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자는 돌아오지 않는다. 공모 브릿G추천 공모채택

대상작품: 석양을 지는 자 (작가: 강령술사, 작품정보)
리뷰어: 피오나79, 18년 6월, 조회 82

정체를 모를 검은색의 괴물, 수백 마리의 흑수가 성을 공격하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성격이 포악하고 인간과 동물을 가리지 않고 살육한 뒤에 살코기를 뜯어먹는 그들은 키와 몸무게가 인간과 비슷하다. 병사들은 무참히 살육되었고, 판테온의 공주인 패트리아스는 호위장군인 랑부예 덕분에 겨우 그곳을 빠져 나온다. 패트리아스는 성에서 나고 자란 18년 동안 대부분의 시간을 성에서 보냈기에, 바깥 세상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었다. 흑수들을 피해 숲으로 향했지만, 숨을 채 고르기도 전에 어둠 속에서 흑수의 붉는 눈과 마주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부랑자처럼 보이는 한 사내, 쉐파호트를 만나게 된다. 판테온의 공주라는 위치를 이용해 괴물들을 죽이라고 명하지만, 그는 무정하게 명령을 거부한다. 절체 절명의 순간에 그녀는 오래 전에 판테온 국왕이 입수한 보물인 므네를 주겠다는 조건으로 사내의 도움을 받게 된다. 그리고 그와 함께 안전한 판테온 성으로 향하는 여정을 시작하게 된다.

평소에 추리, 스릴러 장르의 작품들을 즐겨 읽는 편인데, 그에 비해 판타지 장르는 굳이 찾아서 읽지 않는다. 왜냐하면 판타지에는 현실성이 결여되어 있으니 말이다. 판타지 소설 안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과거에도, 현재에도 일어나지 않으며, 미래에도 일어나지 않을 상황들이 대부분이다. 따라서 현실에 단단히 뿌리 내리지 않고 있는 허구의 이야기를 새롭게 창조해낼 때, 독자들에게 설득력을 갖게 되기란 상당히 어렵게 마련이다. 누군가 그랬다. 판타지는 ‘불가능의 문학’이라고. 판타지 소설의 모든 것은 사실에 반하며 또한 상식에도 반한다고. 하지만 반대로 판타지 장르를 좋아하는 이들은 바로 그 이유 때문에 판타지를 찾아 읽을 것이다. 어쩌면 가장 순수한 형태의 현실도피 수단이 될테니 말이다. 이 작품은 ‘석양을 지는 자’라는 멋스러운 제목 때문에 읽게 되었는데, 46회차라는 분량이 부담스러워 1,2회차 정도 읽어보고 그만둘 생각이었다. 그런데 초반부터 가독성이 뛰어 났고, 문장도 군더더기가 없었으며, 캐릭터와 갈등도 분명했다. 어느 정도 장르의 공식 대로 흘러가는 부분도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

초자연적인 세계 구축과 액션 장면도 괜찮았고, 그 와중에 여러 인물들의 시점에서 진행되는 스토리들도 각각 흥미로웠다. 쉐파호프와 패트리아스, 벨룸과 쇼트만, 글로리아와 베스 등 각각의 인물들이 움직이는 동기가 뚜렷하기 때문에 이야기가 한 방향으로 달려간다는 점도 좋았다. 무엇보다 쉐파호트라는 비밀 많은 캐릭터가 독특했는데, ‘살아 있지만 오래 전에 죽은 존재’라는 알 수 없는 말 덕분에 신비로웠고 호기심을 자극시켰다. 물론 친숙하고 예측이 가능한 클리셰도 있고, 흑수라는 존재가 인물들에게 별로 위협적으로 느껴지지 않는다거나, 약간의 유머 감각이 필요한 장면에서 별로 웃기지 않는 다는 단점도 있지만, 그럼에도 힘있게 앞으로 달려 나가는 이야기의 매력이 있는 작품이었다. 판타지로 시작해 로맨스로 마무리되는 스토리도 나쁘지 않았고 말이다.

죽은 자는 돌아오지 않는다. 하지만 살아 있는 자에게는 반드시 회한이라는 감정이 남게 마련이다. 이미 나쁜 결말이 정해져 있는 상태에서, 내가 그때 이랬다면… 하는 선택에 대한 후회 혹은 시간을 다시 되돌려 결말을 바꾸고 싶다는 마음 모두 회한의 정서이다. 쉐파호프가 수백년 동안 죽지도, 살지도 못하는 고독한 상태로 있는 이유도, 귀족 살인 사건에서 살해당한 아버지의 복수를 위해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글로리아 동기도 모두 그러할 것이다. 전투와 모험이 주요 플롯이지만, 인물들의 정서를 따라 가면서 읽으면 더 흥미로울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인간은 후회의 동물이니 말이다.

모든 장르를 통틀어 판타지는 독자가 사실이 아님을 알면서도 기꺼이 속아주고 싶게 만드는 진실성이 가장 필요한 장르라고 한다. 어떤 장르든 허구의 이야기를 새롭게 구축하기 위해서는 작가가 독자들이 속아 넘어 갈만한 거짓말을 해야 하겠지만, 판타지란 가장 현실과 동떨어진, 가짜 같은 세계 속에서 펼쳐지는 이야기이니 그만큼 믿고, 공감하기란 어려울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가독성이 좋은 판타지 작품을 오랜 만에 만나고 나니, 이 장르의 작품들을 조금 더 찾아서 읽어봐야 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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