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 드래곤 문학상처럼 상금을 내걸고 작품들을 모집한 문학상은, 예기치 못한 사정이 나오지 않는 한, 당선작을 내는 것이 옳다. 그래서 심사 위원들은 응모작들에서 좋은 점들을 찾아보려고 무던히 애썼다. 아쉽게도, 우리는 당선에 필요한 최저 수준에 이른 작품이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대신, 결점들이 비교적 적고, 추고 과정을 거치면 상당히 나아질 가능성이 있는 <달의 노래>와 <열번째 세계 이야기>를 가작으로 뽑았다.
응모작들은 몇 가지 특질들을 공유하는데, 그것들은 우리 사회에서 나온 다른 환상소설(fantasy fiction) 작품들에서도 발견된다. 안타깝게도, 그것들은 거의 모두 부정적 특질들이다. 따라서 그런 단점들을 뽑아내서 살피는 것은 젊은 환상소설 작가들에게 도움이 될 것 같다.
근본적 문제는 이번에 응모한 작가들에겐 독자들에게 들려줄 만한 이야기가 없었다는 사실이다. 작가가 뚜렷한 이야기를 생각해낸 뒤에야, 소설은 모습을 제대로 갖출 수 있고, 독자들은 그것을 소설로 받아들일 수 있다. 환상소설을 쓰려는 작가에게 뚜렷한 이야기가 없으면, 마법사, 난장이, 용, 트롤과 같은 장르 환상소설 (genre fantasy)의 도구들을 아무리 많이 동원하더라도, 그의 이야기가 쭉정이라는 사실을 독자들로부터 감출 수 없다.
그렇게 이야기거리가 적은 까닭들 가운데 하나는 젊은 환상소설 작가들이 장르 환상소설에만 매달린다는 점이다. 우리 사회에서 환상소설은 실제로는 장르 환상소설을 뜻한다. 그 이름이 가리키는 것처럼, 장르 환상소설은 독자들이 이내 환상소설로 인식하는 전통적 환상소설로, 흔히 이 세상이 아닌 이차 세계(secondary world)를 무대로 삼아, 환상소설의 전통적 배역들인 감춰진 왕, 미운 오리 새끼, 마법사, 난장이, 트롤, 엘프, 용 따위 존재들이 등장한다. ‘장르’란 말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장르 환상소설은 너무 많이 이용된 환상소설의 영역이며, 자연히, 수준 낮은 모방 작품들이 넘친다. 존 로널드 루얼 톨킨의 <반지의 제왕>이 나온 뒤로는 그 작품의 아류들이, 그리고 이제는 아류의 아류들이, 특히 많이 나왔다.
그래서 지금 새롭게 느껴지는 장르 환상소설 작품을 쓰기는 언뜻 보기보다 훨씬 어렵다.
그러나 실제로는 환상소설은 매우 넓고 다양한 분야여서, 장르 환상소설말고도 여러 하위 장르들을 안고 있다. 따라서 그런 분야들을 자신의 재능을 펼칠 무대로 삼는 것은 젊은 환상소설 작가들에겐 좋은 전략이다. 예컨대, 탐정소설에 흥미를 느끼거나 재능이 있는 작가들은 ‘탐정 환상소설 (detective fantasy)’을 시도해 보는 것도 좋다. 마법을 범죄의 수사에 이용하는 마법사를 주인공으로 삼은 랜덜 개리트의 <다시 경(卿)> 연작은 이 분야의 전범으로 꼽히는 작품인데, 우리 젊은 환상소설 작가들에게 환상소설을 쓰는 일에 관해서 많은 것들을 가르쳐줄 수 있다.
논리적 이야기를 좋아하는 작가들에겐 ‘과학 환상소설(science fantasy)’이 너른 땅과 비옥한 흙을 제공해줄 것이다. 과학 환상소설은 환상소설의 도구들을 과학소설(science fiction)의 방식들과 관행들에 따라 다루는 환상소설의 하위 장르로, 과학 환상소설 작품들에선 마법은 마법사가 마음대로 쓰는 기술이 아니라 나름의 엄격한 법칙을 따르는 것으로 그려진다. 많은 장르 환상소설 작품들에서 마법은 마법사들이 자의적으로 그리고 아주 쉽게 휘두를 수 있는 것으로 그려진다.
그래서 마법이 진부한 것으로 느껴지고 환상소설에 내재하는 비현실성을 더욱 짙게 만든다. 마법이 과학이나 기술처럼 일정한 법칙들을 따르는 것으로 상정되면, 그런 사정은 작가에겐 지켜야 할 규율로 작용해서 보다 진지한 글쓰기를 가능하게 하고, 작품엔 현실성을 준다.
생물학 지식을 갖춘 작가들에겐 ‘동물 환상소설(animal fantasy)’이 새로운 환경을 제공할 것이다. 동물들의 의인화에 의존하는 ‘짐승 우화(beast fable)’와는 달리, 동물들이 실제로 지닌 특질들을 그대로 작품에 반영하는 동물 환상소설은 우리 문단에선 아직 미개척 분야로 남아 있으므로, 문학사에 이름을 남기려는 야심을 가진 젊은 작가들은 한번 도전해 볼 만한 분야다. 이 분야의 고전으로 꼽히는 작품은 토끼들의 사회를 그린 리처드 애덤스의 <워터십 언덕(Watership Down)>으로, 동물 환상소설을 쓰려는 작가들은 꼭 읽어야 될 작품이다. 워낙 인기가 높았던 작품인지라, 책을 비교적 쉽게 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사회 비평에 관심을 가진 작가들에겐 ‘수정주의 환상소설(revisionist fantasy)’이 적절한 매체가 될 것이다. 수정주의 환상소설은 이미 확립된 대본들을 새로운 관점에서 다시 해석하는 장르인데, 서양에선 1960년대에 활발해진 ‘여성 운동(feminist movement)’으로부터 큰 운동량을 얻었다. <미녀와 야수>를 새로 풀어 쓴 로빈 머킨리의 <미녀: 미녀와 야수의 이야기를 다시 이야기하기 (Beauty: The Retelling of the Story of Beauty and Beast)>와 <잠자는 미녀>를 새롭게 해석한 제인 욜렌의 <둘장미 (Briar Rose)>는 이 분야의 대표작들이다. 우리 나라에선 최인훈이 <놀부뎐>.및 <춘향뎐>과 같은 단편들에서 수정주의 환상소설을 시도했다. 이들 작품들을 쓸 때, 최인훈이 자신이 수정주의 환상소설을 쓰고 있다는 사실을 의식한 것 같지는 않다. 이 사실은 여러 모로 흥미롭고, 환상소설의 문학적 가능성에 대해 시사해주는 바가 크다.
우리 작가들의 환상소설 작품들에서 자주 나타나는 두번째 문제는 이야기가 환상소설의 틀 속에서 전개되어야 할 필연성을 지니지 못했다는 점이다. 바람직한 상태는, 자신이 하려는 이야기가 환상소설의 틀 속에서만 제대로 표현될 수 있다고 판단해서, 작가가 환상소설을 쓰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작가로서는 주류소설(mainstream fiction)인 모사소설(mimetic fiction)의 틀 속에서 이야기를 펼치는 편이 여러 모로 낫다. 작가로서의 기본적 소양과 기술을 갖추지 못한 젊은이들이 환상소설에 선뜻 손을 대는 것을 보면, 환상소설은 쓰기 쉽다는 생각이 널리 퍼진 듯하다. 그러나 사정은 전혀 다르다.
이 세상과는 다른 세상을 생각해내서 그것을 독자들이 이내 알아보고 받아들일 수 있는 모습으로 그려내는 일은 실재하는 세상을 충실하게 그리는 일보다 당연히 어렵다. 마법사나 용과 같은 장르 환상소설의 도구들을 진열하는 것으로 자신의 작품이 일단 환상소설의 모습을 갖췄다고 생각하는 것보다 어리석은 일은 드물다.
세번째 문제는 대부분의 환상소설 작가들이 환상소설을 쓸 때 부딪치는 기술적 문제들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하거나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실존하는 세상에서 일어나는 현실적 이야기가 아니라 존재하지 않는 세상에서 일어나는 비현실적 이야기를 들려주므로, 환상소설 작가들은 모사소설 작가들이 부딪치지 않는 몇 가지 어려운 기술적 문제들과 힘든 씨름을 해야 한다. 그런 문제들 가운데 가장 어려운 것은 독자들에게 환상소설의 무대가 된 세상에 대한 정보를 적절하게 제공하는 일이다.
존재하지 않는 세상에서 일어나는 비현실적 이야기를 독자들이 알아들으려면, 당연히 그 세상과 이야기의 주제에 관해서 많은 정보가 필요하다. 그리고 그렇게 많은 정보는 필연적으로 이야기의 전개를 방해한다. 충분한 정보를 독자들에게 제공하면서도 이야기를 깔끔하게 전개하는 일은 모든 환상소설 작가들이 해결해야 하는 어려운 문제다. 아쉽게도, 이번에 응모한 작가들 가운데 이 문제에 대해 깊이 생각한 이는 없었다. <달의 노래>의 경우, 무대가 된 세상에 관한 기본적 정보들은 ‘프롤로그’라는 형식으로 작품 맨 앞에 나와 있는데, 무려 일곱 장이나 된다. 이야기를 듣기 전에 일곱 장 짜리 설명문을 읽으라고 독자들에게 요구하는 것은 분명히 현명한 방책은 아니다.
네번째 문제는 작가들이 만화나 전자놀이(electronic games)를 본받는 것이다. 그런 관행에도 물론 장점들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눈에 뜨이는 것은 심각한 결점들뿐이다. 당장 문제가 되는 것은 소설 작품인데도 묘사가, 배경이든 인물이든, 거의 없다는 점이다. 만화나 전자놀이엔 물론 묘사가 없다, 글과 함께 실린 그림이 그 일을 하므로. 환상소설 작가가 만화나 전자놀이에 나오는 간략한 설명들과 대화들이 소설을 이루는 데도 충분하다고 여긴다면, 그 결과는 메마르고 앙상한 작품일 수밖에 없다.
만화나 전자놀이를 본받는 관행에서 나온 또 하나 부정적 영향은 대화가 자연스럽지 못하다는 점이다. 그런 작품들의 대화들은 거의 모두 어색하거나 인물들의 성격에 맞지 않고, 적잖은 것들이 현실에선 나올 수 없거나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다. 특히, 웃음을 으레 “푸하하하하하하”라고 표현하는 식의 관행들은 작품 전체의 품격을 불필요하게 떨어뜨린다.
사람마다 웃는 모습이 다르고, 같은 사람도 경우마다 다른데, 어째서 환상소설 작품들에선 나오는 인물들이, 나이도 성격도 직업도 가리지 않고, 모두 그렇게 과장된 웃음만을 터뜨리는가? 밝은 미소도, 씁쓰레한 웃음도, 입가나 눈에만 웃음기가 도는 모습도, 고개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면서 소리 없이 웃는 모습도 보이지 않는가? 이런 메마른 모습은 만화에선 그런대로 재미있게 느껴지는 대화들이, 소설 속에 그대로 도입되면, 과장되거나 천박하게 느껴진다는 사정이 전혀 고려되지 않아서 나온 현상문이다. (이런 사정은 가사와 시 사이의 관계와 아주 비슷하다. 음악에 맞추어 불려지므로, 가사는 시와는 전혀 다른 논리를 따른다. 그래서 음악 없이 가사만을 읽으면, 우리는 애창곡들의 가사까지도 흔히 지나치게 상투적이고 과장되고 반복적이라는 점을 깨닫게 된다. 반면에, 좋은 시가 그대로 좋은 가사가 되는 경우도 드물다.)
그러면 그런 결점들은 어떻게 피하거나 줄일 수 있을까? 그 일은 아마도 존 로널드 루얼 톨킨이 환상소설 분야에 대해 지닌 너무 큰 영향력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에서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 1950년대에 <반지의 제왕>이 나온 뒤로, 장르 환상소설 분야는 톨킨의 압도적 영향 아래 움직였다. 그의 영향을, 그의 작품들로부터 직접 받았든 그의 아류 작가들을 통해 간접적으로 받았든, 다소간 받지 않은 환상소설 작가는 드물다.
그의 작품들은 그만큼 장르 환상소설 분야를 혁명적으로 바꾸었고 큰 활력을 불어 넣었다. 그러나 그런 사정에 따른 부정적 영향도 작지 않았다. 반 세기 동안 그의 아류 작가들이 수많은 모방적 작품들을 쏟아낸 터라, 이제 장르 환상소설은 지력이 쇠퇴한 농토처럼 되었고, 자연히, 좋은 장르 환상소설 작품들을 쓰기는 무척 어렵다. 폄하하는 뜻을 지닌 ‘장르’라는 말이 붙었다는 사정이 점을 은근히 가리킨다.
사정을 악화시키는 것은 톨킨이 뚜렷한 문학적 목적을 가지고 충분한 지적 자산을 갖춘 뒤에 튼튼한 이론의 인도를 받아 작품들을 썼다는 사실을 우리 작가들이 깨닫지 못한 듯하다는 점이다. 그는 영국이 북유럽 신화와 같은 웅장한 신화를 갖지 못했음을 아쉬워하고서 그것을 스스로 지어내기로 했다. 그리고 ‘아다’라고 불리는 세계에 속하는 ‘중간 대륙(Middle-Earth)’를 구상하고 그 세상의 긴 역사를 꾸며냈다. <반지의 제왕>은 그런 길고 웅장한 역사의 한 부분에 자리잡은 이야기다. 그는 원래 고대 영어를 연구한 언어학자로, 고대어에 관한 그의 깊은 지식은 그가 소설을 쓰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그리고 그는 뛰어난 문학 이론가여서 자신이 바라는 작품이 어떤 것이며 그것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 잘 알았다. 환상소설에 관한 이론에서 핵심적 개념인 ‘이차 세계’를 그가 지어냈다는 사실이 잘 보여주는 것처럼, 그는 환상소설에 관한 이론의 발전에 크게 공헌했다. 그렇게 뚜렷한 목적, 튼튼한 이론적 바탕, 깔끔한 전략, 그리고 풍부한 지적 자산을 갖춘 작가가 오랫동안 다듬은 뒤에야, <반지의 제왕>가 같은 걸작이 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모든 젊은 환상소설 작가들에게 톨킨처럼 준비를 철저히 한 뒤에 작품을 시작하라고 얘기할 수는 없다. 그래도 별다른 준비 없이 톨킨의 아류 작가들의 작품들을 몇 편 읽은 뒤, 나도 한번 써보겠다고 나선다면, 그에게서 좋은 환상소설을 기대하기는 어려울 터이다.
그러면 젊은 환상소설 작가들이 위에서 언급된 덫들을 피하고 필요한 기술들을 얻을 수 있는 길은 무엇인가? 한 가지 실제적 방도는 과학소설을 주로 쓴 뒤에 환상소설에 손을 댄 작가들을 읽고 그들에게서 배우는 것이다. 과학소설은 환상소설과 비슷하면서도 다른 장르다. 두 장르 모두 비현실적 세계를 다룬다. 그래서 과학소설 작가들은 환상소설 작가들이 부딪치는 여러 가지 기술적 문제들에 부딪친다. 위에서 언급된 ‘필요한 정보들을 독자들에게 제공하는 일의 어려움’도 과학소설에서 훨씬 심각하다. 그러나 과학소설이 들려주는 이야기들은 자연적이고, 환상소설이 들려주는 이야기들은 초자연적이어서, 둘은 본질적으로 다르고 이야기의 성격과 전개 방식도 크게 다르다.
과학소설이 자연적 현상을 다루므로, 과학소설은 작가들에게 환상소설보다 훨씬 엄격한 틀을 부여하고, 대체로 과학소설 작품들은 환상소설 작품들보다 더 튼튼한 바탕 위에 더 논리적으로 구성되며 문학적 성취도도 훨씬 높다. 놀랍지 않게도, 과학소설 분야에서 업적을 쌓고 나서 뒤에 환상소설을 쓰는 작가들은 자신들의 환상소설 작품들에 과학소설의 특질들을 도입해서 비교적 잘 짜여지고 논리적 구조를 지닌 작품들을 쓴다. 프리츠 라이버, 캐서린 루실 무어, 리 브래키트, 잭 밴스, 레이 브랫버리, 폴 앤더슨, 랜덜 개리트, 어슐러 르 귄, 마리온 짐머 브래들리, 진 울프, 그리고 로저 즐래즈니는 그렇게 과학소설 분야에서 업적을 쌓고 환상소설에 손을 댄 작가들로, 그들의 작품들을 읽는 것은 우리 젊은 환상소설 작가들에게 좋은 공부가 될 것이다.
비록 당선작을 찾지는 못했지만, 응모작들이 모두 긴 작품들이어서, 우리는 상당히 흐뭇했다. 문학적 성취도를 떠나서, 긴 작품을 쓴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며, 작가가 글쓰기에서 최소한의 열정과 기술을 지녔음을 가리킨다. 모든 작가들이 잘 다듬어진 작품을 들고 세상에 나오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젊어서 별다른 재능을 보이지 않았지만 뒤에 훌륭한 작품들을 쓴 작가들이 드물지 않다. 이내 떠오르는 예를 들면, 조지 오웰은 이튼에 다닐 때 그를 지도한 선생으로부터 글쓰기에 재능이 없다는 평을 들었지만, 꾸준히 노력해서,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정치 소설들을 썼다. 특히, 그의 짐승 우화 <동물 농장>은 환상소설이 지닌 사회 비평적 가능성을 한껏 실현했고 환상소설의 품격을 크게 높였다. 젊은 환상소설 작가들의 정진을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