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 위에 붙박인 자들 감상 브릿G추천

대상작품: 시간 위에 붙박인 그대에게 (작가: 너울, 작품정보)
리뷰어: 코르닉스, 3월 16일, 조회 62

게으른 감상입니다.

 

스포일러 있습니다.

 

 

 

<시간 위에 붙박인 그대에게>를 처음 읽었을 때, 저는 시간 위에 붙박인 그대가 겨울을 묘사하는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건 일종의 선입견이었습니다. 영생에 대한 묘사는 대부분 그러하니까요. 살아있는 모든 생명은 시간의 무상함 앞에서 저항하지 못하고 흘러가는 와중에 영생을 가진 자만이 혼자 변치 않고 서있는 모습이요. 시간 위에 붙박인다는 표현이 어색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마지막에 여름이 거꾸로 블랙홀을 이용해서 시간여행을 하는 장면에서 웃음이 나왔습니다. 쌍둥이 패러독스는 상대적으로 다른 시간의 흐름을 전제로 합니다. 그 결과는 쌍둥이의 노화로 비교되죠. 하지만 이 경우는 시간여행을 했는데 상대는 영생이라서-적어도 육체적으로는-아무런 차이도 없습니다. 마치 미래과학끼리 맞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유전학 대 물리학처럼 말이죠.

 

그렇게 본다면 시간 위에 붙박인다는 표현은 겨울의 입장에서는 여름이었고, 여름의 입장에서는 겨울이라고 할 수 있는 표현이라 할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작품을 두 번째로 읽고 리뷰를 위해서 틈틈이 작품 이곳저곳을 살피면서 과연 이게 그 의미만 품고 있는 거라 할 수 있을까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실 작품을 읽으면서 어색한 느낌이 드는 부분이 있었거든요.

 

그건 겨울의 행동입니다. 저는 중반부까지는 겨울의 행동과 생각에 대해 많이 공감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겨울의 행동이 갑자기 이해가 되지 않기 시작하는 기점이 있었습니다. 그건 바로 대학에 들어가면서였죠. 솔직히 아무리 영생의 삶을 산다고 해도, 아무리 집안이 좋다고 해도, 겨울은 지나치게 방종하게 살았습니다. 그리고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여름에 대해서 적대적이기도 했죠. 영생이라고 하지만 오히려 너무 감정적인 모습을 보였습니다. 이 시점부터 겨울의 행동을 전반부만큼 공감하기 힘들었습니다.

처음에는 이를 영생을 사는 자의 특이성이라 생각했습니다. 겨울과 여름을 생각하면 꽤 그럴듯했거든요. 그 이름만큼이나 둘은 상당히 다릅니다. 겨울은 영생을 살고, 예술을 하고, 예술을 통해 과거에 집착하며, 지구에 머뭅니다. 거꾸로 여름은 필멸의 삶을 살고, 과학을 하며, 과학을 통해 미래를 바꾸며, 마침내 지구를 떠납니다. 꽤 그럴듯하다고 생각했죠. 하지만 그렇게 보기에는 자꾸 어딘가 어긋나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그건 여름의 행동이었습니다. 여름은 자주 나오지 않지만 나올 때마다 이야기에 많은 영향을 끼칩니다. 그 행동의 동기에 대해서는 정보가 많이 부족했죠. 이 부분은 후반에 폭발하듯이 터져나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기에는 너무 숨겼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솔직히 겨울에게는 숨길 수 있어도 아버지나 어머니한테까지 숨겼다는 건 이해가 가지 않았습니다. 물론 가족과 같이 지내지 않았기에 그런 것이라 생각할 수 있었지만, 아버지의 장례식 후에도 말하지 않았던 건 저로서는 이해가 가지 않았습니다. 차라리 겨울이었다면 이해를 할 수 있었을 겁니다. 저는 육체가 정신에 영향을 준다고 생각하거든요. 영원히 젊은 뇌를 가지고 있다면 영원히 젊게 살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겨울은 다릅니다. 정확한 나이는 모르겠지만 50대 중반에서 후반 정도는 되었을 겁니다. 그동안 시간은 착실히 여름의 뇌와 몸을 바꾸고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현재보다 더 과학이 발달한 세계지만요.

 

처음에 생각했던 게 납득이 가지 않아서 이리저리 궁금해보면서 다른 분들의 리뷰를 보기도 하고 제가 예전에 적은 리뷰를 보았습니다. 그 중에 영생을 사는 자들에 대한 이야기가 있었죠. 그걸 보면서 다시 이 소설도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상처말이죠. 여름과 겨울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상처라고 생각하면 많은 게 명확해집니다.

 

겨울의 상처는 언니와의 이별, 소중한 친구의 죽음입니다. 특히 친구의 죽음으로 겨울의 시간은 멈추게 됩니다. 더 이상 성장하고 싶어하지 않았고 그래도 되었습니다. 겨울의 집안은 부유했고, 겨울의 시간은 무한했으니까요. 겨울은 왜 첫번째 영화를 고등학교 시절의 사건을 다뤘을까요. 그저 겨울의 말처럼 사회가 그걸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이었을까요? 저는 겨울이 소희의 죽음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고등학교 시절에 대한 영화를 만들면서 겨울은 조금씩 상처를 치유하고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여름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여름은 죽음에 대한 공포 덕분에 가족에게, 특히 동생에게 큰 상처를 주었고 거기에서 자신도 상처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상처를 마주하거나 대화할 생각을 하지 않고 그저 가족을 위한다면서 상처를 외면하고 도망쳤습니다. 여름의 시간은 거기에서 멈췄습니다. 이는 부모님의 영향도 있었을 겁니다. 자신들의 결정으로 여름과 겨울의 삶을 뒤틀었다는 죄책감으로 부모는 자식들의 상처를 방치하고 오히려 상처의 골을 더 깊게 만들 지원까지 해주었으니까요. 겨울이 영화를 통해서 상처를 치유했다면, 여름은 연구가 그 모든 것의 시작이자 끝이었습니다. 연구가 끝나면서 여름은 자신의 상처를 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동생과 대화를 나누기로 결심하죠.

 

둘은 가장 큰 상처를 마주하고 나서야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습니다.

 

<시간 위에 붙박인 그대에게>라는 제목을 다시 한 번 생각해보면 시간 위의 붙박이다, 붙잡혔다는 표현은 트라우마를 가진 사람들에게도 쓰이곤 합니다. 사건이 끝났다는 걸 알면서도 정신은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반복합니다. 그게 마치 지금 눈 앞에서 벌어진 것처럼 생생하게요. 상처를 반드시 치유해야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준비되지 않았다면 보기만 하는 것도 괴로울 뿐이니까요. 그저 자신이 다른 삶을 향해 나아가고 싶을 마음과 견딜 기력이 생겼다면 상처를 바라보고 마주하는 것도 좋은 방법 중 하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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