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웅 프쉬케의 개연성 찾기 모험

대상작품: <프쉬케와 에로스> 외 1개 작품
큐레이터: 노르바, 2시간 전, 조회 17

숨쉬듯 자기 작품 홍보하는 게 이제 슬슬 제 캐릭터가 되어 가는 거 같은데 그냥 받아들이십셔(…)

 

프쉬케와 에로스의 신화 이야기는 모두가 잘 아는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잘못 읽으면 ‘남편 잘 만나서 팔자 편 이야기’로 보일 수 있습니다.
물론 상징과 어원적으로는 에로스가 ‘감정적’ 사랑을 뜻하고, 프쉬케가 ‘영혼’, ‘호기심’, ‘정신’ 등을 이성에 가까운 것들을 뜻하는 단어로 쓰이기도 하고, 그에 대한 은유(이성/의심이 존재하는 곳에 감정적 사랑이 머무를 수 없다 등등)로 사용되는 신화기도 합니다마는.

그러나 다시 돌아보면, 프쉬케는 그리스-로마 신화를 통틀어 가장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인물입니다.
프쉬케는 100% 인간입니다. 그것도 고대 그리스 사회에서 가장 취약한 위치에 놓였던 존재, 여성이죠. 신의 피도, 반신의 힘도, 특별한 무기도 없었습니다. 오직 자신의 의지와 판단과 두 손으로 신이 부여한 불가능에 가까운 (악의에 찬)과업을 하나하나 완수하고, 마침내 신들의 만장일치 승인 아래 신격을 얻게 됩니다. 그러므로 프쉬케는 영웅입니다. 전통적 의미의 근력이나 전투력이 아니라,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의지와 지성으로 불가능을 가능으로 전환한 서사적 영웅.

 

여기 두 프쉬케가 있습니다. 둘 다 프쉬케에 대해 재해석을 했고, 둘 다 원전 신화에 개연성을 부여하고자 했습니다.

…사실 「프쉬케와 에로스」를 보고 「(극) TJ 성향 프쉬케의 모험」을 쓰게 되었다는 얘기를 하려고 합니다. ㅎㅎㅎㅎㅎㅎ


먼저 「프쉬케와 에로스」입니다. 이 작품은 신화를 바깥에서 씁니다. 우리가 아는 그 프쉬케 신화가 애초에 어떻게 만들어졌는가를 추적하는 메타픽션이죠.

화자는 프쉬케 본인이 아닙니다. 펜을 꺾은 지 10년 된 현직 석공, 아폴로니우스입니다.
그런데 조카 프쉬케가 결혼 조건으로 삼촌에게 이야기를 요구합니다.

“저와 에로스 님이 맺어지는 이야기요. 제가 만족할 만한, 재미있는 걸로요.”

완두콩을 씹다 반쯤 입가로 흘러내린 삼촌. ㅋㅋㅋㅋ 삼촌도 결혼 안(못)한 판국에 가족들은 조카인 프쉬케에게 결혼 압박을 넣고 있습니다. 이것으로 이야기는 시작됩니다.

 

「(극) TJ 성향 프쉬케의 모험」입니다. 이 작품은 신화 안쪽에서 썼습니다. 화자는 프쉬케 본인입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1인칭 프쉬케의 시선으로, 신화의 사건들을 그녀의 눈높이에서 건조하고 분석적으로 서술해봤습니다. ‘프쉬케’는 이성이자 호기심이니까요.

아프로디테 신전에 가야 할 사람들이 나를 보러 온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처음엔 그냥 소문이려니 했다. 소문이란 원래 과장이 섞이는 법이니까.

이 프쉬케의 말투는 딱 이렇습니다. 정확히는 ISTJ입니다. 눈에 띄기 싫어하고(I) 행동이 앞서고(S) 이성과 근거지향적이고(T) 계획과 원칙주의적입니다(J).


다시 「프쉬케와 에로스」입니다. 석공 아폴로니우스는 10년 만에 펜을 잡습니다. 뇌에 굳은살이 박인 채로. 처음 꺼낸 초고 수준이 이렇습니다.

드르륵—. 열린 문 너머로 들어오는 사람은 에로스였다. 그는 일진 짱이었다. “8반 이쁜이가 너냐?” 에로스가 카리스마 있게 말했다.

그는 밀랍판을 뒤집어엎습니다. 그 다음 초고는 아프로디테가 흰 봉투를 던지며 “우리 아들이랑 헤어져주세요”를 외칩니다. 그것도 뒤집어엎습니다(…). 막장드라마 좋아하셨나봐
이야기를 짓는다는 게 이렇게 처참한 일이라는 걸, 이 장면에서 뼈저리게 공감하게 됩니다. 만약 독자가 소설가라면 더더욱.

「TJ 프쉬케」는 공주입니다. 미모로 소문이 자자하지만 혼사는 이루어지지 않는. 하지만 정작 본인의 반응은 이렇습니다.

괜찮다. 어차피 나도 딱히 관심없다. 철학서를 읽고 산책을 좀 하고 베를 짜면서 손을 움직이고 나비 관찰을 하는 정도로 인생은 흥미진진하니까.

성문 앞에 꽃이 쌓이기 시작하자 그녀의 첫 반응이 이겁니다. ‘이건 좀 곤란한데.’
신이 인간과 비교당하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는 건 철학서에서 읽어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머니에게 꽃을 치워달라고 부탁하지만 무시당하고, 실제로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습니다.


「프쉬케와 에로스」의 아폴로니우스는 이야기의 재료를 일상 속에서 건져올립니다.
공사판 동료가 석회가루와 자갈을 잘못 섞자 체로 걸러내는 방법을 알려줍니다. 머릿속에서 무언가가 찰칵 맞물립니다.
곡물 분류 과업의 탄생입니다. 연회에 갔다가 강제로 술을 마시고 만취한 채 밤새 이야기를 씁니다.

다음 날 조카가 해장을 도와주러 오는데 삼촌이 말합니다. “사람이 어떻게 하고 싶은 것만 하고 살 수 있겠니. 살다 보면 하고 싶은 일을 하지 못하고, 하기 싫은 일을 해야 할 때도 있기 마련이야.” 이 말은 나중에 프쉬케에게 그대로 돌아옵니다. “하기 싫은 일을 해야 할 때도 있는 거잖아요?”

 

「TJ 프쉬케」에게 신탁이 내려옵니다. 괴물과 결혼하게 될 거라고. 부모님은 펑펑 울었지만 본인의 반응은 이렇습니다. “별 수 있나. 신탁이 그렇다는 데 그냥 그런 거지.” 결혼 행렬이 장례식 분위기로 꾸려지자 혼자 속으로 중얼댑니다. ‘명절에도 안 오던 인간들이.’

그리고 산으로 올라가는 길, 행렬 맨 앞에 서서 걸으면서 혼자 머릿속으로 상황을 정리합니다. 일어난 일, 원인, 현재 상황, 앞으로 일어날 일. 그런데 네 번째 항목 결론이 이렇습니다. ‘모른다.’ 그 순간 발이 돌부리에 걸려 휘청합니다. ‘…일단 넘어지지 않는 것.’


「프쉬케와 에로스」에서 이야기는 조금씩 완성되어 갑니다. 아폴로니우스는 주변에서 재료를 줍습니다. 시어머니의 악의는 며느리를 구박하는 어머니에서, 질투하는 언니들은 프쉬케의 결혼을 재촉하는 가족들에서, 절벽에서 떨어지는 장면은 어린 프쉬케가 화살에 맞던 날에서 왔습니다.

그러나 딱 한 가지, 프쉬케가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것, 맨발로 걸어가는 것. 그것만은 아무 데서도 가져오지 않았다고 소설은 말합니다. 그것은 아폴로니우스가 아는 프쉬케 그 자체였으니까요.

 

「TJ 프쉬케」는 궁전에 도착합니다. 바람에 실려서요. 첫 반응이 이렇습니다. “이런 골짜기에 어떻게 이렇게 큰 궁전을 세운 걸까. 얼마나 많은 노예를 부린 걸까.” 황금 기둥을 꾹 눌러봅니다. ‘…도금이구나.’ 다행이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고 합니다. 최소한 이 궁전을 세운 사람이 바보는 아니라는 뜻이니까. 여기까지는 좋았습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이 프쉬케는 고백합니다. 너무 편하다고. 너무나, 너무나 편하다고. ‘이러다가 굴러다니는 돼지가 되어서 욕창 생기겠네.’

그리고 에로스가 떠난 다음날, 프쉬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생각이 떠오르지 않을 땐 일단 몸을 움직여야 한다. 그러다 보면 어떻게든 궁리가 떠오르는 법이다.

판이 앉아서 울고만 있을거냐, 아니면 뭔가 할거냐 라는 질문에도 이렇게 답합니다. “…뭔가 해야죠.” 영웅적인 결의 같은 건 없었습니다. 그냥, 주저앉아 있으면 정말로 끝날 것 같아서 움직일 뿐입니다.


밤마다 목소리만 들을 수 있는 남편이 옵니다. TJ 프쉬케는 관찰 기록을 씁니다. 목소리: 젊은 편. 조용조용한 편. 성격: 급하지 않음. 촉감: 비늘 없음. 갑각 없음. 결론: 아직 모름.

언니들이 옵니다. 남편 얼굴을 보여주지 않는다며 괴물일 수 있다고 말합니다. TJ 프쉬케가 고개를 끄덕입니다. “오… 웬일로 언니가 합리적인 가설을.” 그래서 등잔을 켰습니다. 가설 검증을 위해서. 그리고 규정은 규정이지만 거기에 납득할만한 이유가 없었기에. 그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거기 있던 건 황금빛 고수머리, 장밋빛 뺨, 흰 날개를 가진 에로스였습니다.
‘우와.’ 그게 이 프쉬케의 최고의 감탄이었습니다.

 

「프쉬케와 에로스」의 이야기 안에서도 똑같은 일이 일어납니다. 아폴로니우스가 쓴 소설 속 프쉬케가 등잔을 켜고, 화상 입은 에로스가 떠납니다.

그런데 이 소설이 흥미로운 건, 이 사건이 탄생한 경위를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아폴로니우스는 꿈에서 보았습니다. 얼굴도 모르는 남편과 사는 천국을, 그것을 깨뜨리려는 외부의 힘을. 그리고 상상 속 프쉬케의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상대가 누군지도 모르는데 사랑할 수 있나요? 그건 남편이 아니라 화려한 생활을 사랑하는 거예요.” 등잔 아래 에로스를 확인하러 간 것은 신화 속 프쉬케의 선택이 아닙니다. 조카 프쉬케가 삼촌에게 이미 그 선택을 가르쳐 준 것입니다.


과업이 시작됩니다.

「프쉬케와 에로스」 안에서 아폴로니우스는 이미 답을 알고 있습니다. 공사판에서, 연회에서, 꿈에서 건져온 재료들이 과업 하나하나로 조립됩니다. 곡물 분류, 황금 양털, 저승의 물, 페르세포네의 상자. 곡물을 분류할 때 무작정 주워 담지 않습니다. 한 가지씩 특성을 파악하고, 도구를 찾고, 순서를 정합니다. 독자는 이 신화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보면서 동시에 신화 자체를 읽습니다. 두 겹의 독서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TJ 프쉬케」는 그 과업들을 직접 통과합니다. 이 프쉬케도 생각하고 궁리합니다. 물론 개미들이 도와주긴 했지만 프쉬케는 개미들이 오기 전에 이미 체계를 세우고 있습니다. 밀이 몰린 구석을 찾았고, 거기서부터 주워담기 시작합니다. 황금 양털은 낮에 양들이 사납다는 조언을 ‘원주민’ 갈대밭에서 얻고 저녁까지 기다렸다가 다가갑니다. 현장 조사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고 씁니다. 저승 앞 절벽에서는 혼자 계산합니다. 오르페우스처럼 악기를 연주할 수도, 헤라클레스처럼 힘이 막강하지도 않습니다. 아무리 궁리해봐도 최대한 빠르게 죽는 게 저승으로 가는 빠른 길이었습니다.
결론: ‘…모르겠다, 일단 죽어보고 나서 생각하기로 했다.’


그리고 페르세포네의 상자입니다.

이 장면은 원전에서도, 두 소설 모두에서도 가장 인간적인 순간입니다.

「프쉬케와 에로스」 안에서 상자가 열리는 건 두 줄입니다. 긴장이 풀려서였다고. 잠의 씨앗이 쏟아져 나왔다고. 그게 전부입니다.

 

「TJ 프쉬케」는 다릅니다. 저승 입구에서 지상의 빛이 보이기 시작하던 순간, 발이 멈춥니다. ‘아름다움이라는 게 어떻게 생겼길래 상자에 넣을 수 있지.’ 이상한 생각이라는 걸 압니다. 그런데 손이 움직이지 않습니다. 씨앗도 분류했고, 양털도 걷어왔고, 죽은 자의 손도 잡지 않았고, 페르세포네의 음식도 먹지 않았는데. 이건 그냥 궁금한 거다. 열어보고 바로 닫으면 되는 거 아닌가. ‘잠깐이면…’ 결국 손가락이 뚜껑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쓰러지면서 마지막으로 이렇게 씁니다.

죽일 놈의 호기심이…… 또……..


두 소설 모두 결국 같은 결말에 닿습니다. 에로스가 돌아오고, 신들이 설득되고, 프쉬케는 암브로시아를 마시고 신이 됩니다.

「프쉬케와 에로스」에서 아폴로니우스의 동료가 말합니다.

“다 좋은데, 프쉬케가 너무 강인해. 남자 영웅처럼. 이 이야기가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면 그런 부분이 바뀔 수도 있어.”

아폴로니우스가 대답합니다.

“바뀔 수도 있지. 그들에게는 신과 결혼하려 드는 조카가 없을 테니.”

 

「TJ 프쉬케」에서 신이 된 그녀는 올림포스 결혼식 자리에서도 호기심과 관찰력으로 주변을 살핍니다.

‘저분이 아레스인가. 생각보다 표정이 별로 없으시네.’

그리고 마지막 문장이 이렇습니다.

사랑은 내가 포기하지 않은 이유였고, 포기하지 않은 건 내가 한 일이었다. 그 둘을 구분하지 않기로 했다.


 

「프쉬케와 에로스」는 신화 바깥에서 신화를 사랑하는 작가의 이야기입니다. 「TJ 성향 프쉬케의 모험」은 신화 안에서 신화를 살아가는 이야기입니다.

전자가 이 신화가 어떻게 만들어졌는가를 묻는다면, 후자는 이 신화의 주인공이 왜 포기하지 않았는가를 묻습니다. 둘 다 짧습니다. 그리고 둘 다, 프쉬케를 ‘남편 잘 만난 여자’로만 기억하고 있던 독자에게 꽤 당혹스러운 무언가를 남길 겁니다. 좋은 쪽으로요(아마도).

 

그리고 「프쉬케와 에로스」의 맨 마지막 문장을 빌려서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프쉬케가 실존하든 실존하지 않든, 이 신화가 훌륭한 이야기이고 프쉬케가 100%인간으로서 신이 된, 여성 영웅이라는 것은 변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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