, 19년 12월, 댓글2, 읽음: 197

그럴 려던 건 아닌데 노곤한 몸으로 잠들려던 난 스티븐 킹의 <리시 이야기>를 조금만 읽고 잘까 하다… 밤을 꼴딱 새고 말았다. 읽는 동안 2번 정도 울었던 것 같다. 이 정도의 감동을 준 소설은 몇년 전에 역시 울면서 읽었던 에밀 아자르의 <자기 앞의 생> 정도?

융이 봤다면 ‘킹 선생!!’ 이러면서 존경의 악수를 했을지도 모르겠다. 자신의 사상이 이렇게 아름답고도 오싹하고 감동적인 이야기로 실체화되었으니… 어슐러 르귄도 ‘당신 정말 좋아!’ 이러면서 포옹을 했을지도. 융이나 르귄 여사나 ‘빛과 어둠이 함께 있다는 것’을 ‘어둠은 빛의 왼손’이라는 것을 잘 아는 사람이니까 말이야.

처음 스티븐 킹의 소설을 봤던 중학교 때부터 킹 아저씨는 내겐 너무나 완벽한 작가였다. 남같지 않았다. 외람된 말이지만 나같았다. 나는 그를(많은 다른 이들도 그렇게 혼자 방구석에서 말했겠지만) 이.해.할. 수. 있었다. 무슨 말을 하는지, 왜 그런 이야기들을… 나비가 아니라 거미처럼 때론 꾸역꾸역-어쩔 수 없이- 지어내는지 알 수 있었다. 무의식의 안테나에서 그런 것들을 잡아내는 것이다. 깊은 연못 속에서 하나씩 하나씩 건져내거나 혹은 떠오르는 것이다. 안 떠올랐으면 해도.

킹 아저씨는 ‘당신은 빛에서 뭉큰한 어둠으로, 또한 어둠에서 빛으로 나를 이끌겠구려.’ 하는 어떤 직관을 주었다고나 할까. 그 직관은 여태까지 계속 맞아왔다.

그리고 <리시 이야기>에서 가장 큰 정점을 터트렸다. 한 3번 정도는 읽어야 정확히 말하고 이해할 수 있겠지만 내 무의식은 아마도 다 이해했을 것이다.

‘유명한 소설가(왠지 킹을 떠올리게 하는) 스콧 랜던이 죽은 뒤 아내 리시는(이역시 그의 아내 태비사를 떠올리게 한다. 이 소설이 아내 태비에게 바쳐졌다는 것도 역시 의미심장.)는 스콧의 유고를 노리는 싸이코 살인자의 위협을 받게 된다. 그 과정에서 리시는 스콧과 자신의 잊었던 과거 기억을 떠올리게 된다.’가 줄거리인 이 소설은 외형적으론 스릴러이지만 안에서는 영혼의 여행이 – 빛과 어둠과 오싹함과 피가 있는 – 여태까지 본 킹 아저씨 세계 중 가장 깊고 널리 퍼지는 향기를 풍긴다.

소설가 스콧 랜던과 그의 아내 리시가 본 그 ‘알망나니’가 무엇인지.
‘부야문’이 무엇인지, ‘우리 모두 가서 물을 마시는 언어의 못이자 신화의 못’이 무엇인지.
직관적으로 알 수 있다. 말보다 느낌으로 알 수 있다.

내가 언젠가 아주아주 맑은 기분일 때
방바닥에 뺨을 대고 누었을 때 지구속에 은빛의 은유의 샘이 나무 뿌리처럼 흐르고
나는 ‘은유’의 물이 졸졸졸 흘러가는 소리를 바로 옆에서 듣고 있다고 느꼈을 때,

또 언젠가 내가 정말정말로 피곤해 오히려 각성상태일 때
내 몸이 파란 물이 가득한 빈 유리병이고 그 안에 이미지의 심해어가 헤엄쳐
심해어의 지느러미가 몸에 스칠 때에만 나는 그 이미지를 언어로 살짝이나마 잡을 수 있다고
느꼈을 때. 그 지느러미가 헤엄치는 소리를 진짜 듣고 손끝에 스치는 물고기의 차가운 비늘을 느꼈을 때.

살기 어려워 잊어버리기 쉬웠던 그 순간순간들 내가 갔다 왔던 그 ‘연못’
그것들에 대해 킹 아저씨는 이렇게 멋지구리하게 써주셨다.

그리고 5살 때부터 진력나도록 반복해서 꾼 그 악몽, 천장 위 나를 노리는 검은 강철솜 같은 광기,
마르고 창백한 우울증의 유령. 어둠.에 대해서도 소름끼치도록 써주셨다.

 

….

 

그리고 가장 중요한 ‘사랑’에 대해서도 써주셨다.
가슴 아리도록. 내가 잘 모르는 ‘사랑’에 대해서도.

나는 이 소설을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나 다른 그 어떤 소설과도 바꾸지 않겠다.
내가 노벨상을 줄 수 있다면 이 소설에 주겠다.

 

한 인간의 영혼에 대해서, 그 암흑과 빛과 학대와 살아남음에 대해서

이정도로 내 마음에 완벽하게 와닿도록

쓸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이 소설에 공명하게 될, 그런.. 영혼을 지닌… 그럴수밖에 없는… 영혼들에게도 평화가 있길.
비밀과 어둠이 없는 영혼이 세상에 어디 있겠냐마는
킹 아저씨나 나처럼 누구보다도 더, 좀더, 더, 그것에 공명할…
리사보다 스콧 랜던에 가까운…
영혼들이 있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조증을 지나 울증에 좀먹어 가던 내 영혼에 이정도로나마 에너지를 줄 수 있었다니.
킹 아저씨는 정말 만세다. 오래오래 사셔서 이런 이야기를 많이 써주세요.
저도 그 연못에 가고 싶군요. 낮이면 그렇게 아름다우나 밤에면 독을 내뿜은 이국의 숲이 있는.
아니, 나도 갈 거에요. 그 ‘부야문’의 숲과 연못에.
이제 내가 이름을 붙일.  아니 항상 이름을 붙이려던.

이제 어떻게 살아가야 할 지 생각해야겠다. 정말 생각하고 싶다.

조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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