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기 누구시오?”
“프리랜서. 지금은 일 하는 중이고.”
“푸리 뭐? 무슨 일을 하러 왔는데 그러오?”
“거기서 잘라서 물으면 랜서라고 답할 수밖에 없는데, 그러면 꼭 창기병인 것처럼 들리잖아. 그런 직업을 갖기엔 내가 아직 어린데. 어쨌든 지금 중요한 건 내가 누구인가가 아니라 노인네가 누구인가야.”
“나따위가 무엇인들 뭐 중요하겠소. 친히 여기까지 찾아오신 손님의 용건이 더 중하지 않겠나 싶소만.”
“다른 사람이야 몰라도, 나한테는 중요한데? 뭐, 말하기 싫으면 됐고. 아, 좀 들어가도 되지?”
“들어오는 것이야 괜찮지만, 도대체 무슨 일 때문에 그러시오?”
“됐고. 이 문자 메시지에 있는 인적사항이 본인 맞나 확인 좀 해봐. 여길 보라고! 아까부터 왜 눈이 아니라 귀를 내 쪽으로 향하는 거지? 거슬리게스리.”
“어디를 보란 말이오? 유감스럽게도 난 앞을 보지 못하오. 꼭 확인해야 하는 일이라면 읽어주시구려.”
“뭐 일단 주소는 맞게 찾아온 것 같은데, 이런 판잣집 쪽방 노인네가 타겟인 경우는 처음이라서 아무래도 조심스럽네. 이름이 천덕구 맞아? 보나마나 어릴 때 별명은 천덕꾸러기였겠네. 30년 전에 새벽기도원 경비로 일했지? 나이는 83세. 한국 나이인지 만 나이인지는 안 적혀 있네. 얼추 그 정도로 보이는데 맞지?”
“내 나이가 그리 보이오? 그럼 그렇다고 합시다. 앞이 보이는 이가 그리 보아준 것이 중요하지 실제 연식이 뭐 그리 중요하겠소. 그나저나 이 나이 먹도록 나에 대해 이리도 관심있게 알아봐 준 손님은 한 손으로도 충분히 꼽을 수 있을 것 같구려. 당신 정말 뭐하는 사람이오? 그 정도는 알려줘야 마주 앉아 차라도 한 잔 나눌 수 있지 않겠소.”
“아니, 뭐? 나이가 이게 아냐? 이름은 맞고? 그렇게 대충 넘어갈 일이 아니라고. 정확하게 말해 보란 말야. 근데 내올 차가 있기는 해?”
“녹차가 있다오. 티백으로 우려내는 대수롭지 않은 것이긴 하지만, 나는 좋아하지요. 마시다 보면 가끔 옛 기억이 떠오르기도 하고 말이오.”
“관둬. 보지도 못하는 주제에 뜨거운 걸 잘도 다루겠군. 내 질문에나 다시 정확히 답해. 나이는 많아서 헷갈린다 치고, 당신이 새벽기도원 경비였던 천덕구가 맞아?”
“허허, 무슨 말씀을. 이 늙은이가 차를 얼마나 자주 마시는데요. 잠시 계셔 보시오. 전기주전자라 생각보다 쉽고 안전하다오. 그런데 아가씨 말소리 사이로 스르릉 하고 칼 뽑는 소리가 얼핏 들린 것 같소만. 혹시 주민행복센터에서 보낸 요리사요? 냉장고는 마음껏 열어 보셔도 됩니다.”
“하? 내가 칼질을 잘하기는 하는데…냉장고에 딱히 썰만한 것도 없구만, 뭘 맘껏 보라는 거야? 아니, 것보다. 질문에 대답 좀 하라고, 새벽기도원 경비 맞냐니까?”
“허허, 예전에 그곳에서 경비를 한 적이 있었지요. 이젠 다 지나간 일이오.”
“아니 잠깐. 앞이 안 보인다더니 무슨 경비야? 사실은 보이는 거야? 내 얼굴을 못 봤으니까 그냥 가달라고 말하려는 거면 그만 둬. 나는 의뢰 받은 일은 책임지고 마무리하는 성격이니까. 아니면 거기서 근무 중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 그래서 시력을 잃었고? 절대로 봐선 안 될 걸 보기라도 한 건가?”
“허허허,절대 아니라오.내가 그 곳에서 일하면서 본 것은 이웃 간의 정과 아이들의 행복한 미소였소.오히려 평생 눈에 담아두고 싶었던,그런 아름답고 평화로운 곳 말이오.눈이 멀어버린 것은 노환의 탓일 뿐이오.자연스러운 일인게지.”
“거 참. 이 할배 말하는 것만 들으면 무슨 현자네 현자. 아무튼 나 여기 일하러 온 거거든? 그러니까 댁이 30년 전 새벽기도원 경비 하던 천덕구 맞… 저기, 잠깐만 할배. 전기주전자 코드를 그렇게 꽂으면 어쩌자는 거야?”
“늘 하던 대로 하는 거요. 나 같은 장님은 모든 걸 내 손에 익게 잘 정리해 놓지요. 이건 분명 전기주전자 코드가 맞을 것이고 이 자리에 이렇게 꽂으면… 응? 왜 잘 안 들어가지?”
“할배, 이리 줘봐. 멀티탭에 뭘 이렇게 줄줄이 꽂아놨어? 얘들 대가리가 부딪쳐서 안 들어가는 거잖아. 복지사가 와서 보고 말 안해? 이러다 불 난다? 나야 손 안대고 코 풀면 좋지만 이웃에 폐…가만, 이거 뭐야? 설마 노트북이야? 할배, 눈 안 보인다며?”
“허허, 거 참. 젊은 이가 말 한 번 험하게 하는구만. 저건 이웃집 아들들이 놓고 간 겁니다. 이웃집 부부가 얘들에게 워낙 엄해서 기계를 못다루게 한다지 않습니까? 젊은 손님이 보기에도 그렇지요?”
“젠장. 이웃이 이 집에 자주 들락거리나?”
“어쨌든 그건 건들지 마시오! 위험해, 잘못하면 죽는다고! 어? 어이… 여봐요. 왜 말이 없소. 기절했나. 전원 선 까졌다더니 진짜였나 보구먼.”
“으… 으음… 으앗 뭐 하는 거야? 이제 깼으니까 인공호흡은 필요 없다고! 조금만 늦게 정신 차렸으면 큰일날 뻔 했군. 그나저나 내가 누군지 알고 나를 살려주는 거야?”
“허어, 당신이 누구냐에 따라 내가 살릴지 말지를 선택해야 한단 말이오? 이상한 말을 하는군. 감전되어 쓰러진 게 나였어도 당신은 똑같이 했을 거요.”
“아니, 여태 내가 한 말을 뭐로 들었어! 눈이 안 보인다더니 귀가 먹었나? 내가 왜 노인네를 살려. 그렇게 쓰러지면 나야 땡큐라니까! 응? 근데 노트북 화면에 저건 뭐야? 애들이 대체…뭘 보는 거야. 이거, 애들 노트북 맞아?”
“허허. 애니까 애라고 하지. 젊은이도 거기서 떡국을 한 오십 그릇만 더 먹고 나면 머리에 피도 안 말라서는 허우대만 죽죽 자란 사람들이 눈에 들어올 거요. 그게 애지, 뭐 별 겁니까?”
“이제 보니 보통 노인이 아닌 것 같군. 분명 여기저기에 이런 함정을 만들어 놨겠지? 여기 장판이 쭈글쭈글하게 일어난 곳이라던가…아아악!”
“앗, 장판 밑에 쇠꼬챙이가… 설마 찔렸수? 허 저런 미리 말하려고 했는데. 그러게 남의 집에 들어와 아무거나 건드리면 안 된다니까요. 여튼 그게 한 번 박히면 안 빠지는 건데, 참.”
“으악? 쇠꼬…? 뭐, 뭐야. 그냥 레고잖아. 영감탱, 왜 그런 되도 않는 거짓말로 사람을 놀래키는 거야?”
“그게 꼬챙이가 아니라 장난감인가? 애들이 노트북 갖다 놓으면서 그것도 떨어뜨리고 갔나 보구만 그래. 이해해주시오. 내가 올해 들어 정신이 많이 오락가락해서. 그래, 아직 차 마실 생각은 있소?”
“아니, 왜 이렇게 차에 집착을 해. 그냥 알아서 하셔. 어쨌든 이름은 천덕구, 나이는 83세 맞지? 시간 남아도는 거 아니니까 답답하게 하지 말고 빨리 대답해.”
“이거 참. 젊은이야말로 나도 잊은 내 나이에 너무 집착하는 거 같으이. 나도 질문 하나 합시다. 복지사도 아니고 내 이웃도 아닌 사람이 왜 이 누추하고 좁은 단칸방까지 찾아왔소?”
“거 너무 알려고 하지 말고 묻는 말에 대답이나 해. 일은 확실하게 하자는 게 내 주의거든. 그리고 사실 왜냐…고 물어도 해줄 말이 없어. 나도 모르거든. 아까도 말했잖아. 이쪽에 발 담근 이래 판자촌 쪽방 노인네가 타겟인 건 처음이라고. 내가 궁금할 지경이야. 영감, 혹시 왕년에 뭐 원한 좀 샀어?”
“허허. 나이도 이름도 못 답하는 노인네한테 너무 어려운 걸 묻는 것 같습니다.”
“일을 하다 보면 타겟이 나쁜 놈일 때도 있고, 의뢰인이 나쁜 놈일 때도 있어. 하나 하나 이유를 따지자면 이 일을 못 해. 그래도 다 죽어가는 쪽방 영감의 사연이 궁금하긴 한데…… 그나저나 저 녹차 너무 오래 우리면 써지는 거 아니야?”
“차도 사람도 제법 오래 두어야 깊은 맛이 나는 법 아니겠소. 한 번 그 맛을 알면 이전으로는 돌아갈 수 없지. 젊은이도 좀더 나이가 들면 알게 될 거요. 그래, 내 사연이 그리 궁금하오? 젊은이가 망설이는 모양을 보아하니 내 짐작가는 일이 있긴 있소만. 그러나 이 또한 한 번 들으면 이전으로는 돌아갈 수 없으니 신중해야 할 거요.”
“아니 근데 이거 맛이 왜 이래? 어, 으어, 오오오오… 무슨 차야 대체! 정체가 뭐야.”
“허허. 내내 보지 않았소? 그저 티백으로 우린 별 것 없는 녹차요. 끓여서 조금 식힌 물에 딱 2분을 우리면 좋지요. 더 두면 젊은이 말대로 쓰고 떫어지니… 그래도 차맛이나마 느끼려면 떫어질 것을 걱정해서 담그는 둥 마는 둥 건져낼 일은 아니라오. 헌데 젊은이. 녹차를 이리 질색할 줄은 내 미처 몰랐구려. 가만 생각해 보니 아무래도…”
“아무래도 뭐? 뭐가 기억이 난 거야, 아님 녹차를 질색해서 기분이 나쁜 거야? 아우, 신경 써서 우려내도 떪은 건 어쩔 수가 없구만. 이왕이면 뭔가 기억이 난 거면 좋겠는데, 뜸 들이지 말고 빨리 말해 봐. 기다리다 숨 넘어가겠어-.”
“사람이 두 명 죽었소. 30년 전, 그 다정한 기도원에서. 사인은 음독. 이 사실을 내게 직접 듣는 건 그대가 처음이라오.”
“퉤―! 독, 뭐?”
“차는 왜 뱉으시오? 설마, 내가 범인이라 생각하고 찾아온 거요? 허허…억울하구만. 내가 그런 게 아니오. 허니, 아까운 차는 마저 마시구려. 아니면 이리 주던가. 내가 마실 터이니.”
“아니, 아까는 그 기도원이 이웃 간의 정과 아이들의 미소가 넘치는 아름답고 평화로운 곳이라고 말했잖아. 근데 그곳에서 사람이 둘이나 죽었다고? 그것도 독으로?”
“내 말했잖소, 음독이라고. 그리고 그 사실을 알게된 것은 그대가 처음이라고. 전엔 그곳에서 독을 먹고 죽은 자가 있단 것을 아무도 몰랐지요. 그러니 기도원 사람들은 뿔뿔히 흩어지기 전까지 다정했을 수밖에요.”
“잠깐만… 그 사실을 안 사람이 없었다는 건 당신이 그걸 숨겼다는 얘기잖아. 그리고 그 둘은 기도원 사람이 아니었다는 거고.”
“허허, 기도원 사람이 아니라니 왜 그리 생각하셨소? 새벽기도원은 말 그대로 평화롭고 좋은 곳이었다오. 거기서 생의 끝자락을 보내다 주님 곁으로 가고프다며 찾아드는 노인네들이 적지 않았지.
헌데 그 중에 누군가가 주님 곁으로 간 이유는 다름 아닌 독이었을 줄 누가 짐작이나 했겠소? 내 이제껏 입을 다물기는 했어도 그것이 알고 보면 또 기막힌 얘긴데….”
“그~러니까~ 다른 사람이 짐작도 못한 것을 영감탱이 너는 짐작했단 거 아냐. 적어도 뭔갈 알고 있고 그거에 관련된 사람이었단 거지. 내 말 틀려? 아~ 영감탱… 계속 말 돌리는 거 내가 모를 줄 알았나… 졸라리 킹받게. 잘 못했으면 죽어야지, 안 그래? 뭐, 그게 아니더라도 넌 죽어야지.”
“아가씨 말을 이해를 못하겠구려. 킹을 받는다? 요즘 말인가 보구려. 고운 목소리로 왜 그런 말을 쓰시오? 언어는 그 사람의 거울이라오. 그건 그렇고, 킹이라고 하니 또 어렴풋이 기억나는 게 있군요. 그게 두 사람이 사망하기 전이었던가…”
“사망하기 전? 아, 진짜! 기억을 좀 한번에, 시간 순서대로 하란 말이야. 그렇게 들쭉날쭉 기억하면 정리하기 힘들잖아.”
“묵은 이야기를 갑자기 풀어 놓는 내 입장도 좀 생각해주시오. 말도 많이 해 본 사람이 잘 하는 거지, 나처럼 찾아오는 사람이라곤 젊은이 같은 사람들 뿐인 늙은이가 그렇게 이치에 맞게 딱딱 말할 수 있겠소? 그 차, 아직 안 마셨다면 이리 주시오. 내가 마시리다. 간만에 말을 많이 하려니 목이 탑디다.”
“자,자! 여기 마셔, 얼마든지 마시고 얘기나 좀 해봐. 뭔 이야기를 시작하나 싶으면 자꾸 딴소리야. 그래서 그때 죽은 두사람이 누군데? 뭐하던 사람들인데 독살을 당해?”
“그…좀 재촉하지 마시구려. 목을 좀 축이고 말을 꺼내야 할 듯 하니. 커험.
그러니까, 둘 중 한 사람 이야기를 먼저 하겠소. 그이도 녹차를 좋아했더랬지. 한 쉰 살 정도 먹었던 남자였소. 기도원에 온 지 한 네댓 달 되었던가? 입담이 좋았소. 자청해서 여기저기 청소도 하고, 그래서 사람들이 좋아했지.
그런데 어느 날 아침 죽은 채 발견된 거요.”
“최초 발견자가 천덕구 당신이었을 것 같은 느낌이네?”
“아암. 내가 경비 일을 참 잘했지.”
“뭘 그렇게 흐뭇한 표정으로 추억하는 거야! 빨리 말 안 하면 확 그 맛대가리 없는 차도 빼앗아 버릴 줄 알아.”
“킹… 그래, 그 첫번째 사망자 별명이 킹콩이었다오. 덩치가 큰 건 아니었는데, 수시로 가슴을 두드렸거든. 그… 킹콩, 아가씨도 아시나? 너무 오래된 영화지요?”
“내가 아는 유일한 킹콩은 방사능에 절여진 거대 도마뱀하고 싸우는 녀석뿐이야. 옛날 영화는 내 취향도 아니고.”
“킹콩이 도마뱀하고 싸우나? 미안하오. 나도 요즘 영화는 몰라서 말입니다.”
“쓸데없는 얘기는 집어치워. 그래서 그 사람이 어쨌다는 거야?”
“글쎄… 뭐하던 사람인가는 몰랐지만, 아무튼 말주변도 좋았고, 오자마자 부지런히 여기저기 쓸고 치우고 하는 게 아주 예사롭지 않았지. 얼마 안 돼서 거기서 몇 년 지낸 사람보다도 기도원 구석구석에 빠삭해졌더랬지요. 그러던 어느 날 내게 묻지 않겠소. 여기서 경비 노릇 하고 살려면 어떡하면 되냐고.”
“그래서 당신이 그 사람을 살해한 거야? 경비 자리를 노려서? 뭔가 그럴 거 같은데.”
“허 참. 아까부터 날 뭘로 보는 거요? 사람이 사람 죽이는 일이 그렇게 쉽게 일어날 리가 있습니까? 게다가 고작 경비 자리 때문에? 일손 모자라고 적적한 기도원에 같이 근무하겠다는 사람을 내가 마다할 이유는 또 뭐고. 안 그렇소?”
“영감. 이 바닥에 있으면 별의별 얘기를 다 듣는다고. 물론 돈까지 써서 청… 하여간 우리 같은 사람을 쓰는 건 보통 이유가 뻔하긴 해. 하지만 보면 정말 별 거 아닌 일로 사고치는 놈들도 있잖아. 뭐, 우리 안줏거리지. 야,세상에 그런 미친놈도 있더라, 그러면서 좀 나 자신이 정상인처럼 느껴진다고나 할…아니 이게 아니지. 그래서? 더 말해 봐.”
“이런 판잣집 노인네를 찾아온 것은 처음이라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별별 일을 다 겪었다 생각하시겠지만, 아가씨 나이엔 아직 보고 듣지 못 하신 게 많을 겁니다. 비록 이 늙은이는 더 이상 그런 것들을 눈에 담고 싶지 않아서 스스로… 아, 아닙니다.”
“꼰대처럼 구는군, 짜증나게스리.
그 킹콩인지 고질라인지나 더 말해 봐. 경비를 하겠다고 해서, 그래서 뭐?”
“킹콩, 그래요. 그 남자 얘기를 하고 있었지요? 가슴을 자꾸 두드리는 게 아마 폐에 뭔가 문제가 있지 않나 싶었다오. 그렇게 줄담배를 피워댔으니 허파가 멀쩡할 리가 있나. 아가씨는 상상하기 힘들겠지만, 당시만 해도 실내 금연이라는 개념도 없었소. 사람들은 담배 연기가 싫어도 그를 좋아했기 때문에 참아 넘겼지요. 하지만 그 여자는… 이런! 차가 식었군요.”
“하던 얘기 계속 해, 그 자리서 움직이지 말고. 차는 내가 따라주지. 그런데 이 집에는 시계 하나 없나?”
“시계라 하셨소? 역시 아가씨는 단순히 누군가의 의뢰로 나를 찾아온 게 아닌 게로군요. 그렇지 않고서야 그 여자의 별명이 로렉스인 것을 어찌 알고 시계 얘기를 하셨겠소. 로렉스… 시계처럼 참으로 정확한 여자였지요.”
“이 노인네가 무슨 개소리야. 휴대전화도 안 쓸 것 같은 늙은이가 시간은 어떻게 아나 싶어 물어 본 건데.
그리고 말 계속 다른 데로 튀지 말라니까! 나도 언제까지 참아줄 것 같아? 진짜 죽고 싶어?”
“진, 진정하시오. 앞도 안 보이는 노인네에게 시계가 있어봐야 무슨 쓸모겠소. 부디 험한 말은 삼가주시오.”
“으하하… 영감. 나 평소보다 자중하고 있는 거야. 험한 말은 아직 시작도 안 했어. 아니 어쨌든, 그래서 로렉스가 킹콩한테 어쨌는데?”
“로렉스… 그 여자는 자기규범을 깐깐하게 지키는 사람이었다오. 가령 업무는 주어진 시간만으로 해결하기, 쓰레기는 쓰레기통에, 담배는 환기가 잘 되는 곳에서만 피기 같은 것들이지. 그는 킹콩이 아무데서나 줄담배를 피워대는 꼴을 못봤다오. 킹콩도 적당히 피해가며 담배를 폈지만… 하필 그 날 걸려버린거지, 담배에 불을 붙여 막 첫모금을 빠는 순간이.”
“그래서?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나?”
“어, 잠깐. 내가 방금 뭘 밟은 것 같은데. 혹시 머리카락이 긴 편이시오? 꼬리라든지…”
“관둬. 일이나 마저 해야겠군. 노망난 늙은이의 이야기에 조금이나마 관심을 가진 내가 바보였지.”
“음? 목 둘레에 뭔가… 이, 이건 올가미? 크헉, 잠깐! 다, 당기지 마시오! 수, 숨을 못 쉬겠소. 꼬리 얘기는 농담이었소. 기분 나빴다면 용서하시오.”
“제발 협조해 달라구. 나는 궁금한 채로 끝나는 게 가장 싫어. 그래서 보고싶은 드라마 다음 편을 보려고 비싼 의뢰도 미루는 사람이야. 그래서,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건데?”
“로렉스가 킹콩의 눈을 파낼 것처럼 노려보더니 ‘널 죽여버리겠다’고 했다오. 킹콩은 약간 당황했지요. 아무리 담배 피우는 사람을 싫어한다기로서니 죽여버리겠다니. 어이가 없어서 킹콩이 ‘날 죽이면 네가 무사하겠냐’며 받아쳤거든요. 그랬더니 로렉스 왈 ‘내가 직접 죽이겠냐. 멍청하게.’ 라고 대답을 했던 거요.”
“킹콩한테 독을 먹인 게 로렉스라는 얘긴가? 고작 담배 연기 때문에? 영감, 괜히 다른 사람한테 누명 씌우는 거 아냐?”
“허허, 내 생각에도 그건 아닐 것 같소. 다른 죽은 한 명이 바로 로렉스였거든요.”
“하하… 뭔가 믿기 어려운 이야기인데. 설마 전부 다 지어낸 얘기 아냐?”
“아니요. 이건 정말이오. 그 일을 계기로 로렉스와 킹콩의 앙금은 깊어졌어요. 담배 뿐 아니라 다른 안 좋은 일들이 그들을 급기아 원수지간으로 만들었지. 서로를 너무 미워한 그 둘이 상대를 제거하고 싶어서 떠올린 한 사람이 있었다오. 블라인드어쎄신, 그 뭐더라 눈먼암살자라고… ”
“8·90년대 B급 영화 제목처럼 들리는 이름이네.”
“엥, 설마 그 영화를 아는 거요? 분명히 밝히지만 난 동의한 적이 없어요. 개런티를 받기는커녕 웃음거리만 됐다고. 결국 활동명을 바꿔야 했단 말이오. 씨네필들이란….”
“보자 보자 하니까 이 할배가 정말! 본인이 블라인드어쎄신이고, 영화로까지 나왔다고?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그리고 양손 손가락 두개씩 까딱까딱 하는 건 왜 그러는 거야? 설마 따옴표?”
“아니, 아닙니다. 계속 한 자세로 있으려니 손에 좀이 쑤셔서요. 그나저나 이 밧줄 좀 어떻게… 풀어줄 수는 없소? 나도 모르게 목에 힘이 들어가니 뒷골이 뻣뻣해져서 말입니다. 이게, 나이가 나이인지라 고혈압이 있어서…… 내가 기절하면 그 쪽도 내 얘기를 더는 못 들을 테니 피차 난처하지 않겠습니까?”
“흥, 그렇게 말하면 얼렁뚱땅 풀어줄 줄 알았나 보지? 영감, 영감은 아주 큰 실수를 한 거야. 나를 두고 감히 꼬리를 언급하다니, 그건 마치….
젠장, 관둬야겠군. 아무튼, 밧줄은 지금 못 풀어줘. 뭐 다음 이야기가 마음에 들면 좀 달리 생각해볼 수도 있고. 자, 눈먼 어쌔신 영감. 어디 이야기 해 봐. 우린 같은 업계 종사자인 셈인가?
“같은? 같으은~? 허허, 젊은 아가씨가 당찬 게 보기 좋군요. 동종업계에서 나이 좀 잡순 양반들에게 물어보십시오. 내가 일을 뜨문뜨문 받는 편이긴 하지만 아가씨와 같은 급으로 엮일 사람은 아니외다.”
“……확실하군. 당신은 이쪽 일은 한 번도 해본 적 없어. 자길 천장에 매달려는 인간 앞에서 배짱 부려봤자 안 통한다는 건 업계 기본 정도가 아니라 상식이잖아? 조금은 기대했는데. 역시 미친 노인일 뿐이군.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밧줄은 지금 못 풀어 줘. 내 일을 소홀히 할 생각도 없고. 로렉스와 킹콩의 이야기로 돌아가지. 그래서 둘이 어떻게 했는데?”
“그리 궁금하시다니 되짚어 보리다. 어디….
그러니까, 평화로운 기도원에서 그런 맘을 먹는 사람이 나올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만, 아무튼 그 둘이 떠올린 사람이 하필 같았다는 게 더 문제였지요.
먼저 움직인 사람은 킹콩이었소.
블라인드 어쌔신을 찾을 생각을 쉽게 할 정도면 전력이 범상한 인물은 아니었다는 얘기지요. 그래서 킹콩은….”
“그래, 여기 녹차 새로 준비했으니까, 쭉 얘기해보라고.”
“아. 미안하지만, 사실 나는 녹차를 좋아하지 않아요.”
“이제 와서 녹차를 안 좋아한다고 말하는 건, 여기에 독이라도 탔을 거 같아서 그런 건가? 그렇게 의심스러우면 그냥 내가 마실게.”
“이런, 기분 나빴소? 아가씨를 의심한 건 아니요. 정말로 녹차를 안 좋아하거든. 난 국화차가 좋더이다. 아가씨가 거기 독을 탈 것 같지도 않고. 아가씨는 말이지.”
“말에서 가시가 느껴지지만, 잘 맞췄네. 요즘엔 독 같은 번거로운 방식을 쓰는 놈은 거의 없어. 그래. 그래서 킹콩이 그 우스꽝스러운 코드를 쓰는 사람에게 로렉스를 죽이라 의뢰한 건가?”
“이봐요 젊은이. 아니면 아가씨. 프리랜서인지 뭔지 뭐든 간에. 나는 킹콩과 로렌스가 살해되었다고 말한 적이 없답니다. 죽기는 했지만 말이지요. 나도 곧 죽을 테고.”
“미치겠네. 그럼 뭔데? 그 두 머저리가 싸운 거며 블라인드 어쎄신을 떠올린 이야기들은 뭐하러 한 거야?”
“어처구니가 없군. 서로를 죽이고 싶을만큼 싫어하던 사람 둘이 당시에 날뛰던 암살자 이름을 떠올렸지만 결국엔 자기 손으로 처리를 했다는 거야? 거 참 상상도 못한 저질 복선이네!”
“아니, 아니오. 그게 <블라인드 어쎄신> 영화의 각본이긴 했지만, 그 둘이 직접 서로를 죽인 것도 아니오. 그 사람들의 문제는 그냥, 기도원의 다른 이들보다 좀 더 성실하고 신실했던 것 뿐이오. 킹콩도, 로렉스도. 하필 그 두 사람이 서로 사이가 나빠진 것도 문제라면 문제였지.”
“젠장. 애초에 둘이 서로를 죽이고 싶어 했던 건 맞아?”
“그것도 맞소. 암. 그러니 킹콩이 그런 일을 했겠지.”
“그런 일이라니? 살해한 것은 아닌데 뭔가 죽음에 이르게 하는 일을 하긴 했다는 거야? 왕따 같은 건가? 로렉스라는 여자에 대해 거짓 소문이라도 퍼트렸나?”
“그들이 정말로 뭘 했는지는 모르오. 허나 둘은 서로 마주치기만 하면 죽일 듯이 노려보곤 했지. 둘 다 신실한 사람들이었다고 했지요? 하루 매 시간마다 있는 기도회에 한 번도 빠진 적 없이 나타난 그들이, 속으로 뭘 기도했는지는 모를 일이지.
문제는, 어느 날 나타난 예언의 능력이 있다는 남자였소. 그 남자는, 둘을 보자마자 놀란 듯이 외쳤다오.”
“뭐라고 했는데?”
“사실 다들 그 남자를 반쯤 돌았다고 여겼기 때문에 누구도 귀담아 듣지는 않았소. 하지만 대강 이런 말이었지. ‘여기 증오에 불타는 자들이 있구나! 남의 눈의 티를 보느라 제 눈의 대들보는 보지 못하는 자들이로다. 불쌍한 자들이여, 너희는 눈먼 자에게 심판을 구하라.’
킹콩이 그 말에서 어떻게 블라인드 어쌔씬을 떠올렸는지는 오로지 그만이 알겠지요.”
“하… 그놈의 블라인드, 아니, 됐다. 계속 말해 봐. 그걸 킹콩이 떠올렸어. 그래서 그 사람이 뭘 했지?”
“흠, 나이가 들고 보니 기억 하나 떠올리는 게 여간 힘든 일이 아니라오.”
“그래? 그럼 목에 칼을 들이밀면 기억이 더 잘 떠오를까?”
“그 칼로 밧줄만 끊어준다면 참 좋겠구려!”
“끊어야 할 건 킹콩의 담배와 당신의 맛없는 녹차야. 예언자 얘기나 계속해. 그 사람이 수상한데?”
“그 사람이 바로 시대의 문제작 블라인드 어쌔신의 감독… 아야야야얏!! 늙어도 아픈 건 안다오! 구레나룻 공격은 로렉스 이후 진짜 오랜만이구려.”
“댁이랑 이야기하고 있으니 나까지 이상해지는 것 같아. 그놈의 엿 같은 블라인드 어쌔신……. 그래, 그 미친 예언자가 감독이야. 킹콩이 그 사람이랑 뭘 한 건가?”
“그 감독이 시나리오를 가장한 예언서를 썼다오. 그래, 생각해 보면 모든 게 그 시나리오 대로 진행이 되었지. 아담과 이브가 독사과를 먹는 장면으로 시작되었는데, 그 두 역할을 맡은 배우가 바로…”
“엥? 킹콩과 로렉스가 배우였다고? 영화 주연까지 할 만한 배우들이 왜 그런 기도원에서 지내고 있던 거야?”
“그거야 예술하는 족속들만큼 인생이 팍팍한 양반들도 없으니까 그런 거죠.”
“정리하자면, 그 감독이란 자가 킹콩과 로렉스를 찾아 기도원에 와서 그 둘을 시나리오대로 독살했다 이건가? 천덕구 당신은 그 사실을 알아차렸고? 그래서 그가 당신을 해치우려는 걸까? 아, 내가 궁금해하는 이유는 이번 의뢰에 꺼림칙한 게 있어서야. 의뢰인이 회사에 나를 콕 찝어서 의뢰를 맡겼다고 하더라고. 나랑 무슨 관련이라도 있는 것처럼 말이야.”
“나야 모르지요. 당신이 누군지를 내가 모르는데 당신과 그 감독이 연관이 있는지 알 턱이 있습니까?
내가 아는 건 그 시나리오의 줄거리 중 중반부까지의 이야기가 기도원에서의 사건과 많이 닮았다는 것 정도요.”
“시나리오대로 일이 벌어졌다는 건 확실히 희한하긴 하네. 그나저나 기도원의 다른 사람들은 그 둘이 배우인 걸 알고 있었나? 근데 사이가 그렇게 나빴던 두 사람이 같이 영화를 찍는다는 게 말이 돼?”
“허허, 멀더와 스컬리도 사이가 안 좋았다고 하던데요?”
“이 영감탱이가… 씨…!”
“무튼 로렉스가 독사과를 먹고 쓰러지면 킹콩이 키스를 하는 장면이었는데, 둘 다 절대 못하겠다고 버텼다오. 그 옆에서는 일월명, 아니 일곱 명의 유치부 아이들이 울음을 터트리고… 난리가 아니었지요. 그때 로렉스가 차라리 키스 신은 저 경비, 그러니까 저 말이지요, 에게 대역을 맡기는 게 어떠냐고 제안을 했다오.”
“잠깐. 듣다 보니 이상해. 영화 제목이 블라인드 어쌔신이라며. 진짜 ‘눈 먼 자’가 이제야 등장한다? 당신도 주연 배우였던 건 맞아?”
“다시 말하지만 난 그때만 해도 앞이 훤히 잘 보였답니다 젊은이.
하지만 눈 먼 사람 연기 하나는 기가 막히게 할 줄 알았지요. 그 기도원에서 근무하려면 꼭 필요한 능력이었거든요.”
“못 볼 게 많았다는 소리처럼 들리는군.”
“껄껄. 내 취향은 아니었다고만 말해두지. 그때 무대에서 일월명, 아니 일곱 명의 아이들은 각기 사과를 하나씩 들고 있었소. 로렉스가 그중 하나를 먹고 쓰러지는 시나리오였고, 나는 사과 하나가 다른 걸 냄새로 알아챘다오. 그때도 지금도 눈은 쓸모없었지.”
“잠깐만. 일곱 명의 아이들에, 사과라고? 무슨 백설공주야?”
“에덴 동산이 배경이었으니, 일곱 난쟁이와 공주보다는, 일곱 아기 천사와 이브가 더 맞지 않겠소? 아니면…… 일곱 마리 뱀이나, 일곱 그루 나무라거나. 음.”
“아, 로렉스가 독사과를 먹고 쓰러지면 킹콩이 키스하는 시나리오라고 했지. 그럼 결론은 뭐야. 영감이 킹콩 대역을 한 거야? 로렉스는 영영 못 일어났고?”
“그래요. 내가 킹콩의 대역을 했지요. 그래서 그 문제의 사과가 이상하다는 것도 금방 알 수 있었소. 나는 막간을 이용해서 로렉스에게 말했지. 뭔가 수상하니 먹는 시늉만 하고 정말 먹지는 말라고.”
“그런데? 먹는 시늉만 하다 감독한테 지적받았나?”
“그랬으면 차라리 다행이었지. 그 신실한 로렉스가 내 말을 전혀 안 믿었답니다. 신께서 지켜주시는 사람을 누가 감히 해하려 하겠냐면서 말이오.
그래서… 그래서, 내 조언이 오히려 그의 오기를 건드렸던 건지, 보란 듯이 사과를 씹어 먹더군요.”
“허, 그래서 영감은 그걸 두고 봤다고?”
“두고 보긴! 당장 달려들어 그녀 입 안에 든 사과를 손가락으로 후벼 빼내기 시작했지!”
“그 장면을 다시 찍어야 되긴 했겠네. 그 여자가 죽었든 살았든.”
“떨어진 사과를 킹콩이 주워서 마저 먹은 건 전혀 예측하지 못한 일이었소. 우리가 난리치는 걸 보고 놀리고 싶은 마음이었으려나? 이제는 다 모를 일이지만.”
“사과라…그럼 그 킹콩에게 키스를 나눌 또 다른 킹콩도 필요한건가? 허, 영감. 재미있군.”
“나는 다시 킹콩에게 달려들어 입 안에 있던 사과를 빼내려 했다오. 그러자 그는 뭐 하는 짓이냐며 소리를 버럭 질렀고, 그가 씹던 사과 파편들이 내 눈에 튀었던 거요.”
“어… 그러니까 킹콩이 아니라 그 로렉스라는 여자를 말하는 거 맞지? 근데 설마 사과 파편이 눈에 튀어서 시력을 잃었다는 건 아니겠지?”
“아니, 아니. 킹콩이 맞소. 방금 말했잖습니까. 로렉스가 떨어뜨린 사과를 킹콩도 주워 씹어먹었다고.”
“아니… 당신이 킹콩 대역을 하던 중에 킹콩이 떨어진 사과를 주워 먹었다니… 도대체 왜?”
“글쎄요. 제 짐작에는 제가 사과를 의심하는 것을 호들갑 떠는 짓이라고 여기고, 사람들에게 인기있던 자신의 쾌남 이미지를 과시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싶소. 하지만 이유를 묻지는 못했지요. 누군가 질문을 했더라도 소용 없었을 게요. 킹콩의 입에서는 말이 아니라 허연 거품만 나왔거든. 그것이 내가 본 마지막 세상의 모습이기도 하고 말이오.”
“그러니까 둘 다 영화 찍다가 사과 잘못 먹고 죽고 당신은 그것 때문에 눈이 멀었단 이야기지? 거참 곱씹을수록 더럽게 황당한 이야기네. 그래서 사과에 독을 넣은 건 누구였는데?”
“그걸 내가 어찌 알겠소?”
“자! 그럼 이제 난 내 일을 해야 할 시간이 다가왔단 말을 해야겠소! 찜찜하지만 나도 어쩔 수 없으니까!”
“아니 왜 갑자기 내 성대모사를 하는 거요? 아가씨는 혹시 제록스에 대해서도 알고 있소? 그 친구가 유명인은 물론이고 주변인의 목소리를 곧잘 흉내냈다오. 내가 앞을 못 보게 된 이후로는 헷갈린 적도 많았지요. 제록스는 남 몰래 로렉스를 연모하고 있었는데, 나중에 감독이 말하길… 잠깐, 그것도 진짜 감독이 아니라 혹시 제록스가 흉내낸 거였나?”
“뭐 제록스? 지금 제록스라고 그랬어 영감??”
“아는 사람입니까?”
“알다 뿐이야? 그 사람이 바로 내… 아니, 우선 영감 얘기부터 계속 해 봐. 무슨 말을 들었는데?”
“그러니까 감독이, ‘시나리오의 초반부 밖에 못 연출했으니, 나중에 다음 장면을 찍어야겠군요.’ 라고, 그리 말했소만.”
“근데 그 말을 한 게 사실은 감독이 아니라 제록스인 것 같다는 거지?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라도 있어? 그리고 영감이 알고 있는 제록스가 달총, 아니 말총머리에 뱀파이어처럼 곱상하게 생겨서는 충청도 사투리 쓰는 남자 맞아?”
“‘작작들 혀. 그런다고 무대가 뽀개지겄어?’ 사람 둘이 나자빠지고 나도 눈알이 불타는 것 같아서 소리지르고 있는데 느릿느릿한 목소리가 들렸소. 달리 누구였겠소?”
“이런. 그게 제록스가 맞다면 로렉스와 킹콩은 더 볼 것도 없이 그 자리에서 죽었던 거겠군.”
“꼭 제록스가 죽였다고 확신하는 것처럼 들리는구려. 아가씨는 대체 제록스를 어떻게 알고 있길래 그가 범인이라고 단정하는 거요?”
“당신이 아는 제록스가 내가 아는 그놈이거든. 그런데 지금 밖에 해 지는 거야?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된 건가?”
“그럼, 시간이 이리 된 지는 꽤나 되었수다. 아니 그런데, 그러면 시간 감각도 없이 나랑 이리 대화를 하고 있었단 말인가?”
“시간 감각이 대단하시네. 나랑 얘기하면서 초 세고 있는 건가?”
“그러고 보니 생각나는군요. 제록스는 ‘시간’에 참으로 엄격했지요. 여전히 그렇소?”
“여전히 그렇지.”
“새끼발가락에 반지도 여전히 끼고 있소?”
“아. 유감이야. 그거 너무 추해서 내가 양쪽 다 잘라버렸거든. 그러니까, 이젠 없지.”
“이런. 기도원 사람들에게 꽤 중요한 물건이었는데. 그럼 반지는 버렸소?”
“나도 모르지. 그 녹슨 쇳조각을 주울 이유 같은 건 없었으니. 하지만 제록스 그 놈이라면 잘린 발가락 주워갈 때 그 반지도 챙겨갔을지 모르지. 왜? 무슨 의미라도 있는 거야?”
“내가 알기론 그 마법의 반지로 로렉스에게 프로포즈를 할 심산이었던 걸 거요. 로렉스가 독사과를 먹고 죽는 바람에 새끼발가락에서 빼낼 이유가 없어져 버렸지만 말이오. 그 이후로 제록스는 시간에 관한 강박이 더 심해졌지요.”
“그거 참… 그, 더러운 고백법이네.”
“제록스는 언제나 사랑은 더러운 것이라는 말을 하고 다녔으니 딱 제록스다운 고백법일수도 있겠지요. 새삼스럽지만 제록스도 참…. 아, 아무튼 정말로 그 반지는 꽤 귀한 물건이었소.”
“흠, 보기엔 무슨 고철조각 구부려 놓은 것처럼 생겼던데. 그런 줄 알았으면 더러운 걸 참고 좀 눈여겨 볼 걸 그랬군. 그나저나 마법의 반지라니, 왜 그딴 이름이 붙었는지 궁금한데?”
“그 고철조각을 두드려서 펴면 무슨 글귀가 나타난다고 했소. 기도원 사람들이 따르던 메시아가 남긴 기록이라고 했는데….”
“그런 물건을 발가락에 끼워두고, 자기 프러포즈하는 데 쓰려 했다고? 제록스가 그렇게 대단한 위치였나?”
“그런 인물이니, 아가씨를 내게 보내지 않았겠소?”
“엇? 그렇게 생각해? 그렇지 않아도 나도 이번 의뢰는 의뢰인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연락책인 제록스가 직접 의뢰한 게 아닐까 의심하던 참이었는데…… .”
“아가씨와 대화하다보니 생각난 게 있소. ‘증오에 불타는 너희는 눈먼 자에게 심판을 구할지니’. 제록스가 매일 정오마다 하던 기도같지 않은 기도요. 아까 비슷한 걸 들었지요?”
“눈먼 자가 심판을 한다라… 뭔가 안 좋은 일이 벌어지면 다 영감 탓이라고 은근히 밑밥을 깔아두려는 수작이었던 것 같은데? 설마 로렉스를 죽이려고 사과에 독을 넣은 게 제록스였던 건가? 그걸 영감에게 뒤집어 씌우려고 한 거고?”
“그날 내 눈에 독이 들어갔지만 장님이 될 정도는 아니었다오. 제록스는 블라인드 어쌔신이 필요했고. 그래서….”
“그…영감? 말 끊어서 미안한데 도대체 언제 이야기가 끝나는 거야? 나도 일을 해야 된다고. 바로 사건의 전말부터 얘기해줄 순 없는 거야?”
“전말이라… 실은 이 늙은이도 딱히 아는 건 없다오.
하지만 아가씨. 만일 아가씨를 보낸 게 제록스라면 이것 하나는 확신해도 좋소. 아가씨 역시 이 거대하고도 위대한 이야기의 일부라는 거지. 로렉스가 죽고 킹콩이 죽고 눈먼 노인은 살아남아 옛일을 되새기는 이야기 말이오. 내가 킹콩과 로렉스가 죽기는 했지만 살해당한 건 아니라고 말했던 것 기억하시오?”
“그 둘이 얼마나 멍청하게 죽었는지도 방금 들었지.”
“오랫동안 살아남아 생각해보았다오. 나를 왜 눈먼 채 살려두었는지. 엉뚱한 사람들을 죽게 해놓고 정작 왜 나는 두고 갔는지.”
“그래서 생각해보니까 답이 나와? 난 제록스가 뭔 생각인지 도저히 모르겠던데. 그놈 진짜 또라이잖아.”
“허허. 앞으로 벌어질 일에 대해 묻는다면 답이 없을 수 있지만 이미 벌어진 일에 대해 묻는다면 늘 답이 있는 법이지. 자, 수수께끼라 생각하고 답해 보시오. 사람이 죽었지만 살해당한 건 아니라면, 그 사람은 왜 죽은 거겠소?”
“자살했거나 우연한 사고로 죽은 거겠지. 아님 병으로 죽던가. 너무 뻔한 질문 아닌가.”
“말했듯이, 로렉스와 킹콩은 사고로 멍청하게 죽었소. 제록스는 그런 걸 꾸밀 정도로 치밀한 놈이 아니었고. 무엇보다 로렉스를 사랑한 건 진심이었다고 믿고 있소”
“제록스로선 복수할 대상을 찾아내고 싶었겠네.”
“나 역시, 조용히 문이나 지키며 살고 싶었고. 더는 누구도 죽이고 싶지 않았다오.”
“후후. 그게 어디 뜻대로 되나ㅡ”
“아가씨 말대로요. 삶의 많은 것이 그렇듯, 그 바람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더이다. 로렉스의 장례가 끝나던 날, 제록스가 나를 찾아왔다오. 내가 도와줘야 할 일이 있다면서 말이오.”
“그 양반, 그때부터 살인청부 브로커의 길로 들어선 건가? 그래서 누굴 죽이라고 했는데? 이번에는 또 어떤 괴상한 별명을 가진 사람이 등장할까 궁금하네.”
“‘랜서’. 머리카락이 유난히 길고 솜씨가 좋아서 유명하던 젊은 친구가 있었소. 특이하게도, 그자의 딸을 찾아달라고 하더군요.”
“랜서… 왠지 낯 익은 이름인데?”
“이름인지 별명인지는 모르겠소. 그 앞에 F. 가 붙었더라는 건 기억나는군 그려.”
“다른 거 더 아는 건?”
“음… 그게… 출출해서 생각이 잘 안 나는구료.”
“진짜 이 영감탱이를 확! 씨… 집에 뭐 먹을 거 있어? 이따위 말라비틀어진 티백 말고.”
“냉장고 신선 식품 칸에 과일이 좀 있소.”
“이거… 뭐야. 누구 거야, 이 눈알.”
“아 그건 삼손 거요. 어디 뒀나 했는데, 그게 거기 있었소?”
“삼손? 제록스가 데리고 다녔던 그 삼손? 설마 당신이 그렇게 만든 거였나?”
“엊그제 찾아왔기에 오랜 친구끼리 녹차 한 잔 했지요.”
“아하. 삼손이 맛대가리 없는 녹차를 마시고 놀라서 눈이 빠져버렸구나. 뭐, 이렇게 생각하면 되나? 제발 설명을 할 거면 한 번에 말하라고!”
“거 급하기는. 세상엔 한 번에 말할 수가 없는 긴 얘기라는 것도 있는 법이요. 무조건 한 번에 말하려고 하면 내용이 뭉개져서 전혀 다른 얘기가 된단 말이요. 그리고 녹차는 당연히 맛도 향도 좋은 걸로 마셨지. 그게 없으면 차를 왜 마시겠소?”
“그래서 지금은 이 티백만 남은 건가? 삼손이 다 먹어버려서?”
“염치없는 친구와 오래 알고 지내다보면 이런 일도 생기는 법이지요.”
“그렇다고 과일 대신 친구의 눈알을 보관하다니. 확실히 제정신이 아니군. 나는 그만 내 할일을 해야겠어, 영감.”
“오해하지 마시오. 이건 삼손이 나에게 맡아달라고 부탁한 거요.”
“자기 눈알을 빼서 맡겨 놨다고? 별 미친… 아니, 삼손 거라는 게 그 사람 몸에서 나왔다는 게 아니라 그 사람 소유라는 뜻이었나? 잠깐… 이 갈색 눈동자 옆에 십자가 모양 얼룩 있는 거 어디서 많이 봤는데… 설마 이거 제록스 눈알이야?”
“그 눈이 그렇게 생겼소? 그럼 제록스 게 맞겠지.”
“스톱! 영감, 움직이지 마! 천덕구! 가만 있으라고! 눈 크게 떠 봐. 그대로. 뭐, 뭐야? 영감 눈동자에도 십자가 얼룩이 있잖아!!?? 삼손이랑 랜서도 눈알에 그런 게 있나? 대체 당신들 뭐야?”
“우린 다 같은 기도원 출신이라오. 그거 말고는 달리 뭐겠소?”
“랜서…… 생각났어… 자기를 본 모든 사람의 눈알에 표식을 남긴다던 미친놈. 진짜였다니….”
“랜서 그 친구도 처음부터 그렇진 않았다오. 내가 그의 딸을 찾아서 제록스에게 데려다 주고, 제록스가 자취를 감춰버리면서 미치광이가 되었지. 그 딸 아이가 그때 세 살이었으니까 지금은 서른이 갓 넘었으려나? 아가씨는 나이가 어떻게 되시오?”
“내가 아마추어처럼 남한테 내 정보를 말할 것 같아?”
“흠. 그러면 이건 어떻겠소? 아가씨도 나에 대해 다 알고 온 것은 아닌 것 같으니. 서로 아는 걸 하나씩 번갈아가며 말해봅시다. 우선, 나는 삼손을 해치치 않았소.”
“당신이 진실을 말한다는 보장이 없잖아.”
“믿지 않는데 지금까지 다 들어주었소? 정말 따뜻하게 자랐군요.”
“일단 당신이 삼손을 해친 게 아니란 건 알겠어. 하지만 삼손이 제록스의 눈알을 여기 맡겼다는 게 이해가 안되는데. 삼손이 제록스를 배신했었단 소리 아냐?”
“삼손을 ‘그렇게 만들었냐’라고 물었기에 답한 것이오. 자, 이제 아가씨 차례요.”
“뭐가 내 차례야.”
“아가씨의 나이를 알려줘도 좋고, 랜서에 대해 알려줘도 좋겠지요.”
“좋아. ‘랜서’는 소문으로만 들었고 멀리서 본 적도 없어. 다음. 아는 걸 아주 길게 말해야 할 거야, 영감.”
“엊그제 삼손에게 듣고서야 알았는데, 랜서가 미치광이가 된 건 딸을 잃은 부성애 때문이 아니었다오. 그 여자애가 친딸이 아니었고, 랜서 그놈도 납치를 해온 것이었다는구료. 그 애의 어깨에 지도가 그려져 있는데 서른이 될 때 쯤 가짜 길은 희미해지고, 진짜 길만 진하게 남게 된다지 뭐요. 내가 그 애를 제록스에게 데려다 준 거고. 혹시 아가씨 어깨에…?”
“계속 떠 보는 말을 하는군. 숨 쉬기 편하신가 보지? 한 가지 더 물어야겠어. 두 놈이 그 지도를 왜 탐낸 거야? 그때 제록스는 로렉스와 킹콩을 죽인 머저리 연극 감독이었을 뿐이고, 랜서는…”
“잠깐, 말에 오류가 있는데. 내가 언제 제록스가 감독이었다고 했소. 내 기억이 맞다면 분명히 감독은 다른 사람이었소. 아까 말했듯 예언자라 불리던 사람이었지. 난 제록스가 감독인 척을 한 거 같다고 말했소. 그러고 보니 킹콩과 로렉스의 죽음도 얘기하다 말았구만. 어떤 거부터 얘기해야 하지?”
“망한 연극 따위 이제 하나도 궁금하지 않아. 랜서에 대해 아는 걸 더 말해 봐. 지도가 어쩌고는 영감 숨을 끊기 전에 마지막으로 물어보겠어.”
“거 살벌하게도 물어보는구만. 젊은이가 벌써부터 험하게 굴면 안 좋을 텐데… 랜서에 대해 확실한 거라면, 그 지도를 새겼던 사람과 무언가 관련이 있었단 거겠지. 눈에 표식을 새기는 기술, 피부에 정교한 지도를 새기는 기술, 그런 게 아무 데서나 배울 수 있는 기술은 아니잖소.”
“제록스 놈이 아무래도 협박을 당한 모양이네. 나를 영감에게 보내면 죽이지는 않겠다고 한 걸까. 아니면, 한편인가? 너희들 지금 다 뭘 꾸미는 거야.”
“너희들이라니요. 부디 그 무시무시한 자들과 이 늙은이를 한 무리로 묶지 말아 주시오. 뭐 어쨌든 삼손이 제록스를 방문한 것은 맞는 것 같군요. 그의 눈알을 가져 온 걸 보면. 아가씨가 제록스에게 청부 문자를 받은 게 그 이전일지, 이후일지가 궁금하군요. 누가 먼저 행동을 취한 것일지.”
“나는… 당연히 제록스라고 생각했어. 그놈이 남 흉내를 잘 내는 건 알았지만 남이 흉내낼 거라고는 전혀 생각 안해봤거든. 문자를 받고 여기 오기 직전에 삼손이 죽은 걸 알았어. 아마 제록스는… 그전에 갔나보군.”
“역시. 제록스가 죽었고 삼손도 죽었다면 범인은 누군지 확실하군요.”
“지금까지 들은 얘기대로라면…… 랜서가 지도를 쫓아 제록스와 그 일당이었던 삼손을 죽인 건가? 아니면 다른 짐작가는 사람이 있는 거야?”
“지도 쪽은 어떻소. 이제 가짜 길이 모두 사라지고 진짜 길만 남아 있나요?”
“그래. 진짜 길이 드러났지. 하지만, 난 그 여자가 아니야.”
“허허, 이 늙은이가 앞이 보이지 않으니 아가씨의 어깨를 확인할 수도 없고…. 그래 아가씨는 지도를 보긴 본 모양입니다? 그게 무얼 찾는 지도인지도 알고 계시오?”
“랜서. 그놈이 알겠지. 제록스도 삼손도, 그 멍청이 같은 새벽기도원 인간들도 다 죽고 없으니. 이제는 랜서뿐이지.”
“그렇지요. 랜서가 감독이기도 했고 말이오.”
“뭐? 랜서가 감독 본인이었어? 별개의 인물인 척 하더니 영감 딱 걸렸어!”
“아, 내가 그런 식으로 말했던가? 둘이 하나로 생각하는 게 힘들어서 말이오. 랜서는 감독 일을 할 때면 언제나 아예 다른 사람인 척을 했거든.”
“결국 모든 죽음의 배후에 랜서가 있는 거였군. 놈이 노리는 것은 내 어깨, 아니, 천덕구 당신이 납치해서 제록스에게 데려다 준 여자의 어깨에 그려진 지도였고.”
“해서는 안 될 짓이었소. 후회하고 있다오. 살인자가 아니라 더 좋은… 다른 사람으로 크게 두었어야 했소.”
“섣부르게 확신하지 마, 영감. 그 애는 살인자로 크지 않았을지도 몰라. 어쩌면.”
“이제 모른 척은 그만할 때도 되지 않았소?”
“아니 그게……그래, 까놓고 말하지. 나도 의심은 가는데 확신이 안 가.”
“지도가 가리키는 보물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아시오? 종교적인 물건이라는 것 정도는 들었을 것 같소만.”
“제록스가 나한테 직접 얘기한 건 없어. 근데 그 놈이 즐겨 보던 영화는 알지. 인디아나 존스, 아마 그게 1편인가. 레이더스? 암튼 날이면 날마다 그 영화를 보면서 내 어깨를 흘끔거렸지.”
“그래. 아가씨의 어깨를 봤단 말이지요?”
“아, 그래, 그게 나야 나! 왜? 천덕구 당신도 내 어깨 보고 싶어? 아참, 앞이 안 보이지?”
“기억해주다니 고맙구려.”
“씨… 이제부터는 제대로 대답해야 할 거야. 어깨만으로는 부족하잖아. 제록스가 발가락에 끼고 있던 거. 그거 영감이 가져갔지?”
“그걸 왜 내게서 찾는지. 제록스의 양 발가락은 아가씨가 잘라버렸다고 하지 않았소?”
“그때는 몰랐다고. 제록스 놈이 왜 그렇게 기겁하는지. 발가락보다 반지가 굴러가는 걸 더 안타까워하더라니…. 바로 줍기는 했지만 결국 잃어버렸다고 했어. 이제 보니 도둑맞았네. 그렇지?”
“어어? 뭐 하는 거요? 갑자기 양말을 왜 벗기는 것이오? 발 안 닦은 지 일주일도 넘었소. 무좀도 있고.”
“좀 더 창의적인 보관법은 없었을까, 응? 꼭 이것까지 똑같이 했어야 했어? 더럽네 진짜… 확 또 잘라버릴까 보다.”
“아악! 마구 잡아 빼지 마시오! 이게 겉은 맨질해도 안에는 돌기가 있어서 그렇게 당기면 아프다오.”
“아, 진짜 이해를 못하겠네! 그런 걸 굳이 잘린 발가락에서 빼내서 끼고 있는 이유가 뭐야? 글귀가 그렇게 중요한 거면 당신이 펴서 확인하던가, 그냥 가지고만 있어도 되는 거잖아?”
“랜서나 삼손에게 들키면 뺏길까 봐 그랬소. 그리고 안에 양각으로 튀어나온 것들은 글씨가 아니오. 마치… 어딘가 끼워 맞추는 열쇠처럼 생겼다오. 그게 내 발가락은 아니겠지만.”
“……그렇다기에는 점자처럼 생겼는걸?”
“이 늙은이가 기억이 가물가물하긴 해도 스무 해가 넘도록 손으로 글씨를 읽어왔다오. 점자였다면 진작에 눈치를….”
“그래, 점자는 아니고. D..G…C. 좌우가 뒤집어진 알파벳이네. 점자라고 생각하고 더듬어서 그동안 몰랐던 걸까? 아니면 이게… 영감 이름이어서 내 앞에서 모른 척 한 걸까? 덕구, 천 씨.”
“허허, 눈치가 참 빠른 아가씨군요. 하지만 DGC는 덕구천이 아니랍니다. Dawn of God’s Child. 이것은 새벽기도원에서 선택받은 자에게 주어지는 영생의 반지라오. 이제 그 주인이 바로 나요!”
“영감. 너였구나. 날 부른 게.”
”맞아요. 아가씨에게 살인청부 문자를 보냈을 때는 이미 제록스가 죽은 후였다오.”
”왜 그런 번거로운 짓을?”
”아가씨가 적합한 인물인지 확인하기 위해서였소.”
”적합? 무얼 하기에? 영감 당신을 죽이기에?”
”으억! 아까 감전됐을 때 내가 살려준 거 잊지 말아 주시오! 랜서와 삼손의 눈을 피해 어깨의 지도가 가리키는 곳을 찾아가기에 적합한지 말이오.”
”거기에 뭐가 있는데?”
”그건 나도 모르오.”
”이 영감탱을 그냥 확!?”
”으억! 뭔지는 몰라도 세상을 구할 소중한 물건이오! 그걸 손에 넣기 위해 죽을 위기도 넘겨야 하오. 그 영생의 반지를 지니고 떠나시오!”
”갑자기 뭔 소리야?!”
”의심을 거두고 서둘러 출발하시오. 이 소설은 여기서 끝나야 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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