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읽어보는 터라 진행이 바뀌기 전 버전을 읽어보지 못했음을 우선 밝힌다.
이 작품을 읽으며 든 생각은, ‘글을 읽는다’는 행동을 대전 게임에 비유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었다. 플레이어는 독자와 작가다.
다만 독자는 이 게임에서 할 수 있는 게 없다. 패드에는 손을 대지 못한 채 그냥 자기 캐릭터가 얻어맞는 걸 보고만 있어야 한다. 그냥 얻어맞고만 있는 게 지겹다면 독자는 라운드가 끝나기도 전에 자리를 뜰 것이다. 하지만 만약 상대방 플레이어(작가)가 듣도 보도 못한 콤보와 필살기를 선보이며 게임을 화려하게 이끌어 간다면, 독자는 라운드가 끝날 때까지 멍하니 지켜볼 수도 있다.
요컨대 이 작품은 그런 식의 게임이다. 작가의 콤보가 별 볼거리가 안 되면 자리를 뜨고, 화려하다면 계속 독자를 붙잡아둘 수 있는.
그리고 이 비유를 이어가자면, 이 작품은 내게는 라운드의 시간이 좀 길었다고 느껴졌다.
작품의 세일즈포인트는 세 가지로 볼 수 있다.
밀실에서
단 두 명의
심리전.
이런 작품 중 제일 유명한 건 역시 쏘우일 테고, 그 변형도 많다.
나는 이런 소재를 몹시 좋아하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 이유는 이런 소재가 재밌어보이기 보다는, ‘이게 재밌을 수 있을까?’라는 의문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273매 동안 장소 이동이 없다고? 어떻게 이야기를 전개할 생각이지?
273매 동안 등장인물 두 명으로만 이야기를 전개한다고? 그게 가능한가?
이런 식이다.
여기에 더해, 저런 제약을 가지고도 재밌었던 작품들이 있었기에 저런 소재에 흥미를 느낀다.
하지만 선입견을 제외하고 살펴보자면, 이런 소재들은 페널티다. 이런 소재를 다른 분야에 끌어들이면 좀 웃기게 들린다. 이를테면 ‘눈을 가리고 뛰는 축구 경기’ 같은 식이다.
어쨌든 이런 요소들은 독자의 흥미는 사로잡을 수 있겠지만, 실제로 그 요소들로 작품을 써야 하는 작가에게 그 요소들은 여전히 페널티로 작용한다.
그리고 이 작품은, 그 페널티를 완전히 이겨내지 못한 걸로 느껴졌다.
분명 잘 쓴 글이긴 하지만, 앞서 말했듯 좀 길다. ‘분량이 273매인지 27.3매인지 구별이 안 가게 만들 정도의 흡입력’ 같은 모호한 개념을 동원하지 않는 한, 이 작품은 좀 더 짧아야 더 재밌을 것 같다. 쏘우는 103분이지만, 만약 1030분(약 17시간)짜리 드라마인데 밀실에서 벗어나지 않고 두 명이서 심리전을 벌이는 내용이었다면 엄청 지루하지 않았겠는가.
이 작품도 읽다가 어느 순간부터는 온갖 생각이 들었다. 전혀 딴 생각도 했고, ‘빨간 점퍼의 정체는 무엇일까? 혹시 다중인격자이고 게임에서 지면 살인마의 인격이 튀어나오는 건가?’같은 생각도 머리를 어지럽혔다. 분명 그 이전까지 나는 작품에게 질질 끌려다니며 정신을 못 차렸는데, 중간부터는 ‘흠, 지금 나를 끌고 가는 사람은 왼손잡이군. 손에 물집이 잡혀있고 신발 밑창이 많이 닳아있는 걸 보니 험한 일을 많이 하는 사람인 것 같아. 남은 스크롤을 보니 좀 있으면 나를 놔줄 텐데 저녁은 뭘 먹지?’ 따위를 생각하게 만들 만큼, 정신없이 벌컥벌컥 들이키기에는 좀 많은 분량이었다.
그런고로 몇몇 장치들이 아깝더라도 조금 더 쳐냈으면 좋겠다. 1030분은 좀 과장이었고, 2시간 30분짜리 영화를 보는 기분이었으니 2/3로만 줄여도 적정 체중이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