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몬과 모어, 그리고 다시 레몬으로 비평

대상작품: 레몬과 모어 (작가: 양윤영, 작품정보)
리뷰어: 담장, 9시간 전, 조회 17

*스포 주의. 소설 감상 후 열람을 권장드립니다.

이곳은 지구로부터 오는 연락을 받는 데만 이틀이 꼬박 걸리는 먼 행성 ‘왈가’, 그중에서도 온난한 지역에 속하는 ‘레몬’에는 지구에서 이주한 인류들이 살고 있다.

언어에 특출난 재능을 가진 ‘나’는 왈가에서 투어 통역가로 일하고 있다. 자신을 괴롭게 하던 엄마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지구를 떠나 왈가로 온 그는 모국어가 아닌 다른 언어를 할 때마다 엄마로부터 독립한 듯한 기분을 느낀다.

그러나 독립 했다고 생각해도 오랜 기간 애증으로 점철되어 온 관계를 쉽사리 잊긴 어렵다. 그러던 도중 ‘나’는 레몬의 원주민들이 쓰던 독특한 언어, ‘레몬어’를 접하게 되고 배우기 시작한다.

 

그 소리들은 괴상했다. 똑딱거렸고 뻐끔거렸고 딸깍거랴서, 비눗방울이 터지는 소리처럼 들리기도 했거 물이 떨어지는 소리 같기도 했다.

레몬어는 지구인이 알아들을 수 없는 음절들로 이루어진 언어로, 마치 우리가 돌고래 초음파를 듣지 못하듯, 레몬어 역시 어떤한 매커니즘으로 인해 지구인이 온전히 인지할 수 없는 언어이다.

레몬어에는 특이사항이 두 가지가 있는데, 첫 번째는 레몬어를 익히는 순간 뇌 구조가 달라져 그간 알고 있던 모든 언어를 잃는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성인 이후 레몬어를 배우는 학습자들은 ‘세례식’을 통해 뇌 구조를 레몬어에 적합하게 변경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입에 담을 때마다 엄마와의 안 좋은 기억이 떠오르는 모국어를 잊고 싶은 마음에 어쩌면 막연하게, 세례식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불과 세례식을 앞두고 엄마의 비보를 전해들은 ‘나’는 지구에 다녀올 기회를 얻게 된다.

 

기회. 과연 기회일까. 엄마를 떠나 지구를 떠난 ‘나’에게 세례식을 포기하면서까지 지구에 돌아갈 이유는 없어보이지만 ‘나’는 망설인다. 분명 엄마를 미워하는 게 아니었나. 이건 그저 끝을 보기 위함인가.

‘나’는 왜 지구를 다시 궁금해하고 방문할 생각인가. 그토록 바라던 새 삶에 대한 가능성을 잠시 보류하기까지 하면서?


왜 애정과 증오는 공존하는가

왈가의 해는 지구의 태양보다 언제나 더 밝게 느껴졌다. 특히 아침이면 사선에서 쏟아지는데도 햇빛이 마치 핀 조명처럼 느껴졌다. 이런 빛 아래에서는 어떤 비밀도 숨길 수 없을 것 같았다.

햇빛 아래를 걷고 있자니 또 다른 비밀이, 내가 애써 묻어두었던 마음이 번쩍 고개를 들었다.

지구와는 닮은 것이라곤 전혀 없는 왈가의 숲을 보며, 그리고 왈가의 노을을 보며 ‘나’는 자신이 엄마를 미워하지만 동시에 사랑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상담사 역시 객관적인 조언으로써 ‘나’가 받은 건 학대라고 말하고, 그것으로부터 독립해야 한다고 말하지만, 그래서 ‘나’ 역시 착실히 새로운 삶을 꾸려나가고 있었지만, 어째서일까. 이것은 스톡홀름 증후군의 일종일까? 그렇다면 왜 이런 일이 늘상 발생하는 것일까?

 

가정폭력이 아닌 일반적인 케이스, 타자가 누가 되었든 우리는, 아무리 못났고 결점 투성이인 사람도 오래 지켜보다 보면 그러고 싶지 않아도 ‘이해’하게 되는 순간이 온다. 처음 봤을 때는 왜 저런 행동을 하고 왜 저렇게 말을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던 부분 역시 어쩌다가 저 사람이 저런 말과 행동을 하게 됐는지, 그 계기가 뭔지 이해하게 된다면 더 이상 그 사람을 온전히 미워할 수 없다.

좋아하진 못하더라도 마음 놓고 싫어할 순 없는 것이다. 물론 이는 대체로 10년 이상 긴 세월을 보면 서서히 체득하게 되는 것이므로, 타인을 이해하게 된 그 순간을 콕 짚어 말하기 어려울 것이다.

 

엄마가 내가 알려준 발음들을, 단어들을 잃고 싶지 않다.

엄마를 미워하는 마음과 사랑하는 마음이 서로를 부정한다.

언어들이 서로를 파괴하는 것처럼 이들도 서로를 파괴한다.

그러나 가정폭력에 관해 왜 피해자가 가해자를 완전히 끊어내기 힘든 지를 알고자 한다면, 여기서 한 단계 나아가야 한다.

우리는 양육자를 완전히 ‘타자화’할 수 없었다.

이는 양육자가 ‘가족’, ‘혈연’의 관계로 이어져 있기 때문이 아니라, 관계의 역사와 그로인해 동일시된 자아 때문이다.

그리고 후자는 크게 두 가지에서 기인한다.

 


1. 인간은 자신이 싫어하는 사람을 일정 부분 닮게 된다

첫 번째 이유로, 인간은 역설적이게도 자신이 가장 싫어하는 사람을 닮게 된다. 가정폭력의 되물림이 가장 대표적인 예시다.

누군가를 싫어한다는 것은 결국 그것에 대해 일정 시간 이상 할애한다는 것이며, 그것이 설령 본인이 원해서 싫어하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은연 중에 영향을 줄 수밖에 없다. 인지 왜곡이란 것은 돌연 생기는 것이 아니라, 가랑비에 젖듯 찬찬히 스며들기 때문이다.

다만 타자화의 불가함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면 첫 번째 이유만 드는 것은 아주 위험한 발상이다. 이는 자칫하면 가정폭력 피해자들에게 일종의 연좌제처럼 작용하는 프레임을 씌울 수 있기 때문이다.

원인과 이에 따른 현상을 파악하기 위해선 편견처럼 작용할 수 있는 부분을 최대한 배제하되, 그렇다고 이를 외면하지 않고 근본적인 촉발제를 파헤쳐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반드시 두 번째 이유를 함께 고려해야만 한다.

작품에서도 첫 번째 이유가 아닌 두 번째 이유에 관해 회상을 매개로 길게 서술하고 있다.


2. ‘환경’과 ‘상황’은 언제나 사람의 의지를 압도한다

엄마가 울며 잠에 들면 나는 엄마에게 두터운 이불을 덮어주고 침대로 돌아갔다.

두 번째는 오히려 독립 이후나 독립을 목전에 둔 상태에서 많이 겪는 고뇌다.

우리는 삶을 살아가며 인생이 뜻대로 되지 않고, 때로는 아주 불합리하며, 그 부당함은 때때로 특정 집단과 특정인에게 쏠려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이 세상은 한쪽으로 기울어진 운동장과도 같다. 그리고 작중에 나온 ‘나’의 엄마처럼, 그리고 우리가 아는 현실 세계처럼, 특히나 독박 육아에 관해 사회는 남성에게만 유독 너그럽고 돌봄 노동의 가치를 폄하하는 경향이 있다. 이는 지속적인 닳아짐에 관해 사람들이 얼마나 무지한지 알려주는 증거다.

이리 말하면 고리타분한 이야기처럼 들리고 체감이 되지 않을 수도 있다. 너무 뻔한 이야기처럼 여겨지고 원론적인 이야기만으로 들릴 수 있을텐데, 인간이 ‘망가지는 것’ (이 말을 별로 좋아하진 않는다)은 그리 극적인 장면들로 이루어져 있지 않다.

 

이해하기 쉽게, 조금 속된 말로 설명해보자면, ‘살다보면 멀쩡했던 사람이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훼까닥 해버린다’는 말이 있다.

인간을 가장 잘 망가트리는 것은 분노도 슬픔도 아닌 ‘억울함’이다. 그리고 세상은 참 불공평해서 아무리 억울해도 그 억울함이 해소될 때까지 나 자신을 스스로 건사하지 못하면 더 진창에 처 박고, 때로는 억울함이 끝내 풀리지 않을 때가 많다.

‘꺾인다’라는 말을 들어본 적 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그 단어만큼 가장 싫어하면서도 현실을 가장 잘 반영한다는 단어가 없다고 생각한다. 지속적이고 끝이 보이질 않는 닳아짐, 최소 10년부터 길게는 20년, 30년, 그것이 결국엔 내 전부이자 이전의 삶, 정상적인 삶을 잃어버렸다는 감각은 사람이 자기 자신으로서 존재할 수 없게 만든다.

 

답답한 상황이 지속되고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면, 그러나 도망칠 수도 없다면 처음에는 도저히 참을 수 없어 혼자서 비명을 지르거나 우는 것에서 시작해서 나중에는 ‘액팅 아웃’처럼 표출하면 버틸 수 없게 된다.

우리는 살면서 마주하는 각자의 억울함을 소화해야 하는데, 당사자가 되면 ‘터널 시야’에 갇혀 그 바깥의 가능성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상황을 마주한다. 여기서 벗어나기 위해선 아주 소소한 것이라도 ‘터널 안에 갇히지 않은’ 타인의 도움이 거의 필수불가결한데, 상황상 이러한 도움을 받지 못하거나 외부와의 접촉이라는 것이 불가할 경우가 존재한다느 것이다.

그건 그 사람이 특출나게 못났거나 나빠서가 아니라, 단지 ‘운이 좋지 않아서’ 그런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당사자의 노력이나 심성에 의한 것이 아니라 그저 운에 의해 결정된다는 사실 역시 억울함으로 작용하게 된다.

 

그럼 문득 이런 생각이 드는 것이다.

‘만약 내가 엄마와 역할이 바뀌었다면 어떻게 됐을까? 내가 엄마의 상황에 놓이고, 엄마가 나의 상황에 놓인다면, 나는 그때도 여전히 선량한 피해자로 남을 수 있는가? 과연 나는 닳아짐에 의한 어찌보면 필연적으로 천천히 가해자가 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가?’

자신을 학대했던 양육자가 처한 상황이 객관적으로도 주관적으로도 부당하고 이에 따라 자신에겐 가해자인 양육자가 다른 면에서는 완벽한 피해자일 수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순간 우리는 타자화를 포기할 수밖에 없다.

가정폭력 피해자들이 가장 잘 알고 있는 사실은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상황은 언제나 사람을 꺾으며 닳게 만든다’는 것이고, 그렇기에 ‘나는 양육자와 다르다’라고 확언할 수 없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내가 특출나게 선한 사람이라서, 강한 사람이라서 가해자가 되지 않고 피해자로서만 남게 될 수 있던 게 아니라, 그냥 모든 상황이 ‘운’으로 작용해서 나만 ‘간신히 가해자가 되지 않았음’을 실감하게 된다.

간신히 살아남았다는 감각이 사람을 얼마나 아슬아슬하게 만드는지는 당사자가 아닌 이상 완전히 받아들이기 어려울 수 있다.

 

그러나 ‘아예 폭력을 휘둘러보지 않은 사람은 있어도 단 한 번만 때리는 사람은 없다는 것’을 고려해야만 한다. (물론 이러한 생각 역시 어느 정도 편협함을 알지만 이에 관해서는 후술하겠다)

정말로 가정폭력은 시작이 가장 어렵다. 기회는 한 번밖에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단 한 번, 자신의 화를 주체하지 못하거나 상황을 버티지 못해 화풀이용으로 타인에게 폭력을 휘두른 존재는 다음 번에도 같은 방식으로 폭력을 휘두르게 되어 있다.

특정인의 성향이 그런 게 아니라, 정말로 ‘아주 쉬운 방법’을 찾아버린 존재가 그 방법을 다시 행하지 않을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건 그저 방아쇠를 당기는 것으로밖에 여겨지질 않기에 (첫 번째 이유에서 언급한 ‘가정폭력의 되물림’도 이와 비슷한 이유로 작동한다), 피해 당사자들은 자신이 양육자와 동일한 존재가 되지 않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면서도 상황은 언제나 사람보다 강하다는 사실과, 기회는 단 한 번뿐이라는 사실을 상기하고 살게 되는 것이다.

이게 바로 폭력을 휘두른 양육자를 완전히 타자화할 수 없는 가장 큰 이유이다.

 


그렇다면 살아남은 우리는 어떻게 잘 살아야 하는가?

언어로부터의 해방은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가?

 

하지만 엄마의 인생을 망친 건 내가 아니야. 엄마만큼 고통받는 내가 여기 있다.

그렇다면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서, ‘나’는 엄마를 통해 인간의 입체성을 배웠으나, 그건 가해자만의 걱이 아니라 피해자에게도 존재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지나치게 연민과 선해를 보내는 것 역시 어쩌면 가해자를 옹호하는 것으로 치우칠 수 있다는 것을 은연 중에 깨닫는다.

엄마가 아빠의 피해자라는 이유로 내가 엄마의 피해자라는 사실을 외면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앞서 논의했던, 타자화를 불가하게 만든 두 가지의 이유가 ‘나’를 비롯한 가정폭력 피해자의 사고에 지대한 영향을 끼침을 알아보았다. 아예 폭력을 휘둘러보지 않은 사람은 있어도 단 한 번만 때리는 사람은 없다는 것. 이는 절대적인 진실이라 단언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틀렸다고 말할 수도 없는 딜레마에 갇혀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상황에 따른 의지의 취약성과 가해자와의 동질화에 대한 강박, 앞으로의 가능성을 제한하고 발목을 묶는 것들에게서 자유로워지되, 가해자가 되지 않고 되물림을 끊을 수 있을까?

 

어떤 사람은 자신이 미처 시도하지 못한 가능성을 내버려두면 사라져버릴까봐 이를 직면하기 위해 돌아가고, 어떤 사람들은 과거를 뒤로 남겨둔 채 미래로 나아간다.

또 어떤 사람은 자신이 겪었던 기억을 극복하고자 화목한 가정을 꾸리고자 노력하고, 또 어떤 사람은 가족을 꾸리기보단 스스로 단단해지고 관찰자로서 타자에게 애정을 쏟는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한다. 기울어진 운동장을 되돌리기 위해 싸우기도 한다.

 

“엄마가 뭐예요? 레몬어로요.” “없어요.”

“레몬어로 엄마에 해당하는 단어가 없다고요.”

레몬어를 떠나보내며 마지막으로 자신의 삶을 뒤흔들던 모국어 단어 ‘엄마’를 재해석하기 위한 시도로써 ‘나’는 레몬어로 엄마가 무엇인지 묻는다.

“알잖아요. 레몬은 공동육아 문화라는 거. 엄마도 아빠도 없어요. 개념아 없으니 레몬어에서 엄마는 그저 환상 같은 거죠.”

그러나 레몬에는 이를 뜻하는 단어가 없다. 말하자면 신기루 같은 단어인 것이다.

엄마에게서 엄마라는 단어를 지워본다. 레몬어를 익힌 사람처럼 단어를 지우고, 환상에 불가한 단어가 한 개인을 고통으로 밀어넣는 상황을 상상해본다.

언어는 인간의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언어로 정의내려지지 않은 생각과 감정은 두루뭉실하다. 라벨링 되지 않은 것들은 ‘나’를 혼란스럽게 만들기도, 해방감을 주기도 한다.

그러나 ‘나’가 느끼는 것은 어떠한 허탈함이다. 그러나 그 끝에서 깨닫게 된다.

중요한 건 단어 자체가 아니라 해석이고, 그 주체는 자신이라는 것을 말이다.

모두가 각자의 자리와 상황에 맞춰 그때그때 최선의 선택을 하듯, ‘나’ 역시 선택을 하는 순간이 오게 된다.

마지막 장면에서 ‘나’는 지구에 가지 않고 왈가에 남는다. 엄마의 마지막을 들여다 보지 않을 것이다. 다만 새롭게 얻은 삶을 바라볼 것이다.

방법에 있어 어느 것이 더 성숙하고 미성숙한 지, 좋고 나쁨을 가릴 수 없다. 아무리 좋은 사람이라도 극한의 상황에서는 압도당해 얼마든지 조각날 수 있다는 사실은, 역설적으로 어떤 희망이 될 수도 있다. 상황이 좋아지면 당신도 좋아질 것이라는 반증이기도 하니 말이다. 그러니 매듭에 방법에 있어서도 상황마다 최선의 방법이 전부 다르기 때문이고, 우리가 그 상황에서 그러한 선택을 한 이유는 그 선택이 그때 당시에는 선택할 수 있던 ‘최선’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말할 수 있었을까. (중략) 엄마가 아니라 나를 봐야 했던 거야.

시간이 꽤 흐른 후 처음 한 선택을 바꾸는 일이 있어도, 과거의 선택과 방식을 후회해도 괜찮다. 그것은 우리의 삶을 제한하지 못할 것이다. 만족한다는 것도, 후회한다는 것도 결국엔 전부 모든 일은 매듭지어졌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애정과 증오 사이, 끝없는 닳아짐의 시간, 미완결의 기간 내내 늘 불안해하던 우리는 결국 어떤 방식으로든 우리를 괴롭게 하던 시간들을 우리 스스로 완결지었다.

‘나’에 다가올 앞으로의 왈가에서의 삶이 온화하듯, 어른이 된 우리가 살아갈 가능성들은 무궁무진하다.

 

“괜찮아요?” “모르겠어요.”

비록 지금은 이 선택을 확신할 수 없더라도 말이다.

나는 적어도 나에게만큼은 공백이 아니니까.

이야기의 시작에선 막연하게 레몬어를 배우고자 왈가에 남기로 했던 ‘나’는 작품의 말미에서 본인의 의지로 왈가에 남기로 결정한다. 왈가에서 레몬어를 배울지 말지는 중요하지 않다. 무슨 선택을 하든 전부 괜찮을 것이다.

‘나’는 어디로든 갈 수 있다. 원한다면 어디로든 떠날 수 있고 어디에든 머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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