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와 늑대, 그리고 뮤즈의 시간 비평

대상작품: 미선이현AI – 당신의 뮤즈가 되어 드립니다 (작가: 노말시티, 작품정보)
리뷰어: 김시인, 4시간 전, 조회 17

2025년 3월, 지브리 애니메이션의 화풍을 모방한 생성형 AI 이미지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수십 년에 걸쳐 축적된 거장의 감각과 재능이 프롬프트 한 줄로 재현되는 광경은 사람들을 흥분시키기에 충분했다.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개인의 의지와 무관하게 도래한 AI의 시대 앞에서 우리는 질문하게 된다. 과연 이 낯선 동반자를 무엇이라고 불러야 할까? 타인의 예술을 훔치는 도적인가, 창작자들을 고통에서 해방시킬 구원자인가.

 

「당신의 뮤즈가 되어드립니다」는 이 질문에 선명하게 대답하기보다 그 경계가 흐릿해지는 ‘개와 늑대의 시간’으로 독자를 이끈다. AI 뮤즈는 작중 작가들이 가장 선호하는 도구답게 기막힌 기능을 자랑한다. 참신한 플롯을 제안하고, 캐릭터에게 안성맞춤인 대사를 만들어 내며, 독자의 가독성을 수치로 제시해 주기까지. 이쯤 되면 그리스 로마 신화 속 예술의 여신이 AI의 몸을 입고 가장 낮은 곳으로 내려왔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과연 뮤즈는 창작자들을 차별 없이 고통에서 해방해 줄 구원자일까? 작품은 프리미엄 버전 체험 기간이 종료되는 순간 본색을 드러낸 뮤즈를 통해, AI 개발자들이 선뜻 말하지 않는 불편한 진실을 드러낸다. 미선이 완성한 작품을 인질 삼아 저작권료를 요구하는 뮤즈의 저 뻔뻔함을 보라. 무료 사용자와 유료 사용자가 누리는 성능의 압도적인 격차는 또 어떤가. 자본의 질서를 성서 삼고 두둑하게 헌금을 낸 창작자만 가호하는 뮤즈는 예술이 아니라 차라리 자본주의의 신에 가까워 보인다. 그렇다면 뮤즈는 작가 지망생들의 미숙한 아이디어와 값싼 노동을 갈아 네포 베이비들의 분유 재료로 삼는 악신이자 도적인가? 그러나 작품은 AI를 섣불리 선과 악으로 규정하지 않는다. 이현의 소설 제목인 「일곱 빛깔 그림자」처럼 그림자에는 꼭 그만큼 밝은 빛도 존재하는 법이니까. 누가, 어떤 목적으로,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뮤즈는 우리를 유토피아로 인도할 수도, 디스토피아까지 끌고 갈 수도 있는 것이다.

다만 이 작품은 그 가능성과 위험을 끝까지 밀어붙이기보다 질문을 던지는 선에서 멈춘다. AI가 만든 결과물을 어디까지 예술로 인정할 수 있는지. 타인의 창작물을 기반으로 한 학습과 생성은 어디까지 허용될 수 있는지. 모두가 사용할 수 있는 AI를 전제하더라도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비용과 격차는 어떻게 해야 할지. 꼬리에 꼬리를 무는 물음표에 대해 작품이 내린 ‘답 없음’이라는 결론은 어쩌면 충분치 않게 느껴질지 모른다. 하지만 이런 질문들은 마라탕 한 그릇을 비우는 동안 답을 내리기엔 지나치게 어렵고 복잡하다. 더불어 이 식사 자리가 이현과 미선의 첫 만남이었다는 것도 간과해선 안 된다. 답 없는 질문에 치열하게 부딪히는 과정은 작가의 연작 속에서 끊임없이 이어지기 때문이다. 연작인 「자율 주행 알고리즘 최적화를 위한 비공식 합의팀」에서 등장하는 이현과 미선은 이 작품의 이현과 미선과 다른 인물이지만, 같은 이름을 공유하는 만큼 답 없는 질문을 대하는 성실함만은 동일하다. 아니, 어쩌면 진화한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이들의 서사는 단번에 결론으로 수렴되지 않고, 작품과 작품을 거치며, 숱한 경험과 실패를 통해 나이테처럼 조금씩 축적되기 때문이다. 뮤즈가 중개하는 저작권을 불매하거나, 오픈 소스 버전 뮤즈를 꿈꾸던 미선과 이현은, 「자율 주행 알고리즘 최적화를 위한 비공식 합의팀」에서 자율 주행 알고리즘에 대항하고 ‘답 없는’ 질문을 사회의 화두로 던지기에 이른다. 그렇게 축적된 나이테야말로 해답을 찾기 위해 헤맨 발걸음이며, 때로는 그 자체가 수많은 물음표에 대해 가장 정직한 답이 되기도 한다. 우리가 정교한 AI의 결과물보다, 투박한 인간의 작품 앞에서 더 쉽게 마음이 움직이는 이유도 여기에 있지 않을까? 예술이란 완성된 결과보다 그 결과에 이르기까지의 지난한 시간에 가깝고, 그런 의미에서 미선과 이현의 여정은 앞으로 AI 시대를 살아갈 ‘당신의 뮤즈가 되어’줄 자격이 있다.

목록
이전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