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게시판

가방실종사건

분류: 수다, 글쓴이: 달바라기, 17년 8월, 댓글22, 읽음: 89

일본 다녀왔습니다.

그리고 돌아오면 간단한 여행기라도 써볼까, 했는데..

그럴 상황이 아니더군요.

김포공항을 나와 지하철을 타고 버스터미널로 향하던 길에 가방이 하나 없는 것을 알았습니다.

가족 여권 셋, 맥북, 아이패드, 키보드, WiFi루터, 리디북스 페이퍼, 신분증과 신용카드가 든 지갑, 휴대용 배터리, 이어폰을 포함한 온갖 종류의 케이블 등이 든 가방.

합산 200만원은 거뜬히 넘는 물건들.

..

아내와 딸은 먼저 집으로 보내고 저는 부산히 움직였습니다. 안그래도 비행기 탈 때부터 두통이 조금 있어서 힘들었는데 약 사먹을 시간도 없고.

지하철 분실문 센터에 전화하고, 김포공항 분실물 센터에도 전화했지만 없더군요.

가장 의심스러운 곳이 김포공항 대합실이어서 결국 CCTV
까지 확인했습니다. 확실히 대합실 소파에 앉았다가 나갈 때 제가 문제의 가방을 매고 있지 않더군요. 애기도 안고 있고 여행가방에 다른 손가방도 있어서 부족한 걸 몰랐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하필이면 앉았던 소파가 매우 정확히 대합실 중앙에 있는 기둥에 가려져 안보이더군요. 공항직원분도 이 상태로는 비슷한 가방을 가져가는 사람이 보여도 같은 가방인지 알 수 없으니 ‘의심’ 이상으로는 갈 수 없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사생활보호 등의 이유로 본인이 비춰지지 않는 CCTV 영상은 사실 보여주면 안된다고 합니다. 그래도 사정이 있으니 제가 공항을 나가고 30분 정도까지는 보여주셨는데, 그 이상은 경찰에 정식적으로 신고하고 조사를 의뢰해야 한다고 하네요.

결국 공항경찰대에 가서 도난신고까지하고 수사를 의뢰했습니다.

그렇게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일을 마치고 지끈거리는 머리를 감싸고 집으로 가는 막차를 타러 갔습니다. 비행기에서 내리고 나서 아무것도 먹지 못해 터미널에서 타이레놀과 햄버거를 사서 억지로 씹어 먹었어요.

생각했습니다.

 

사실 가져간 사람을 찾기는 힘들다. CCTV에 먼 곳이라 화질도 나쁘고 의심가는 사람이 있어도 그 사람을 특정할 방법도 없고. 그곳 바로 앞에 안내데스크가 있는데 거기에 맡기지 않았다는 건 애초에 돌려줄 생각이 없는 것이다.

컴퓨터도 사라지고 아이패드도 사라지고, 심지어 그 안에 있던 아이디어 수첩(아가사 노트..!)도 사라졌다.

더이상 내게 글을 쓸 수 있는 도구 따위는 없다.

더 이상 취미생활을 할 기분도 아니고, 그냥 가족과 먹고 사는 것에만 집중하고 살까.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갑자기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어요.

.. 어느 아주머니께서 제 가방을 가족 가방과 착각해 잘못 가져갔다고 하더군요. 도중에 실수를 인지했지만 정황이 없어 그대로 와버렸다고 합니다. 아무래도 저와 같은 시간에 소파에 앉아 있다가 먼저 제 가방을 가지고 가신 거 같아요. 그래서 저도 소파에 남은 짐이 없다는 걸 보고 그냥 가버린 거 같고.

그리고 아주머니 가족들이 밤늦게 집에 도착해 집을 풀었을 때 가방의 존재가 드러나고, 아주머니는 남편께 엄청 꾸중을 들었다고 하더군요.

연락할 방법이 없어서 고민하다가 제가 여권 뒤에 적어둔 전화번호를 발견하고 연락을 했다고 합니다. 허허허허…

가족이 전부 난리가 난건지, 나중엔 따님이 전화를 바꿔받아서 어떻게 돌려줄지 얘기를 하더군요. 처음엔 택배를 생각했는데 노트북도 들어있고 하니, 결국 주말에 아주머니 남편분이 일하시는 가게로 제가 가지러 가기로 했습니다.

오늘 아침엔 담당 경찰관께 연락해서 사건 종결지었습니다. 아주머니 남편에게도 경찰이 연락을 해서 정말 큰일 날뻔 했다고 하더군요. CCTV 확보하고 담당부서 배정에 정식 수사를 위한 서류작업까지 하던 도중이었다면서.. 게다가 물건을 가져간 이상, 분실이 아니라 도난이 되어버린 상태였으니.

아무튼, 토요일에 서울에 올라갑니다. 가방 찾으러.

..

..

..

그러니까, 여러분.
여권 뒤에는 꼭 연락처를 적어두세요.
지갑에는 명함 한 장 넣어두세요(평소엔 넣어뒀는데..!)

달바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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