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산(작가, 작품: 웹소설 작가를 위한 장르 가이드, 가스라기 외 다수)
장편 『괴물 장미』는 격렬하고 아름다운 뱀파이어 GL입니다. 남성은 가해자 혹은 먹이로서 철저히 타자화되어 있고 주연부터 조연까지 오롯한 여성들의 서사로 가득차 있습니다. 호불호가 갈릴 수도 있지만 이야기 자체의 완성도는 매우 뛰어납니다. 뱀파이어 장르가 워낙 많다보니 나이브하게 다뤄지는 경우도 많은데 괴물장미는 그렇지 않습니다. 응모작 중에 가장 ‘독자’의 입장에 서서 안심하고 읽을 수 있는 작품이었네요. GL이나 BL이 로맨스와는 다른 장르로 분류되고 있기에, 이 작품이 ‘로맨스’라는 장르에 해당하는가에 대한 고민이 있었으나, 이런 고민에도 불구하고 괴물장미에서 묘사한 ‘사랑’은 이성간의 사랑에 못지않으며, 뱀파이어 이성애 로맨스와 비교해도 그 감정적 경향과 깊이가 다르지 않다고 보기 때문에, 그리고 복합 장르는 경계의 외연을 확장하는 쪽이 더 바람직하다고 믿기 때문에 괴물장미가 로맨스릴러에 부합한다는데 손을 들겠습니다.
장편 『너는 누구니』는 청소년 연애물로서 긴장감과 생활감을 잘 녹여낸 이야기입니다. 치인트가 만들어낸 일상 속의 스릴러와 로맨스의 긴장감 공식을 성실히 따라가고 있습니다. 결말까지 성실해서 오히려 아쉬움이 남습니다. 시작하고, 풀어내는 힘에 비해 이야기를 맺는 힘이 약한데, 반전과 결말을 내는 기법에 대한 좀 더 치열한 고민이 필요해 보입니다.
「아무것도 아닌 누군가의 인어」는 동화 패러디를 깊게 끌고간 이야기입니다. 인물들의 고민 전개가 때로 너무 사변적으로 흘러간다는 점이 아쉬웠습니다만, 마지막 장면의 힘이 강하고 인상적이었습니다.
『체이스』는 소설빙의물의 무대 위에 스릴러의 요소를 가미시켰다는 점이 흥미로웠습니다. 자신의 창작물 속에 들어가 세계를 조작한 주인공이 느끼는 부담감에서 발생하는 긴장과 위기감이라는 부분을 짚어낸 점은 훌륭합니다. 하지만 로맨스의 동기는 충분히 드러나지 못했고, 떡밥들이 충분히 회수되지 못한 채 끝나, 미완성의 이야기로 보이는 점이 아쉽습니다.
「고양이는 야옹하고 운다」는 킬러 장르입니다. 킬러 장르는 워낙 클리셰가 많죠. 무수한 클리셰의 함정에도 불구하고 꽤나 스타일 좋은 킬러물의 분위기를 초중반까지 잘 유지했네요. 흑묘의 등장 전까지는 로맨스와 스릴러의 경계를 비교적 잘 유지했습니다. 하지만 흑묘가 등장하면서 갑자기 이야기가 너무 평범한 가족 드라마처럼 흘러버리는 아쉬움이 있네요.
「빨간 제비부리댕기」의 경우, 비유와 옛말 어휘의 향연으로 구성된 문장이 맛깔납니다. 하지만 정작 이야기의 본질은 흐릿해서 아쉬웠습니다.
「붉은 모란꽃이 피어날때」는 무대 장치와 소품에 가장 많은 공을 들인, 영화로 치면 미술상이나 소품상을 줘야할 것 같은 작품입니다. 그러나 정작 시나리오나, 배우들의 연기에 높은 점수를 주기는 힘듭니다. 미술에 많은 에너지가 투여되면서 이야기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에서는 주춤한 인상이에요. 원전에 대한 탐닉에 너무 매몰되었던 건 아닐까요.
「시한폭탄이 두 번 터지기 전에 너를 만나서」는 일상적인 언어로 재미있게 쓰인 이야기고 중반까지는 상당히 흥미진진했는데, 작가가 뿌린 떡밥이 전혀 회수되지 않아서 마지막에 실망스럽습니다.
「천년 공작」은 짧은 분량 안에 몽환적인 서사를 잘 녹여냈습니다만 그 분위기로만 시종 밀고 가다보니 작품 전체의 포커스가 흐릿하고 짧은 영상 클립 같은 느낌이 듭니다.
「토킹 어바웃」은 킬러 세계의 이야기인데 주변 세계와 인물들이 너무 낭만적이라는 느낌이 듭니다.
「쇼어 목장의 잔딧불이 무덤」은 고전 호러 소설 같은 이야기입니다. 분량을 더 줄여 컴팩트하게 쓰여졌다면 차라리 더 흥미로운 이야기가 됐을 것 같은데 초중반 이후로는 결말이 너무 뻔히 드러난 상태로 에움길을 한참 걷는다는 느낌이 많아서 긴장감이 떨어졌습니다.
「그녀가 이곳에 온 이유」는 끝부분이 허무한 괴담을 본 느낌입니다. 마지막에 남자환자의 정체가 무엇인지, 좀 더 연결이 나왔어야 하지 않을까요?
로맨스와 스릴러는 언뜻 대조적인 장르 같지만, 사실은 뿌리로 거슬러 올라가면 의외로 깊게 얽혀 있는 이야기라고 늘 생각해왔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비극의 목적, ‘공포와 연민’이 바로 두 장르의 코어라고 말이죠. 그리고 요즘 같은 세상에 타자를 사랑한다는 시도 자체가 위험 요소로 가득한 어드벤처 코스를 달리는 일과 비슷하죠. 그렇지만 막상 그걸 이야기로 한데 녹여 꾸며낸다는 것이 쉽진 않은 일입니다. 그 도전에 뛰어든 많은 응모작들이 장렬하게 실패하기도 했고, 용두사미가 되기도 했지만 놀라운 성취를 보이며 결승선을 통과하기도 해서 신선했습니다. 앞으로도 이런 공모와 도전이 흥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