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케이누는 한 용사를 사랑하는 아내를 화자로 내세운 서간체 판타지 작품입니다. 글 제목은 싸움에 진 개를 뜻하는 일본어에서 따 온 것입니다. 사실 내용에서는 그닥 일본 풍의 느낌은 받지 못했기 때문에, 굳이 일본어 제목을 사용할 필요가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남기는 했습니다. 어쨌든 ‘패배한 개’는 사랑에 실패한 용사나 화자, 혹은 둘 다를 의미하는 것 같았습니다. 작품 전반적으로, 어떤 슬픈 에필로그처럼 느껴집니다.
이야기 구성은 단순합니다. 어느날 자신의 앞에 나타난 용사를 화자는 사랑하게 되고, 그와 결혼하고 아이도 낳습니다. 하지만 용사는 화자를 원래 이름이 아닌, 옛날 사랑했던 공주의 이름으로 부릅니다. 화자는 남편이 자신을 원래 이름으로 불러주길 바라지만, 용사는 오히려 폭력을 행사합니다. 그리고 아들과 남편이 수행을 떠난 사이 화자는 자살합니다.
제가 느낀 솔직한 감상은, ‘아 이 커플 참 찌질하다’ 하는 불만에 가까웠음을 고백합니다. 현실에서도 첫사랑을 잊지 못해 그녀를 닮은 사람을 이상형으로 삼는 남자들이 있죠. 하지만 적어도 그들은 새로 만나게 된 여성에게 그 마음을 숨기면 숨겼지 대놓고 드러내지는 않습니다. 그건 현재 사랑하는 이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용사는 자신의 입장에서만 세상을 바라보았을 뿐 다른 사람의 마음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힘만 셌지 제대로 된 사랑을 할 줄 모르는 어리석은 남자였던 겁니다. 아내는 에피가 아닌 다른 사람인데도 계속해서 에피라고 우기는, 게다가 옛 시대의 일에 대답하지 못하는 그녀에게 자기가 상처받은 양 한숨을 내쉬는 인지부조화의 오류를 저지르고 있는 겁니다. 아무리 과거의 일로 트라우마가 있었다고 해도 참 찌질하기 그지없습니다.
이런 캐릭터는 용사보다는 전형적인 빌런의 성격에 가깝습니다. 만에 하나 화자가 용사를 사랑하지 않았으면 어땠을까요? 자신은 에피가 아니라며 처음부터 용사를 미친사람 취급했다면? 그럼 용사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강제로 그녀를 구속해 두고 사랑을 갈구했겠죠. 그런 행동이 공주를 탑에 가둔 오우거와 뭐가 다를까요?
사실 화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녀의 분노는 한참이나 뒤늦은 감이 있습니다. 처음부터 용사는 그녀를 에피라고 불렀으니까요. 피를 흘리며 나타난 용사, 자신을 자기 이름으로 불러주지도 않는 용사를 보고 화자가 사랑을 느낀 것도 다소 개연성이 없지 않나 싶었어요. 그래서 정말 그녀가 공주의 환생인 건 아닐까 했죠. 그런데 그런 정황은 딱히 드러나지 않더군요.
괜히 용사를 만나 인생을 망친 화자가 불쌍하긴 했지만, 엄밀히 말해 결국 그건 본인 선택이었습니다. 있는 그대로의 자기 자신을 사랑해주지 않는 남자를 왜 배우자로 택했을까요. 왜 굳이 먼 옛날의 에피 공주와 불필요한 정체성 싸움을 해야 했을까요. 사랑해서? 글쎄요. 용사의 트라우마를 포용하고 모든 것을 감수할 만큼 큰 사랑이었다면, 전부 묻어두고 평생 함께할 수 있었어야죠. 결국 화자 입장에서도 진정으로 용사를 사랑했다고 볼 수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사랑은 서로 맞추어가는 거죠. 각자가 자기 위치에 못박힌 듯 서서 일방적으로 상대방에게 이해를 강요하는 게 어떻게 사랑일까요. 사랑에 서툴렀던 두 사람의 모습과 결말은 애절하고 불쌍하고 안타깝긴 하지만, 동시에 답답하고 바보 같습니다. 용사가 앞으로 다른 여자를 또 만날지는 모르겠지만, 다음에는 좀 더 성숙한 사랑을 하기를 기원해 봅니다.