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림(작가, 작품: 『나무 대륙기』, 『노래하는 숲』, 『뿌리 없는 별들』 외 다수)
전체적으로 로맨스와 스릴러의 조합이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거나 둘 다 미미하다는 점이 많이 아쉬웠습니다. 두 가지 화두에 지나치게 침잠하여 소설의 기본인 이야기의 재미를 잃은 작품들도 있었구요. 본심에 오른 작품 중엔 비극이 많았는데 요즘같은 세태에 사랑이라는 감정이 얼마나 모호하며 비현실적인지 작가들이 은연중에 깨닫고 버거워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개인적인 생각도 들었습니다.
단편 「폭풍의 집」은 주인공 소영의 과거 불행과 얽인 긴장과 섬뜩한 사건으로 읽는 내내 독자를 압도합니다. 가족이라는 벗을 수 없는 끔찍하고 공포스런 굴레를 호러로 잘 표현하였습니다. 갑자기 들어온 세 남자로 인해 긴장감이 더해지고 해소되는 일련의 모든 과정도 설득력 있고 자연스러웠습니다. 노골적인 애정 묘사는 없지만 섬세한 인물의 행동으로 두 사람의 애정이 밀도 있게 표현되어 로맨스로도 손색이 없다고 판단하였습니다. 무엇보다 문장과 단어마다 주의 깊게 배치한 으스스하고 숨막히는 스릴이 압도적이었습니다. 문장력, 캐릭터의 개성, 이야기 완성도, 로맨스와 스릴러의 공존, 모두가 수상작으로 손색이 없었습니다.
장편 『단풍나무 저택의 유산』은 레즈비언 로맨스라는 소재를 전형적인 신분 로맨스로 다소 진부하게 풀어간 것이 아쉽습니다만 로즈미나와 라울이라는 개성 있는 캐릭터와 후반부의 역동적인 사건의 해결, 인물들의 선택 과정이 빛을 발했습니다. 사건과 긴장을 이야기 내에 골고루 적절히 배치하고 주인공 레티와 엘리자벳을 좀 더 입체적인 캐릭터로 묘사한다면 빼어난 작품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중편 「달빛 수사」는 헤어진 연인들의 재회라는 점에서 서로를 알아가는 긴장이 제거되어 이야기의 진행이 빠르고 흡인력이 넘칩니다. 의뢰인인 선우, 탐정일을 맡게 된 희우, 재은이라는 특수능력 캐릭터는 각자의 개성으로 다양한 스릴러를 끌어올 수 있어 기대감을 갖게 하는데, 작중에서는 과거의 상처를 봉합하고 의뢰를 마치고 연인들에게 해피엔딩을 주는 것에 더 많은 분량을 주어서 다소 아쉬움을 남겼습니다. 사건을 더 넣어서 장편화 하거나 옴니버스로 만들어도 좋을 것 같습니다. 군더더기 없는 문장이 매끄럽고 이야기에 다소 아쉬움을 남기나 완성도와 마무리가 깔끔하다는 점이 좋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단편 「휘파람을 불면」은 설정과 캐릭터가 뛰어나고 문장이 아름다워서 흡인력이 높았습니다. 다만 작중에 사건이랄 만한 것들이 뚜렷하지 않아 서사가 부족한 점이 아쉬웠습니다. 충분히 흥미로운 설정과 개성 있는 캐릭터들이라서 다음 이야기가 기대되었습니다.
단편 「달에서 온 32번째 메시지」는 별들을 사이에 두고 떨어져 있는 연인들이 감정이 인공지능 통신기 에코로 미묘하게 뒤틀리는 치밀한 서사가 돋보입니다. 물리적 공간 차로 헤어진 연인간의 불안정한 교류와 에코로 인한 통신의 왜곡, 인공지능과의 사이에 싹트는 감정을 암시하는 데서 불안감이 증폭하는 것도 좋았는데 그 부분의 마무리를 제대로 처리하지 않고 반전으로 납작하게 만들어 버린 게 아쉬웠습니다. 설정도 서사도 인물도 완성도가 높았습니다만 본 심사의 중점인 로맨스와 스릴러가 약하여 아쉬움을 남겼습니다. SF로서 완성도 높은 좋은 작품이라 생각됩니다.
단편 「태이에게」는 반전의 반전을 거듭하는 스릴 만점의 결혼생활을 그린 작품입니다. 사건을 벌이는 인물들의 동기가 부족하고 1인칭 시점에서의 서술이 매끄럽지 않아 집중력을 떨어트렸습니다. 결혼이라는 동상이몽의 허점을 스릴러로 잘 표현하였습니다.
장편 『고스트 신드롬』은 박진감 넘치는 사건 전개와 호러와 유머를 적절히 가미한 흥미로운 작품이었습니다. 스릴러가 잘 표현되고 문장력도 좋았지만 소재와 묘사에서 성 인지 감수성 면에서 아쉬움이 들며 재미까지 반감시키는 점이 안타까움을 남깁니다. 그 부분을 개선하면 훨씬 대중적이고 좋은 작품이 될 거 같습니다.
단편 「나비」는 이복자매의 혼인을 가로채 사랑과 행복을 이루려는 욕심이 불러온 인과응보를 그린 작품입니다. 문장이 유려하고 완성도가 높지만 인물들이 전형적이고 로맨스와 스릴러가 약했습니다.
단편 「(ŏ_ŏ ; )ノԅ(ᴗ͈ˬᴗ͈❁)」은 오르페우스 신화에 기반한 유려한 묘사가 빛나는 저승담입니다. 저승까지 아내를 찾으러 가는 남자의 행동을 뒷받침할 만한 로맨스가 없고 저승길에서의 여행동안에도 사랑 이야기보다 여행기의 성격이 강합니다. 전체적으로 로맨스보다 가족애 형재애가 더 두드러져 보였습니다. 밀도 높은 문장과 완성도에 비해 캐릭터의 개성이 부족하고 이야기가 전형적이어서 아쉬웠습니다.
사랑과 공포는 탄생과 소멸로 귀결되는 인간의 근원에 얽힌 뿌리 깊은 감정들입니다. 이 두 가지는 어떤 장르와 소재 조합에도 녹아들 수 있는 매혹적인 재료라는 것을 다양한 작품들을 만나며 새삼 깨달았습니다.
코로나19라는 세기적 전염병으로 모든 인간적 활동이 저하되고 삶의 범주가 위축된 상황입니다. 소설 읽기는 가장 좁은 활동 범주 안에서 가장 안전하고 적극적인 즐거움을 누릴 수 있는 행위 중 하나입니다. 부디 우리가 좁은 공간에 갇혀 서로 간의 교류와 애정을 잊지 않고, 새로운 것을 향한 탐구와 흥미를 잃지 않도록 스릴 넘치는 뜨거운 사랑 이야기들이 이 공모전을 필두로 무궁무진하게 솟아나기를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