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은 반 발자국 앞서야 한다” 비평 브릿G추천

대상작품: 《나는 바나나다》 (작가: 티팟, 작품정보)
리뷰어: 이두영, 19년 5월, 조회 238

1. 풍부한 글 (부 : 나는 왜 장편 연재를 그만두었나?)

7~8회차 정도 연재했다가 그만 둔 글이 하나 있다. ‘당분간 휴재합니다’라고 공지까지 올려놓고 며칠 못 가서 나 스스로 내키지 않아 글을 내렸다. 두 달을 채우지 못하고 연재를 내린 가장 큰 이유는, 내가 아직 내가 쓰려는 글을 감당할 수준이 아니라는 판단 때문. 이야기는 커지는데 내 조절 능력은 이야기를 따라가지 못했다.

돌이켜보면 자연스러운 일이었지 싶다. 글에 너무 많은 것을 담으려는 욕심이 앞섰으니까. AI가 등장하는 SF와 오컬트 요소를 차용한 판타지, 현대 개인의 정신적 스트레스와 심리학 이론, 현대의 사회 담론과 고대 그리스의 역사까지 죄다 동원하여 (나 스스로 판단하건대) 이도저도 아닌 글이 탄생했다. 결국 이대로는 안되겠다는 판단에 글을 내렸다.

하나의 글이 담을 수 있는 ‘최대치’는 어디까지 일까. 이를 특정 숫자로 측정하는 건 불가능하겠지만, 적어도 연재를 접은 내 글의 경우는 감당 못할 수준으로 여러가지를 담으려 했다. 감당 못할 욕심은 고스란히 결과물로 돌아온다.

그러나 글이 마치 조각가의 손길로 섬세하게 세공되듯 자연스러운 구성을 이룬다면, 한편의 글이 담을 수 있는 최대치는 커질 것이요, 그리하여 독자에게 풍부함을 제공할 것이다. 글이 풍부하다 함은, 독자가 글에서 각양각색의 의미와 깊이 그리고 정서적 이입 등 다채롭고 다양한 층위와 지점들을 동시에 그러나 충돌하지 않게 느끼는 경우라고 본다.

«나는 바나나다» 풍부한 글이다.


2. 다양한 요소, 다양한 층위, 다양한 시선

«나는 바나나다»는 SF로 등록되어 있다. 온라인 미디어, VR 영상 조작, 유전자 기술 등 SF적 요소가 어색하지 않게 구현되었다. 이 점에서 이 작품이 SF라는 점은 충분하다. 허나 이것을 이른바 ‘공상과학적’ 측면의 SF라고만 정리한다면, 작품을 읽은 독자들께선 그것만이 전부가 아니라고 하실게다. 이 작품은 사회적 계급/계층 문제를 건드린다.

그리고 사회적 차원에서 집단별로 우열의 구도가 발생함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요, 당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여전한 문제인 바, 그러므로 이 작품은 SF적 요소를 매개로 현실의 문제를 우회적으로 겨냥하는 글이다. 마찬가지로, 5G가 이제 막 상용화에 돌입한 지금, 작품에서 등장하는 합성 영상물과 이로 인한 피해는, 머지 않은 미래에 충분히 예측 가능한 문제라는 점에서 쉬이 독자를 납득시킨다. 유전자 기술의 발달로 인한 사회적 계층 분화 또한 마찬가지이다.

그러면서 한편 이 글은 과거의 역사를 삽화처럼 슬그머니 배치한다. 그리하여, 작품의 시간적 배경은 비교적 근미래적 시대이지만,  작품이 다루는 시간의 폭은 인류 역사의 전반을 포괄한다. ‘사과보다 더 즐겨 먹는 과일로 만들겠다!’하며 무작위로 심어지다가 한방에 전멸 당한 그로미셸 바나나가 바로 그 모든 역사를 포괄하는 상징물로 언급된다.

이렇듯 동원된 요소/소재와 장르적 차원의 SF 그리고 인류사에 대한 조망까지, 작품이 아우르는 영역은 상당한 수준이다. 그런데 층위의 차원에서 살피면 흥미로운 지점이 있다. 바로 개인이 놓인 층위사회적 양상의 층위로 두 겹의 서로 다른 층위를 건드린다는 점이다. 온라인 소셜 미디어를 통해 폭력적 상황에 노출되는 미셸의 모습은 개인의 층위를, 유전자 기술의 발전으로 인해 사회 집단이 분화된 구도는 사회적 층위에 해당한다. 이 점에서 «나는 바나나다»는 장르 소설로서의 SF이자, 동시에 개인과 사회 모두를 조망하는 문학 작품이다.

이처럼 개인과 사회에 대한 이야기를 쓸 때 많은 작가들이 범하기 쉬운 실수 혹은 미숙함에 몇 가지 유형이 있다.

하나는 개인의 이야기에 함몰되는 경우이다. 대부분 주인공 인물이 특정한 의식이나 감정선, 테마로 말미암은 갈등을 빚는데, 주인공 인물의 정서, 주제, 의식을 토로하는 것에 머무르는 방식으로 나타난다. 이 경우 독자는 둘로 양분된다. 하나는 특별한 장치 없이도 인물의 의중에 이입해버리는 경우, 또 하나는 인물의 목소리와 한 발자국 떨어진 위치에서 다소 관조적으로 목격하는 경우이다. 그 자체에 좋고 나쁨이나 옳고 그름은 없다. 작품이 전방위적 차원으로 독자들을 끌어당기지 못한다는 의미일 뿐.

또 한가지는, 사회에 대한 목소리가 높아 작품 내부의 지엽적 부분들이 투박하게 처리되는 경우이다. 소설은 소설이다. 소설이 고소/고발장은 아니다. 다만 소설을 통해 고소/고발의 목소리를 낼 수 있을 뿐이다. 물론 이 순서가 전도 되는 것 자체가 문제라는 말은 아니다. 문제가 되는 경우는, 소설의 구성 장치가 투박해진다는 함정에 빠지기 쉽다는 약점, 이 부분이다. 가령 판타지의 특정 요소가 사용되었으나 ‘환상성/몽환성’이라는 색채 없이 사회 의식만 선명한 경우, 또는 SF 미래 사회를 배경으로 삼았으나 ‘과학기술적 상상력(지식이 아니라 상상력)’을 보기 어려워 굳이 미래 사회 SF로 상정한 배경은 정말 배경으로만 소모되는 경우 등이다. 그리고 이 경우 가장 큰 취약점은, 사회에 대한 목소리가 높은 나머지 인간 개인을 조망하는 시선이 미력한 경우이다. 사회와 개인은 불가분의 관계이다. 개인을 다룬다면 사회가, 사회를 다룬다면 개인이 쌍으로 붙는다.

장르 소설의 덕목은 해당 장르의 ‘장르적 속성/특징/목적 등’을 살리는 것이다.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개인의 목소리 또는 사회에 대한 시선을 담고자한다면, 장르적 요소가 단지 개인/사회를 옮기기 위한 단순 도구 정도로 소모되지 않게 유의해야 한다.

물론, 당연한 말이지만, 장르 소설로서 장르적 특질에 충실하기만 해도 해당 작품은 충분히 잘 만든 장르 소설이다.

내가 이 말을 왜 이토록 길게 하는가? 그것은 «나는 바나나다»가 개인과 사회라는 두 층위를 모두 담아내면서, 동시에 과학기술적 상상력에도 튼튼하게 뿌리를 두어 SF라는 장르의 속성도 지켜냈기 때문이다. 이 말 한마디를 하기 위해, 이 글이 솜씨있게 피해낸 ‘실수와 미숙의 함정’들이 무엇 무엇인지를 길게도 열거했다. «나는 바나나다»를 읽은 독자들이 ‘SF를 읽은 느낌’과 더불어 ‘또 다른 무언가의 느낌’을 받았다면, 나는 그것을 ‘깊이’라 말하고 싶다. 그리고 그 깊이는 단순히 ‘메시지가 깊어서’ 발생하는 게 아니요, SF적 느낌이 덜해서 메시지가 부각되는 게 아니라 SF적 느낌을 충실히 지켜낸 결과 도리어 메시지의 측면이 깊이를 확보한 것이다.

이 작품의 백미는, 미셸과 아미디스가 놓인 서로의 위치와 상황의 어긋남, 그리고 이로 인한 우열 관계의 복잡한 전복이다. 사회적으로 그들이 놓인 위치, 그리고 각자 개인으로서 그들이 놓인 위치, 그리고 그 위치에 의해 최종적으로 귀결되는 결말. 피해자와 가해자, 권력을 쥔 부류와 권력에 짓눌린 부류, 정상과 비정상. 개인과 사회라는 두 층위를 모두 조망함은 물론이요, 그 개인마저도 우열 관계가 복합적이며, 사회의 양상 또한 피해와 가해의 구도가 복합적이다. 그리고 이 복합적 양상이 어느 한 시대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기나긴 역사적 차원의 복합성이라는 점을 드러낸다. 더욱 해야할 말 한가지, 이 모든 복합성을 철저하게 과학기술적 상상력에 기반했다는 점, 즉 SF로 풀어냈다는 점이다.

한마디로 정리하면, «나는 바나나다»는 개인과 사회를 입체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이며, 이를 통해 우리의 역사까지 살피는 작품이며, 그 모든 것을 철저히 SF로 완성시킨 작품이다. 배척을 질서로 하는 집단과 이해를 질서로 하는 집단의 분리, 그리고 그렇게 진행된 역사로 말미암은 희생양, 그 희생양을 오롯이 상징하는 ‘바나나’까지. 바나나라는 사물에 상징성을 부여하는 서사 구축까지 튼튼하다.

세부 내용을 언급하지 않음은, 리뷰로 옮겨서 접하기보단 해당 작품을 직접 읽어보시라는 은근한 추천이다.


3. 발걸음은 얼마나 앞서야 하는가

레닌이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혁명가는 민중들의 눈보다 너무 앞서가선 안된다. 너무 앞서가면, 민중들에게 지지받지 못한다. 그러나 혁명가는 민중들의 눈보다 뒤처져선 안된다. 너무 뒤처지면, 민중들에게 도태된다. 혁명가가 민중들의 눈에서 반 발자국 앞설 때, 민중들은 혁명을 지지한다.”

대중들은 급진적인 목소리에 불안정을 느낀다.

그러나 또한 대중들은 고답적인 목소리를 답답해 한다.

지지 받는 혁명이란 여론이 원하는 것에서 딱 반 발자국 앞선 것, 그리하여 이상향을 가리키면서 동시에 현실적으로 납득되는 것, 그것이라야 한다는 뜻이다.

나는 레닌이 말한 혁명을 작품으로 바꾸어 이렇게 말하고 싶다.

작가는 독자들의 눈보다 너무 앞서가선 안된다. 그러나 독자들의 눈보다 뒤처져선 안된다. 작가가 반 발자국 앞서 있을 때, 독자들은 작품을 지지한다—«나는 바나나다»는 반 발자국 앞에 선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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