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심 심사위원 김보영(소설가)
다양한 장르의 시간여행 이야기가 본심에 올라왔고 전반적으로 즐겁게 보았다. 감탄할 만큼 뛰어난 작품도 눈에 띄었다.
이번 공모전에는 유독 자신의 존재를 지워버리는 이야기가 많았다. 법체계 따위는 저만치 무시하는 폭력적인 친부살해나 가족살해도 눈에 띄게 많았는데, 역시 자신의 존재를 없애는 것과 무관하지 않았다. 삶이 척박해졌다는 신호로도 볼 수 있겠지만, 보통 그렇듯이 우연의 산물로 생각한다.
설정이 하나뿐이라도 얼마나 영리하게 이를 활용하는가가 작품에 설득력과 긴장감을 준다. 필력과 이야기의 흥미 이외에도, 설정을 잘 이용한 작품은 평가가 높아졌고, 설정을 늘어놓기만 하고 활용하지 않았거나 그리 영리하게 활용하지 못한 작품은 평가가 깎인 편이다.
‘어느 시대의 초상’은 단연 눈에 띈 작품이다. SF의 장점 중 하나는 그 설정이 개인의 일상뿐 아니라 세계 전체의 구조를 바꾸고, 그러기에 사람들의 삶 전체가 바뀌는 모습을 보여주며, 그 거울을 통해 우리 자신을 더욱 선명하게 보게 하는 점이 아니던가. 시간여행이 보편화된 시대, 시간은 공간이나 진배없는 곳이 되고, 가난한 이들은 공간을 떠돌듯이 정착하지 못하고 시간을 떠돈다. 좋은 세계를 구성했을 뿐 아니라 한 명의 개인의 삶 또한 놓치지 않고 세심하게 어루만진다. 탁월하다.
‘오버랩 나이프, 나이프’는 ‘어느 시대의 초상’과 분위기는 완전히 다르지만, 우열을 가리기 어려울 만큼 좋은 작품이었다. 가정폭력이라는 무거운 소재로 시간여행의 고전적인 주제를 훌륭하게 그려낸다. 두 개의 이야기가 서로 교차하다가 이어지는 지점이 훌륭하다. 예측할 수 있으면서도 예측을 벗어나는 작은 반전들이 계속되며, 긴장감이 끊어지지 않고 마지막까지도 호흡이 좋다.
‘별일 없이 산다’는 양자역학적 평행세계에 점이라는 토속적인 소재를 버무린 점이 좋았다. 후반에 설정을 크게 활용하여 이야기를 확 끌어올리는 지점에 쾌감이 있다. 단지 점을 치며 반복해서 보여주는 장면이 사건 전개에 큰 의미가 없고, 화자의 선택 또한 의미가 적은 것이 몰입도를 약하게 한다. 장점과 단점이 뚜렷한 글이었지만 작가의 미래는 기대 된다.
‘뒤로 가는 사람들’은 작가가 규칙을 만들고 그 규칙에 맞추어 캐릭터를 논리적으로 움직이는 솜씨가 좋았다. 사건의 중심에서 바로 시작하여 마지막까지 몰아친다. 호러소설로서도 흥미로웠다. 욕설과 폭력이 노골적인 면은 호불호가 갈릴 수 있겠다
‘디아볼릭 루프’는 상당히 매력적이었지만 시간여행소설로 볼 수 있는지에 의문이 있었다. 장편의 첫 에피소드로 보이는 재미있는 퇴마소설이다. 다른 공모전이었다면 더 좋은 평가를 받았으리라 생각한다.
‘서프라이즈 이벤트’는 사랑을 위해 끊임없이 시간을 되돌리는 사람의 이야기다. 애인의 다른 능력이 드러난 순간의 상승효과가 좋았다. 소소하고 귀여운 로맨스였지만 유전자나 사상의학에 계속 집착하는 점은 점수를 깎은 편이다.
‘자정’은 괜찮은 면이 있었지만 무리하게 외국으로 설정한 덕에 시야가 많이 좁았다. 확인할 수 없는 설정들이 등장하는데 활용되지 않았고, 정황이나 결말도 모호한 편이다. 작은 이야기를 욕심 없이 끌어간 점은 좋았다.
‘그는 돌아온다’는 구조는 삐걱거리지만 속도감이 있는 소설이다. 그다지 논리적이지 않은 주인공이 상황을 극단적인 형태로 해결하려 드는데, 어처구니없는 일들이 계속되다보니 결국은 웃게 된다.
‘너’는 시간여행으로 주인공이 하려는 것이 오직 하나 자신의 열등감의 타파와 인생역전이라는 점에 이야기 자체의 감동이 적다. 결말의 충격이 좋았지만 당위성은 적은 편이었다. 안정적인 문장과 필력은 장점이었다.
‘네 번째 세계’는 열심히는 썼지만 이야기를 의미 없이 늘렸다. 설명으로 소설을 끌어가는 것은 함부로 할 일이 아니다. 설명과 추론의 많은 부분에 오류가 있고 오류가 없는 부분은 상황에 도움이 되지 않았다. 이야기가 설명에 파묻혔는데 이야기 자체의 독창성에도 점수를 주기 어렵다.
본심 심사위원 김용언(북칼럼리스트)
타임 리프라는 소재가 이만큼 대중화되었다는 뜻일까? 본선 진출작들을 죽 읽으면서, 아무래도 단편이라는 분량의 제약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타임 슬립을 아주 개인적인 욕망(나를 해하는 자를 죽이겠다, 혹은 너의 사랑을 되찾겠다)의 해결책으로 사용하는 경향이 두드러진다는 게 흥미롭기도 하고, 또 여러 편이 계속 그 같은 방향으로만 간다는 것이 지루하기도 했다.
그런 면에서 가장 돋보인 작품은 <어느 시대의 초상>이다. 세대를 건너뛰어 노동의 할당량을 채우며 영문도 모른 채 물려받은 빚을 계속 같아야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현재 한국사회에서 벌어지는 젊은이들의 좌절감을 뛰어나게 형상화하였다. 주제를 전달하기 위해 억지로 타임 리프를 끌어들이지 않았고, 타임 리프를 설명하기 위해 구구절절한 원리를 늘어놓지 않은 채, 타임 리프라는 장르적 특성을 정확히 이해하는 동시에 자신이 지금 시점에서 가장 하고 싶은 이야기를 기술했다는 인상을 받았다.
<오버랩 나이프, 나이프>는 가슴 아픈 가족사를 끝내고 사랑하는 사람을 구하기 위해 시간을 되돌리는 여자의 이야기다. 이미 결과로 나와버린 것을 바꿀 수 없다는 시간 여행의 원칙에 충실하게, 사건은 방향을 조금씩 바꿀 뿐 계속 끔찍한 결과로 돌아올 때의 그 참담한 슬픔이 안정적인 문체로 펼쳐진다. 다만, 시간여행의 계기가 ‘낯선 목소리의 속삭임’으로 설정되어있다는 것은 지나치게 편한 선택이 아닌가 하는 아쉬움은 남는다.
<별일 없이 산다>는 수천년을 넘나들며 주사위의 선택에 자신의 삶을 내맡기는 점쟁이 가문의 이야기라는 흥미로운 소재를 택했다. 타임리프의 선택지를 확장시켰다는 점이 새로웠지만, 커피를 마실 것인가 녹차를 마실 것인가른 선택부터 죽을 것인가 살 것인가라는 선택에 이르기까지 너무나 많은 선택지에서 ‘후회할 때마다 시간이 되감긴다’라는 설정이 동일하게 적용된다는 게 매끄럽게 붙지는 않은 인상이다.
이외의 작품들 다수는 ‘시간을 되돌려서 나의 개인적인 욕망을 추구한다’는 소망 실현의 소재로 타임 리프를 활용하지만, 주인공의 소망 자체가 보여주는 한계가 너무 명확하기 때문에 굳이 이것을 위해서 시간 여행을 감수하게 되는 것인가 라는 의문을 해소해주지 못한다. 독자가 주인공의 동기를 납득할 수 있도록 하는 설득력은, 아무리 뻔한 소재라도 작가가 어떤 관점에서 이 욕망을 바라보고 해석하느냐라는 지점에서 찾을 수 있다. 나머지 작품들은 그 같은 설득에 다다르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